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한 가정을 살린 여인
본문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가정 자체가 살아나느냐 아니면 가정 자체가 쓰러지느냐 가 과연 누구의 손에 달렸는가 를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지키시고 축복하셔야만 그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는 줄로 믿고 확신을 합니다. 그런데제가 본문을 통해서 얻은 결론은 한 가정을 살리는데는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손을 통하여 지켜 가실까 하는 부분에서는 남편의 역할도 중요하고 자녀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내, 즉 어머니의 역할을 통하여 그 가정을 지켜가고 세워간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데 남편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자녀들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는 제가 얻은 결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일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가 어머니가 실을 타래로 사와서 실패에다가 이것을 감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실이 옛날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어릴 때 만해도 참 실을 많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양말도 꿰매어 신어야 하죠 바지가 떨어지는데 왜 그렇게 무릎이 많이 떨어졌던지 그 무릎도 기워야하죠 내복도 꿰매어 입어야 계속 바느질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우 말랭도 실에 꿰어서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 실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실을 자주 시장에서 사오신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실을 많이 감으셨습니다. 팔을 이 만큼 벌리고 양손에 실을 끼우고 감기 시작하면 보통 10-15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을 감다가 보면 이 실이 서로 엉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실을 팔에 감고 있고 저희 어머니는 그 실을 일일이 풀어 가시느라고 실패를 이렇게 하기도하고 저렇게도 하기도하고 그래서 실을 풀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팔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는 그 엉킨 것을 확 잘라버리고 새 것으로 연결하여서 쓰면 될텐데 왜 그렇게 일일이 그것을 푸느냐고 짜증도 참 많이 내었습니다.
지금에야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머니인들 그것을 그렇게 풀고 싶었을까 어머니도 마음 같아서는 엉킨 실을 잘라 버리고 새것으로 연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은 것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돈도 아끼고 물건도 아끼고 그리고 침착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언의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연세가 많이 드신 어른들을 비롯하여 우리 부모님세대를 살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끼고 절약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이 모든 부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친히 감당하십니다. 이것이 작은 문제인 것 같아도 결국 이것이 한 가정을 살리는 것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있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을 살리느냐 아니면 쓰러지게 하느냐 는 어머니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분노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남편을 살렸고 다윗의 공격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던 가정을 살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실로 많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정말 믿음 안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 그런 가정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 남편에 그 아내로 그렇게 살아간 부부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시면 북 왕국의 임금인 아합과 이세벨이라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살아간 부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저런 부부가 또 있을까 할만큼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간 부부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가 있는데 이들은 정말 헌신적인 부부였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는 이들은 삶의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직업이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초막절이라는 유대인 절기에 사용하는 장막을 고쳐주고 돈을 받는 것인데 그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그런 부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지 바울 사도가 이들의 섬김에 감격을 해서 저들은 나의 사역. 즉,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만큼 헌신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였던 것을 롬16장에서 봅니다.
모르긴 해도 저들의 믿음이 저들을 영혼을 살렸고, 저들의 가정을 살렸고 또 저들이 만나는 무수한 사람의 영혼을 살렸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이 그의 남편인 나발이 살렸고 그의 가정을 살렸고 또 그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것입니다. 바로 그 다윗의 분노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다윗이 분노를 하였고, 또 그가 어떻게 하였기에 분노에서 그 가정을 그가 살렸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의 남편은 나발입니다. 나발이라는 말은 평평하다 또는 멋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주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가르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서는 꽤 부자였습니다. 양이 3000마리요,염소가 1000마리나 가진 유다지파의 사람입니다. 이는 갈렙의 후손으로서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지위와 재물을 가진 사람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서 에서 보는 갈렙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그의 85세가 되었을 때에 그가 여호수아에게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하였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믿음과 성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소망을 가졌던 그의 조상 갈렙의 믿음을 이 나발은 전혀 이어받지 못한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신앙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은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이름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자 또는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들어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름을 가지고 우리가 한번 이 아비가일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본다면 이 아비가일이 어떤 사람 같습니까 여러분 느낌에...... 참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총명한 여인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 아비가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이름처럼 지혜롭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고,거만하고,판단력이 떨어지고,그리고 덕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지방에서는 이곳 저곳에서 남의 양이나 낙타를 훔치고 또는 물건을 빼앗을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일종의 도둑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무장한 군인들이 지켜주지 않으면 자신의 재산을 보호 할 수가 없는 그런 일도 있어나 봅니다. 오늘 다윗이 부하들을 이 나발에게 보내어 내가 너를 지켜서 너의 재물을 보호해 주었으니 오늘 네가 추수를 하고 양의 털을 깎는 날이라고 하니 이 좋은 날에 나와 나의 부하들이 먹을 음식을 좀 나누어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하였는데 이 나발이 단번에 거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절만 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 앞에서 다윗을 아주 나뿐 사람으로 말을 합니다.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내가 들으니 주인에게서 억지로 떤 종들이 많다고 하는데 내 고기와 떡을 어찌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다윗을 아주 경멸하고 무시하고 사울을 품을 떠난 배신자로 말합니다. 이 말에 분노한 다윗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이 나발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멸망시켜 버리려고 가는 길에 아비가일이라는 이 나발의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 부인 즉 아비가일이 분노한 다윗의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남편도 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존경받던 다윗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제가 작년에 여전도회 헌신예배 때에 한번 설교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왜 또 여전도회의 달에 이 본문을 또 선택하였는가 그것은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정말 지혜롭고 처신이 분명하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다시 한번 우리 시드니 영락교회 모든 여인들이 아비가일 처럼 믿음 안에서 지혜롭고 총명해서 가정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고, 이웃의 많은 영혼들을 살려내는 정말 생명력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해서 이 본문을 다시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아비가일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남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릴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아비가일은 자기 관리를 잘해 온 여인이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였기에 다윗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이 나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누군가가 아비가일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가일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이 위기 상황을 대처하였는가 말입니다. 그가 급히 떡 200덩이와 포도주 2 가죽부대, 양 다섯 마리를 잡고,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 200개를 준비해서 급히 다윗을 찾아갑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아비가일이 이렇게 많은 것을 갑자기 준비할 수가 있었을까요 아니 어떻게해서 아비가일이 이런 것을 준비해서 다윗을 만나려고 갈 수가있었겠습니까 그것도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에게는 고하지 아니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계발하고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꾸준히 준비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준비되어 있지 않은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피난을 어디로 가야하나 금은패물은 어디에 보관해야 하나 먹을 것은 무엇을 준비하나 이런 것으로 오히려 마음이 부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위기가 닥치니 오히려 더 의젓합니다. 오히려 침착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오히려 더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평소에 자기계발 즉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고 준비하였기에 이런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믿음을 잘 관리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만 하면 자기 계발 즉 자신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바쁜데 언제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있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다가 보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관리를 해야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끈임 없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깊은 기도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성장과 영적인 생활을 위하여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통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의 믿음이 여자들의 믿음을 떠라가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남자가 여자보다 짧다고 합니다. 다른 영혼을 생각하여 전도하는 것에도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헌금하는 것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헤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이것은 여자들은 그나마 스스로 믿음을 관리하기 위하여, 믿음을 지켜가지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고 정성을 투자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발이라는 사람은 유다지파 갈렙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지파입니다. 맏아들이 아니면서도 맏아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받아서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지파인데 어떻게 해서 나발처럼 자신의 것에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가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로 알고 있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계발 헤야 하고 말씀 안에서 그 은혜를 잘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비가일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그는 담대하였습니다. 그가 만난 다윗은 이스라엘의 장군이요 전쟁 영웅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사람입니다. 대단한 신분인 다윗에 비교할 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한갓 시골에서 부자라고 자랑하는 한 어리석은 남편의 아내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남편의 잘못으로 자신의 집을 쳐부수기 위해서 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용서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다윗의 발을 붙잡고 사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아비가일은 오히려 다윗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이 이 죄를 여종에게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내 주는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소서 그의 이름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의 나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를 내버려두소서 친히 주의 손에 피를 묻힐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보니 주의 생전에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지금 그 일을 하려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실 분이 이런 하찮은 일에 분노하여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제가 준비한 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음을 돌이키소서 이런 이야기로 다윗의 분노한 마음을 돌이키게 합니다.
정말 대단한 여인입니다. 정말 담대한 여인입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믿음이 그 가정을 살렸고 그와 함께 한 무수한 사람을 살렸던 것입니다. 아비가일 정말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입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에 모든 것을 죽이려고 달려오는 다윗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인. 그는 정말 대단한 여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아비가일이 이런 대단한 여인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믿음 안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여인은 가정을 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하죠. 그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방탕한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 아들을 믿고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 모니카였습니다. 어거스틴이 끝없는 타락과 방황의 길을 헤맬 떼에도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격려하고 기다렸습니다. 자그마치 30년을 말입니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이 아들을 살렸고 그 가정을 살렸습니다. 결국 그 아들 어거스틴은 중세 기독교를 살렸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이 아비가일이 그가 나발을 살렸지만 결국은 다윗을 살려 준 것입니다. 다윗이 순간적인 분노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일 뻔한 그 순간에 아비가일이 가진 믿음의 권고로 인하여 결국은 다윗을 살리고 다윗의 명예를 지켜 주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비가일 처럼 가정도 구하고 교회밖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구 할 수 있는 믿음의 있는 여인이 필요합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시드니 영락교회의 모든 여인들도 충분히 이런 아비가일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정을 믿음 안에서 살리느냐 아니면 살리지 못하느냐 는 바로 여러분들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섬김에 달렸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모두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살리고도 남음이 있음을 말입니다.
6월 여전도회의 달을 지나며 믿음이 좋은 여인들이 우리 교회에 있어지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는 좋은 교회 좋은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가정을 살리는데 남편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자녀들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는 제가 얻은 결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일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가 어머니가 실을 타래로 사와서 실패에다가 이것을 감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실이 옛날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어릴 때 만해도 참 실을 많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양말도 꿰매어 신어야 하죠 바지가 떨어지는데 왜 그렇게 무릎이 많이 떨어졌던지 그 무릎도 기워야하죠 내복도 꿰매어 입어야 계속 바느질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우 말랭도 실에 꿰어서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 실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실을 자주 시장에서 사오신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실을 많이 감으셨습니다. 팔을 이 만큼 벌리고 양손에 실을 끼우고 감기 시작하면 보통 10-15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을 감다가 보면 이 실이 서로 엉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실을 팔에 감고 있고 저희 어머니는 그 실을 일일이 풀어 가시느라고 실패를 이렇게 하기도하고 저렇게도 하기도하고 그래서 실을 풀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팔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는 그 엉킨 것을 확 잘라버리고 새 것으로 연결하여서 쓰면 될텐데 왜 그렇게 일일이 그것을 푸느냐고 짜증도 참 많이 내었습니다.
지금에야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머니인들 그것을 그렇게 풀고 싶었을까 어머니도 마음 같아서는 엉킨 실을 잘라 버리고 새것으로 연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은 것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돈도 아끼고 물건도 아끼고 그리고 침착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언의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연세가 많이 드신 어른들을 비롯하여 우리 부모님세대를 살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끼고 절약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이 모든 부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친히 감당하십니다. 이것이 작은 문제인 것 같아도 결국 이것이 한 가정을 살리는 것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있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을 살리느냐 아니면 쓰러지게 하느냐 는 어머니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분노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남편을 살렸고 다윗의 공격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던 가정을 살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실로 많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정말 믿음 안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 그런 가정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 남편에 그 아내로 그렇게 살아간 부부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시면 북 왕국의 임금인 아합과 이세벨이라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살아간 부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저런 부부가 또 있을까 할만큼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간 부부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가 있는데 이들은 정말 헌신적인 부부였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는 이들은 삶의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직업이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초막절이라는 유대인 절기에 사용하는 장막을 고쳐주고 돈을 받는 것인데 그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그런 부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지 바울 사도가 이들의 섬김에 감격을 해서 저들은 나의 사역. 즉,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만큼 헌신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였던 것을 롬16장에서 봅니다.
모르긴 해도 저들의 믿음이 저들을 영혼을 살렸고, 저들의 가정을 살렸고 또 저들이 만나는 무수한 사람의 영혼을 살렸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이 그의 남편인 나발이 살렸고 그의 가정을 살렸고 또 그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것입니다. 바로 그 다윗의 분노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다윗이 분노를 하였고, 또 그가 어떻게 하였기에 분노에서 그 가정을 그가 살렸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의 남편은 나발입니다. 나발이라는 말은 평평하다 또는 멋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주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가르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서는 꽤 부자였습니다. 양이 3000마리요,염소가 1000마리나 가진 유다지파의 사람입니다. 이는 갈렙의 후손으로서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지위와 재물을 가진 사람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서 에서 보는 갈렙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그의 85세가 되었을 때에 그가 여호수아에게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하였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믿음과 성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소망을 가졌던 그의 조상 갈렙의 믿음을 이 나발은 전혀 이어받지 못한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신앙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내로 맞이한 여인은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이름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자 또는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들어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름을 가지고 우리가 한번 이 아비가일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본다면 이 아비가일이 어떤 사람 같습니까 여러분 느낌에...... 참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총명한 여인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 아비가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이름처럼 지혜롭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고,거만하고,판단력이 떨어지고,그리고 덕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지방에서는 이곳 저곳에서 남의 양이나 낙타를 훔치고 또는 물건을 빼앗을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일종의 도둑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무장한 군인들이 지켜주지 않으면 자신의 재산을 보호 할 수가 없는 그런 일도 있어나 봅니다. 오늘 다윗이 부하들을 이 나발에게 보내어 내가 너를 지켜서 너의 재물을 보호해 주었으니 오늘 네가 추수를 하고 양의 털을 깎는 날이라고 하니 이 좋은 날에 나와 나의 부하들이 먹을 음식을 좀 나누어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하였는데 이 나발이 단번에 거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절만 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 앞에서 다윗을 아주 나뿐 사람으로 말을 합니다.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내가 들으니 주인에게서 억지로 떤 종들이 많다고 하는데 내 고기와 떡을 어찌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다윗을 아주 경멸하고 무시하고 사울을 품을 떠난 배신자로 말합니다. 이 말에 분노한 다윗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이 나발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멸망시켜 버리려고 가는 길에 아비가일이라는 이 나발의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 부인 즉 아비가일이 분노한 다윗의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남편도 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존경받던 다윗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제가 작년에 여전도회 헌신예배 때에 한번 설교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왜 또 여전도회의 달에 이 본문을 또 선택하였는가 그것은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정말 지혜롭고 처신이 분명하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다시 한번 우리 시드니 영락교회 모든 여인들이 아비가일 처럼 믿음 안에서 지혜롭고 총명해서 가정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고, 이웃의 많은 영혼들을 살려내는 정말 생명력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해서 이 본문을 다시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아비가일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남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릴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아비가일은 자기 관리를 잘해 온 여인이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였기에 다윗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이 나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누군가가 아비가일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가일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이 위기 상황을 대처하였는가 말입니다. 그가 급히 떡 200덩이와 포도주 2 가죽부대, 양 다섯 마리를 잡고,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 200개를 준비해서 급히 다윗을 찾아갑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아비가일이 이렇게 많은 것을 갑자기 준비할 수가 있었을까요 아니 어떻게해서 아비가일이 이런 것을 준비해서 다윗을 만나려고 갈 수가있었겠습니까 그것도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에게는 고하지 아니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계발하고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꾸준히 준비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준비되어 있지 않은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피난을 어디로 가야하나 금은패물은 어디에 보관해야 하나 먹을 것은 무엇을 준비하나 이런 것으로 오히려 마음이 부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위기가 닥치니 오히려 더 의젓합니다. 오히려 침착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오히려 더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평소에 자기계발 즉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고 준비하였기에 이런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믿음을 잘 관리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만 하면 자기 계발 즉 자신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바쁜데 언제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있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다가 보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관리를 해야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끈임 없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깊은 기도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성장과 영적인 생활을 위하여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통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의 믿음이 여자들의 믿음을 떠라가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남자가 여자보다 짧다고 합니다. 다른 영혼을 생각하여 전도하는 것에도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헌금하는 것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헤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이것은 여자들은 그나마 스스로 믿음을 관리하기 위하여, 믿음을 지켜가지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고 정성을 투자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발이라는 사람은 유다지파 갈렙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지파입니다. 맏아들이 아니면서도 맏아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받아서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지파인데 어떻게 해서 나발처럼 자신의 것에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가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로 알고 있는 착각 속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계발 헤야 하고 말씀 안에서 그 은혜를 잘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비가일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그는 담대하였습니다. 그가 만난 다윗은 이스라엘의 장군이요 전쟁 영웅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사람입니다. 대단한 신분인 다윗에 비교할 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한갓 시골에서 부자라고 자랑하는 한 어리석은 남편의 아내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남편의 잘못으로 자신의 집을 쳐부수기 위해서 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용서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다윗의 발을 붙잡고 사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아비가일은 오히려 다윗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이 이 죄를 여종에게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내 주는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소서 그의 이름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의 나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를 내버려두소서 친히 주의 손에 피를 묻힐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보니 주의 생전에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지금 그 일을 하려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실 분이 이런 하찮은 일에 분노하여 사람을 죽이려 합니까 제가 준비한 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음을 돌이키소서 이런 이야기로 다윗의 분노한 마음을 돌이키게 합니다.
정말 대단한 여인입니다. 정말 담대한 여인입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믿음이 그 가정을 살렸고 그와 함께 한 무수한 사람을 살렸던 것입니다. 아비가일 정말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입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에 모든 것을 죽이려고 달려오는 다윗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인. 그는 정말 대단한 여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아비가일이 이런 대단한 여인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믿음 안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여인은 가정을 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하죠. 그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방탕한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 아들을 믿고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 모니카였습니다. 어거스틴이 끝없는 타락과 방황의 길을 헤맬 떼에도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격려하고 기다렸습니다. 자그마치 30년을 말입니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믿음이 아들을 살렸고 그 가정을 살렸습니다. 결국 그 아들 어거스틴은 중세 기독교를 살렸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이 아비가일이 그가 나발을 살렸지만 결국은 다윗을 살려 준 것입니다. 다윗이 순간적인 분노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일 뻔한 그 순간에 아비가일이 가진 믿음의 권고로 인하여 결국은 다윗을 살리고 다윗의 명예를 지켜 주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비가일 처럼 가정도 구하고 교회밖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구 할 수 있는 믿음의 있는 여인이 필요합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시드니 영락교회의 모든 여인들도 충분히 이런 아비가일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정을 믿음 안에서 살리느냐 아니면 살리지 못하느냐 는 바로 여러분들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섬김에 달렸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모두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살리고도 남음이 있음을 말입니다.
6월 여전도회의 달을 지나며 믿음이 좋은 여인들이 우리 교회에 있어지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는 좋은 교회 좋은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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