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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도전받는 현대인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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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가정이나 치유 불가능한 가정을 볼 때, 가정사역 (Family Ministry)이 얼마나 필요한 때 인지 절감하게 됩니다. 가정은 신앙적 삶의 실천장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열린 가정'이 되어야겠는데, 당신의 가정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 앞에 건강하십니까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고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말 할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가정에 대해 도전적인 말씀을 하신 '가정 파괴자'로 생각되기 쉽 습니다 어미와 딸, 아버지와 아들, 시어머니와 며느리에게 분쟁(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냐'고 하신 것을 보면(마12 :48), 가정을 소홀히 한 사람이라고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본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에덴의 축복을 잃어버린 世俗家庭(세속가정)에 던지신 도전이요. 비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현대인의 가정이 병드는 것, 내지는 깨어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 하십니다. 요즈음 자녀의 폭군화 (마마보이 아니면 오렌지족), '고개숙인 남편'의 무능화 내지는 부권 상실, 아내의 우울증과 불안, 질병, 빈곤, 고독, 무력감으로 인한 노인 소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어야 할 목회자의 사역이 가정 문제가 어려움을 주는 경우도 흔하게 있습니다.
다.
A. 무엇 때문에 가정이 이처럼 위기상황에 도전 받게 되었습니까
1. 가정의 공동체 의식이 결여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의 특징인 공동체성 을 무시한 극단적 개인주의가 가정에까지 침투했습니다. 어느 가정의 슬픔은 자녀들이 각기 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모래알 처럼 흩어져 가족간에 인격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고 말한 공동체로서의 가정이함께 살고 죽는 원리를 알아야 다양한 가정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노아는 가족 구성원을 중시했고, 아브라함은 가는 곳 마다 가족을 이끌고 복을 받았으며, 야곱은 75인 가족을 이끌고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집안은 아들의 비행으로 망했고, 가족관리를 잘 못한 사울의 집은 점점 망해 갔습니다. 가장으로서 신앙의 공동체인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 하는 문제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집은 있는데 가정은 없다'는 말은 얼마나 삭막 합니까 흩어진 둥지에는 새알이 없습니다.
2. 가족의 자리를 존귀하게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핵가족이 성행하면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실수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점점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부모가 잘해야 자녀도 잘하지 않습니까라는 것 입니다.
창세기 9장에서, 술취한 노아의 실수로 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부모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자매는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를 용서 못함으로 어둡게 살았던 청소년 시절과 세상에 존재하는 두어머니 때문에 창피했던 일들을 고백하며 후회했습니다.
아버지의 실수에 대한 자녀들의 반응에 따라 그 일이 축복과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부모가 잘했든지 못 했든지 '너를 낳아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미를 업신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뜻은 아비가 잘못해도 된다는 애기는 아닙니다. 부모도 인격적 허물을 가질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도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 심각합니다. 어떤 가정 학자의 말에 해와가 오랜 산이유는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라는 유모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성경적인 고부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성도 답지 못한 시어머니 때문에 교회생활 안하겠다는 며느리의 푸념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가정의 자녀의 위치도 귀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는 가정의 꽃이요,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요, 전통에 가득한 화살과 같다고 했습니다. 잘할 때는 '내 아들, 내 아들' 하다가 못 할때는, '저 웬수, 저 웬수'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압살롬아 압살롬아'하고 슬피우는 사연을 아십니까 잘 하는 아들만 아니라 잘못할 때 일수록 내 몸의 소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기다림처럼 우리는 종이 아닌 자녀의 자녀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쓸모 없는 놈'이라는 말 한마디에 격분하여, 아버지를 살해한 모 교수의 패역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형제불화가 있어 아들이 아들을 팔아먹는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불효하는 아들' 같은 그 아들들이 노년의 야곱을 위로하고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문제없는 자녀는 없습니다.
몰 인정스런 아내도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는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욥의 아내를 안 빼앗아간 이유는 아내가 없으면 환란 후에 욥에게 새 자녀를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만큼 속 썩이는 아내라도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는 원칙적으로 귀한 것입니다. 요즈음 신바람 타는 황수관 교수는 '아내를 하루에 두번씩만 칭찬하라'고 강조합니다.
B. 가정문제 해결 방법
1.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가정의 질서를 찾으십시오.
가정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의 최초 제도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을 받은 것은 어떤 시련의 경우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헨리포드는 '진정한 가정은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사랑과 신앙이 있느냐가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인권이 성하면 신권(神權)이 죽습니다. 물질 가치관이 성하니 영적 가치가 죽습니다. 가정이 물질주의에 만연되면 그 가정은 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여호와 하나님 되게 하고, 아버지로 아버지되게 하고, 자녀로 축복의 자녀가 되게 하려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너진 가정 제단을 수축하십시오. 이혼 직전의 주부가 교회로 인도받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으로 어려운 가정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2. 가족간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 하십시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 나타난 '하나됨의 비밀' 가운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권라와 의무가 있습니다. 사랑과 존경입니다. 남편은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아내를 소중히 여겼습니까 사라 또한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면서 얼마나 존경 했습니까
가정에서 남편의 家部長的(가부장적)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말씀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여기 "공경"이란 인체의 간장(肝腸)처럼 중하게 생각 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삭의 순종은 가히 교훈적입니다.
자녀를 편애하지 마십시오. 자녀에대한 리브가의 편견이 에서와 야곱의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애완견도 때리려하면 물려하고 성격이 사나워집니다. 하물며 인격적인 자녀야 말로 사랑으로 가꾸는 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부족하더라도 가족간의 허물을 관용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가족 구성원 서로가 인간의 연약성을 인정하고 성숙한 인격이 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도처에 유혹은 있고, 사탄의 발톱은 있습니다. 건강한 부모 밑에 건강한 자녀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 그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줍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끝날때까지 허점 투성이의 불완전성으로 이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은 가족 간의 결속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가정'을 대신할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죤 하워드 펜은 '즐거운 곳 에서는 날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하면서 가정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죽어 갔습니다. 정말로 가정은 새 둥지 보다 더 중요하고 신령한 보금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목회에도 '가정사역 '(Family Ministry)은 절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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