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우리 가정 헌장
본문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 길음동 달동네였다. 살던 집도 달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달동네에 있었다. 아버지는 온종일 이곳저곳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고물장사를 했다. 집에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깡마른 어깨에 물통을 매고 오전 내내 산동네를 오르내리셨다. 나중에야 부모님이 가난을 통해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릴 적 나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도 친구들에게 늘 창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만큼이나 가난한 아이들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엄마, 나는 아빠가 돈을 아주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 "
"아빠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아빠는 가엾은 분이시다. 너희들에게 잘 해 줄 수 없다고 아빠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데. "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엄마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어. "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엄마와 함께 작은 음식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두어야 했다. 생각보다 손님이 오지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산동네에서 더 높은 산동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새로 이사간 꼭대기 산동네에는 조그만 집들이 들꽃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이사한 후부터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나와 형을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고 환한 옷음마저 잃어 가는 듯했다. 새벽녘 엄마와 함께 우유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온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어둔 방 안에만 있었다.
공부를 방해하는 우리 형제 때문에 누나가 공부방을 만들어 달라고 조를 때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아픔을 삼켰다. 하루는 내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이들이 내 운동화보고 뭐라는 줄 알아 거지 신발이래. 거지 신발!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는 날이면 늘 엄마로부터 천 원 짜리 한 장을 받아들고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곰팡이 핀 벽을 향해 돌아앉아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이사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밤늦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산동네 조그만 집들을 송두리째 날려보내려는 듯 사나운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칼날 같은 번개가 캄캄한 하늘을 '찍' 하고 갈라놓으면, 곧이어 천둥소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가 계속 내리자 곰팡이 핀 천장에는 동그랗게 물이 고였다.
이윽고 물 고인 천장에서 빗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빗물이 방울져 내렸다.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대신 양동이를 받쳐 놓았다.
"이걸 어쩌나, 이렇게 비가 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손 좀 볼 걸 그랬어요. "
돌아누운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버지는 며칠 전, 우유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부딪쳐 팔을 다쳐 며칠째 일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한쪽 손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에게 천 원을 받아들고 천둥치는 밤거리를 나섰다.
그런데 새벽 1시가 넘도록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에선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불안해진 엄마와 누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대문 밖을 나섰다. 아버지를 찾아 동네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비바람 소리만 장례 행렬처럼 웅성거릴 뿐 아버지의 모습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엄마야!"
누나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온몸으로 사나운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깁스한 팔을 겨우 가누며 빗물이 스미는 깨어진 기와 위에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 갈까봐 한 손으로 간신히 우산을 붙들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힘겨운 듯 손잡이를 꽉 붙들고 떨고 계셨다. 그때 누나가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자 엄마는 누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만둬라... 아버지가 가엾어도 지금은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저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아버지는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에도 빗물 섞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 주는 것을 아버지는 늘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가난을 힘껏 들어올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지붕이 되려 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렇듯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도 여러 번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실 때도 그랬고, 엄마를 속상하게 하실 때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지붕이 되려했던 아버지 모습은 그날 이후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전부였다.
참 감동되는 글이다.
여기에서 아주 단순한 진리 한 마디: "아버지는 아버지다. "
이 말은 아버지에게는 이러한 원초적인 부성적 사랑이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 사랑은 이 글에 나오는 장면처럼 책임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사랑이다.
사랑을 책임으로만 이해한다면 한계가 있을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뛰어넘은 본능으로 이해되어야 참 사랑이다.
그러나, 이런 부성적인 본능의 사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음식은 원조의 맛에 가까워야 그래도 맛이 있다. 제가 살던 도시에서도 "원조 함흥냉면, 원조 종로칼국수, 원조 충무로 김밥.... "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식당이 여러 곳 있었다. 진짜 원조인지 가짜인지 알기 힘든 저 같은 사람이 가면 그냥 그게 원조 맛인 줄 알고 먹는다. 그러나 원조 맛을 아는 분이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렸을 때부터 함흥에서 자라tu서 그 냉면 맛을 계속 보아오신 분 앞에서는 자기가 함부로 원조라고 하면 큰일난다. 여러분, "바로 그 맛이야"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그 맛은 아니야" 이 둘의 차이를 아시는가 그래서 원조 맛에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원조 맛을 최대한 따르려고 노력하는 함흥냉면'라고 솔직히 간판 써 붙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가
사랑에도 원조가 있고, 부성애적 사랑에도 역시 원조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본능적인 부성애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다.
아버지의 내리사랑이 아직도 그 원조 맛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부성적인 사랑을 우리의 자식들에게 보여주려면, 우리는 원조 부성애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 원조의 사랑은 누구의 사랑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이 그 원조 사랑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원초적인 부성애를 절실하게 묘사해주는 말씀이다.
이 비유는 아주 유명한 성경 이야기 중에 하나다.
이 이야기는 흔히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a Prodigal Son)라고 불린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이 제목이 틀리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하면, 주인공이 아버지보다는 '탕자' 쪽으로 금방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비유의 주제가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탕자의 회개'쪽으로 결론난다.
그러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탕자의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시키는 것이 된다.
즉 탕자의 회개가 자신의 회복을 가져다 주는 일차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탕자의 회개는 여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회개라기보다는, 그는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아버지한테 간 것이다.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전혀 먹을 것도 없고, 정말 막막해서 아버지한테 갔다.
17절, "나는 여기서... ", 19절 "품꾼의 하나로... ".
그러나 아버지는 어쨌는가
아버지는 매일 동네 동구 밖까지 나가서 아들을 기다렸다.
몸을 움츠리고, 차마 자기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그 아들을, 아버지는 금방 알아채고 거지가 다 된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여기에서 먼저 달려간 자도 아버지요, 달려가서 안고 입을 맞춘 자도 아버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아들의 회개는 사실상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들의 회개가 회복의 동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welcome이 회복의 동기가 된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이 바뀌어야 한다: '탕자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그런 아버지의 자비는 탕아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는가 22-24절.
여기에서, 아들의 회복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개인적 회복과 공동체적 회복.
이 탕아는 이제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개인적인 회복만 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차원에서도 회복된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는 장면은 탕아를 자기 아들로 정식으로 복원시키는 절차이다. 개인적 회복.
또 종들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 것은, "이 아들은 여전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이다.
공동체적 회복.
이러니, 이 비유가 어떻게 탕자의 비유인가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라고 해야 더 옳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 아버지들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걸 가지고 자식에게 접근해야 그들에게 우리의 참된 부성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저는 여기에서 저부터 우선 도마 위에게 올려놓고 싶다. 저는 이 부성애에 있어서 너무 자책감이 많은 편이다. 저는 제 아이들한테 참 율법적인 아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쓰는 용어들을 보면 안다. 주로 "안 돼/ 빨리 빨리 해/ 너 그래가지고 되겠냐/ 너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해". 수용적인 용어들보다는 거부적인 단어들을 더 많이 쓴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러지 않나 율법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은혜가 사람을 바꾼다. 은혜로 바뀐 사람한테 율법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지, 율법으로 접근해서 사람이 먼저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저도 알게 모르게 제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는 율법으로 요리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아버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실천하고 접목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굴절되고 왜곡된 부성애를 여호와 하나님의 그것으로 복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조건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을 배우자고 하는 게 좀 무모하고 추상적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데 어떻게 배우고, 실천하는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이런 how의 문제는 이번에 하게 될 '이민정 선생 초청 가정세미나'라든지, 온누리교회에서 하는 '아버지학교' 같은 데서 다룰 문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한 가지 정도는 여러분들께 제시해드릴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들(부모들)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아닌 체험을 말한다.
이해는 정보의 제공이다.
그러나 체험은 제공된 정보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이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을 정보를 이해하는 수준으로 마치고 만다.
주일 날 설교 듣고, "아 그래 맞아" 하면서 고개 끄덕거리고 만다.
"와 성경에 이런 게 있었구나. 아 이 말은 그 뜻이구나. 오늘 나 신선한 것 하나 배웠네" 하면서 끝낸다.
그러나 정보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정보로 사람이 변한다면 이 시대는 변한 사람들 천지여야 한다. 이 시대는 인터넷 키만 하나 누르면 엄청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보의 홍수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해진다. 곧았던 사람이 그 정보 때문에 더 요상한 사람이 된다. 한번 회상해보라. 옛날 저희 부모님들이 고등학생일 때는 그게 어디 요새 고등학생하고 같은가 완전히 다 큰 어른이셨다. 학사모 쓰고 망토 두르고, 그 분들 입에서는 윤동주와 보드레르의 싯귀가 흘러나왔다. 수준 높은 낭만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생은 어떤가 완전히 얘기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아무리 못 배운 시골 할아버지 장로님들도 그 옆에 가면 영적 근엄함이 엿보였다. 그런데 요새 신앙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금빛 박힌 주석 성경에, 성경사전에, 많은 성경공부에, 이러한 영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근엄함(dignity)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정보가 아니다. 체험이요, 경건이다.
그러므로 정보가 아닌 체험을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먼저 탕자가 되어봐야 한다.
우리 자신들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요, 잃어버린 탕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무슨 탕자냐 나만큼만 착해봐라"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잘 보시라!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수동적인 것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미 수동적으로 있는 어떤 상태다.
그런데, 그런 수동적인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쪽에서 먼저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의 목자가 그를 찾아 나서고, 드라크마의 여주인이 찾아 나서고, 그리고 아들의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런데 한사코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
아까 원조 식당 이야기하지 않았나 원조 맛은 설명으로 안 된다. 그 맛을 맛본 사람만이 그 맛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 원조 맛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가짜 맛을 봐도 "이게 원조 맛인가" 한다. 그래서 설명으로 안 된다. 그 맛을 체험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맛부터 봐야 그 부성애를 가지고 우리의 자식들에게 그 원조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이 이런 측량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해야, 그 경험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가정도 달라질 것이다.
저는 오늘 아버지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들에게 금년 말까지 각 가정마다 해야 할 숙제 하나를 내드리고 싶다.
그것은 각 가정마다 헌장 하나씩을 만들자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조 사랑을 체험한 자들로서, 우리 모두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삶의 헌장들을 하나씩 작성해보자.
이건 적어도 금년 말까지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 숙제다.
단, 적당히 하지 마시고, research를 잘 하셔야 하는데, 그 research의 가장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 경험 가운데 여러분 가정의 헌장 하나를 작성해보시기 바란다.
이제 그 좋은 예를 하나 들어드리고 마치겠다.
박광철 저, "부끄런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다"에서 발췌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의 쪽지"
"아들아! 너는 이렇게 인생을 살렴. ".
대머리
대머리 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그 머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화장실
화장실에는 언제나 읽을 만한 책들을 두어라. 거기서 좋은 글을 읽으면서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유명 인사들이 많다.
분노
화를 자주 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영어로 보아도 분노(anger)와 위험(danger)과는 한 글자 차이일 뿐이다.
TV 드라마
인생을 재미있게 살려면 많이 들어주어라. 종종 TV의 드라마가 흥미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마라. 훗날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며, 그것이 곧 행복의 한 비결이다.
섬세한 사람
시골길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손을 흔들거든 너도 꼭 흔들어 주어라. 그런일에도 섬세한 사람이 남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맬 줄 안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부는 날에 연을 날려 봐라. 연은 역풍이 강할수록 높이 올라가듯이 우리의 삶도 고난의 바람 속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다.
우체부와 청소부
우체부와 청소부에게 인사하라. 그들의 수고로 우리 생활이 많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직업의 귀중함도 인정해야 한다.
걱정
걱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해라. 걱정은 마치 손바닥으로 온 하늘을 어둡게 가리는 것 같은 힘이 있다.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 봐라. 서둘러서 닫는다고 해도 약 2-3초 간격인데,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엄마, 나는 아빠가 돈을 아주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 "
"아빠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아빠는 가엾은 분이시다. 너희들에게 잘 해 줄 수 없다고 아빠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데. "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엄마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어. "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엄마와 함께 작은 음식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두어야 했다. 생각보다 손님이 오지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산동네에서 더 높은 산동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새로 이사간 꼭대기 산동네에는 조그만 집들이 들꽃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이사한 후부터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나와 형을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았고 환한 옷음마저 잃어 가는 듯했다. 새벽녘 엄마와 함께 우유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아버지는 온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어둔 방 안에만 있었다.
공부를 방해하는 우리 형제 때문에 누나가 공부방을 만들어 달라고 조를 때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아픔을 삼켰다. 하루는 내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아이들이 내 운동화보고 뭐라는 줄 알아 거지 신발이래. 거지 신발!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는 날이면 늘 엄마로부터 천 원 짜리 한 장을 받아들고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곰팡이 핀 벽을 향해 돌아앉아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이사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밤늦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산동네 조그만 집들을 송두리째 날려보내려는 듯 사나운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칼날 같은 번개가 캄캄한 하늘을 '찍' 하고 갈라놓으면, 곧이어 천둥소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가 계속 내리자 곰팡이 핀 천장에는 동그랗게 물이 고였다.
이윽고 물 고인 천장에서 빗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빗물이 방울져 내렸다.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대신 양동이를 받쳐 놓았다.
"이걸 어쩌나, 이렇게 비가 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손 좀 볼 걸 그랬어요. "
돌아누운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버지는 며칠 전, 우유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부딪쳐 팔을 다쳐 며칠째 일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한쪽 손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에게 천 원을 받아들고 천둥치는 밤거리를 나섰다.
그런데 새벽 1시가 넘도록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에선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불안해진 엄마와 누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대문 밖을 나섰다. 아버지를 찾아 동네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비바람 소리만 장례 행렬처럼 웅성거릴 뿐 아버지의 모습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엄마야!"
누나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물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온몸으로 사나운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깁스한 팔을 겨우 가누며 빗물이 스미는 깨어진 기와 위에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 갈까봐 한 손으로 간신히 우산을 붙들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힘겨운 듯 손잡이를 꽉 붙들고 떨고 계셨다. 그때 누나가 아버지를 부르려고 하자 엄마는 누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만둬라... 아버지가 가엾어도 지금은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저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아버지는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에도 빗물 섞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 주는 것을 아버지는 늘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가난을 힘껏 들어올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지붕이 되려 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렇듯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도 여러 번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실 때도 그랬고, 엄마를 속상하게 하실 때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지붕이 되려했던 아버지 모습은 그날 이후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전부였다.
참 감동되는 글이다.
여기에서 아주 단순한 진리 한 마디: "아버지는 아버지다. "
이 말은 아버지에게는 이러한 원초적인 부성적 사랑이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 사랑은 이 글에 나오는 장면처럼 책임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사랑이다.
사랑을 책임으로만 이해한다면 한계가 있을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뛰어넘은 본능으로 이해되어야 참 사랑이다.
그러나, 이런 부성적인 본능의 사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음식은 원조의 맛에 가까워야 그래도 맛이 있다. 제가 살던 도시에서도 "원조 함흥냉면, 원조 종로칼국수, 원조 충무로 김밥.... "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식당이 여러 곳 있었다. 진짜 원조인지 가짜인지 알기 힘든 저 같은 사람이 가면 그냥 그게 원조 맛인 줄 알고 먹는다. 그러나 원조 맛을 아는 분이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렸을 때부터 함흥에서 자라tu서 그 냉면 맛을 계속 보아오신 분 앞에서는 자기가 함부로 원조라고 하면 큰일난다. 여러분, "바로 그 맛이야"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그 맛은 아니야" 이 둘의 차이를 아시는가 그래서 원조 맛에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원조 맛을 최대한 따르려고 노력하는 함흥냉면'라고 솔직히 간판 써 붙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가
사랑에도 원조가 있고, 부성애적 사랑에도 역시 원조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본능적인 부성애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많이 왜곡되어 있다.
아버지의 내리사랑이 아직도 그 원조 맛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부성적인 사랑을 우리의 자식들에게 보여주려면, 우리는 원조 부성애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 원조의 사랑은 누구의 사랑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이 그 원조 사랑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원초적인 부성애를 절실하게 묘사해주는 말씀이다.
이 비유는 아주 유명한 성경 이야기 중에 하나다.
이 이야기는 흔히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a Prodigal Son)라고 불린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이 제목이 틀리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하면, 주인공이 아버지보다는 '탕자' 쪽으로 금방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비유의 주제가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탕자의 회개'쪽으로 결론난다.
그러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탕자의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시키는 것이 된다.
즉 탕자의 회개가 자신의 회복을 가져다 주는 일차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탕자의 회개는 여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회개라기보다는, 그는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아버지한테 간 것이다.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전혀 먹을 것도 없고, 정말 막막해서 아버지한테 갔다.
17절, "나는 여기서... ", 19절 "품꾼의 하나로... ".
그러나 아버지는 어쨌는가
아버지는 매일 동네 동구 밖까지 나가서 아들을 기다렸다.
몸을 움츠리고, 차마 자기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그 아들을, 아버지는 금방 알아채고 거지가 다 된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여기에서 먼저 달려간 자도 아버지요, 달려가서 안고 입을 맞춘 자도 아버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아들의 회개는 사실상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들의 회개가 회복의 동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welcome이 회복의 동기가 된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이 바뀌어야 한다: '탕자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그런 아버지의 자비는 탕아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는가 22-24절.
여기에서, 아들의 회복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개인적 회복과 공동체적 회복.
이 탕아는 이제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개인적인 회복만 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차원에서도 회복된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는 장면은 탕아를 자기 아들로 정식으로 복원시키는 절차이다. 개인적 회복.
또 종들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 것은, "이 아들은 여전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이다.
공동체적 회복.
이러니, 이 비유가 어떻게 탕자의 비유인가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비유라고 해야 더 옳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 아버지들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걸 가지고 자식에게 접근해야 그들에게 우리의 참된 부성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저는 여기에서 저부터 우선 도마 위에게 올려놓고 싶다. 저는 이 부성애에 있어서 너무 자책감이 많은 편이다. 저는 제 아이들한테 참 율법적인 아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쓰는 용어들을 보면 안다. 주로 "안 돼/ 빨리 빨리 해/ 너 그래가지고 되겠냐/ 너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해". 수용적인 용어들보다는 거부적인 단어들을 더 많이 쓴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러지 않나 율법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은혜가 사람을 바꾼다. 은혜로 바뀐 사람한테 율법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지, 율법으로 접근해서 사람이 먼저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저도 알게 모르게 제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는 율법으로 요리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아버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실천하고 접목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굴절되고 왜곡된 부성애를 여호와 하나님의 그것으로 복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조건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을 배우자고 하는 게 좀 무모하고 추상적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데 어떻게 배우고, 실천하는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이런 how의 문제는 이번에 하게 될 '이민정 선생 초청 가정세미나'라든지, 온누리교회에서 하는 '아버지학교' 같은 데서 다룰 문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한 가지 정도는 여러분들께 제시해드릴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들(부모들)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아닌 체험을 말한다.
이해는 정보의 제공이다.
그러나 체험은 제공된 정보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이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을 정보를 이해하는 수준으로 마치고 만다.
주일 날 설교 듣고, "아 그래 맞아" 하면서 고개 끄덕거리고 만다.
"와 성경에 이런 게 있었구나. 아 이 말은 그 뜻이구나. 오늘 나 신선한 것 하나 배웠네" 하면서 끝낸다.
그러나 정보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정보로 사람이 변한다면 이 시대는 변한 사람들 천지여야 한다. 이 시대는 인터넷 키만 하나 누르면 엄청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보의 홍수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해진다. 곧았던 사람이 그 정보 때문에 더 요상한 사람이 된다. 한번 회상해보라. 옛날 저희 부모님들이 고등학생일 때는 그게 어디 요새 고등학생하고 같은가 완전히 다 큰 어른이셨다. 학사모 쓰고 망토 두르고, 그 분들 입에서는 윤동주와 보드레르의 싯귀가 흘러나왔다. 수준 높은 낭만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생은 어떤가 완전히 얘기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아무리 못 배운 시골 할아버지 장로님들도 그 옆에 가면 영적 근엄함이 엿보였다. 그런데 요새 신앙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금빛 박힌 주석 성경에, 성경사전에, 많은 성경공부에, 이러한 영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근엄함(dignity)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정보가 아니다. 체험이요, 경건이다.
그러므로 정보가 아닌 체험을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먼저 탕자가 되어봐야 한다.
우리 자신들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요, 잃어버린 탕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무슨 탕자냐 나만큼만 착해봐라"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잘 보시라!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수동적인 것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미 수동적으로 있는 어떤 상태다.
그런데, 그런 수동적인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쪽에서 먼저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의 목자가 그를 찾아 나서고, 드라크마의 여주인이 찾아 나서고, 그리고 아들의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껴안고 입을 맞춘다.
그런데 한사코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
아까 원조 식당 이야기하지 않았나 원조 맛은 설명으로 안 된다. 그 맛을 맛본 사람만이 그 맛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 원조 맛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가짜 맛을 봐도 "이게 원조 맛인가" 한다. 그래서 설명으로 안 된다. 그 맛을 체험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여호와 하나님의 부성애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맛부터 봐야 그 부성애를 가지고 우리의 자식들에게 그 원조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이 이런 측량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해야, 그 경험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가정도 달라질 것이다.
저는 오늘 아버지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들에게 금년 말까지 각 가정마다 해야 할 숙제 하나를 내드리고 싶다.
그것은 각 가정마다 헌장 하나씩을 만들자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조 사랑을 체험한 자들로서, 우리 모두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삶의 헌장들을 하나씩 작성해보자.
이건 적어도 금년 말까지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 숙제다.
단, 적당히 하지 마시고, research를 잘 하셔야 하는데, 그 research의 가장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 경험 가운데 여러분 가정의 헌장 하나를 작성해보시기 바란다.
이제 그 좋은 예를 하나 들어드리고 마치겠다.
박광철 저, "부끄런 A학점보다 정직한 B학점이 낫다"에서 발췌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의 쪽지"
"아들아! 너는 이렇게 인생을 살렴. ".
대머리
대머리 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그 머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화장실
화장실에는 언제나 읽을 만한 책들을 두어라. 거기서 좋은 글을 읽으면서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유명 인사들이 많다.
분노
화를 자주 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영어로 보아도 분노(anger)와 위험(danger)과는 한 글자 차이일 뿐이다.
TV 드라마
인생을 재미있게 살려면 많이 들어주어라. 종종 TV의 드라마가 흥미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마라. 훗날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며, 그것이 곧 행복의 한 비결이다.
섬세한 사람
시골길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손을 흔들거든 너도 꼭 흔들어 주어라. 그런일에도 섬세한 사람이 남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맬 줄 안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부는 날에 연을 날려 봐라. 연은 역풍이 강할수록 높이 올라가듯이 우리의 삶도 고난의 바람 속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다.
우체부와 청소부
우체부와 청소부에게 인사하라. 그들의 수고로 우리 생활이 많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직업의 귀중함도 인정해야 한다.
걱정
걱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해라. 걱정은 마치 손바닥으로 온 하늘을 어둡게 가리는 것 같은 힘이 있다.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 봐라. 서둘러서 닫는다고 해도 약 2-3초 간격인데,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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