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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주 안에서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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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21일은 비공식적이긴 해도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어제 15일은 UN이 정한 가정의 날이면서 스승의 날이기도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와 학교 선생님들 기립… 축하 박수
1852년 4월 10일 알제리아에서 미국인 한 사람이 사망.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 미국정부는 군함을 보내 그 사람의 유해를 미국으로 가져오도록 한다. 그 사람의 유해가 미국에 도착 하는 그 날 뉴욕 시가 생긴 이래 최고의 인파가 부두로 몰려든다. 군악대의 연주와 예포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대통령 국무위원 그리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사람의 유해가 뉴욕으로 입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이 사람이 무슨 위대한 정치가나 위대한 작가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대한 전쟁 영웅도 아니었고 놀라운 업적을 남긴 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아주 평범한 한 시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이토록 전 미국인의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그가 작사했던 단 한곡의 노래 때문이었다. 그 노래 가사가 미국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무엇이,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 앞에 숙연해지도록 한 것이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피고 새 우는 내 집 뿐 이리..... 홈 험 스위트 홈의 작사자인 잔. H 패인의 유해가 뉴욕으로 돌아 오는 날이었던 것이다.
결혼에 두 번씩 실패한 한 미국 여성. 두 번째 남편은 신체적인 학대. 몸과 마음이 함께 멍듦. 결국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세 번째 결혼. 그러나 세 번째 남편마저도 심한 언어적 폭력을 행사. 그 여인의 모든 소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3번째 이혼. 그 당시 그녀에게는 13살 된 아들 있었는데 늘 그 아들에게 상기시킨 말.
1.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2.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엄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금함. 그 아들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점 더 폐쇄적이고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변해 간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패싸움을 하다 쫓겨나서 해병대에 입대. 적응을 못하고 결국 불 명예 제대. 유럽으로 가서 이상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귀국.
그러나 돈을 벌어오지 못한 남편을 향해 늘 아내가 구박하다가 남편을 쫓아냄.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 온 남편이 아내에게 78달러를 주면서 당신이 사고 싶은 것 사라고 말하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사랑으로 호소함. 그러나 그 아내는 들은 척도 안하고 78달러를 던져 버린다. 그 남자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가 숨겨 두었던 소총을 꺼내들고 자기가 일한 적이 있는 서적 창고 꼭대기에서 정오가 되기만을 숨 숙이고 기다림. 그 시간에 유명한 사람이 그 앞길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그 날이 바로 1963년 11월 20일 정오를 넘긴 시간! 그 남자의 총에서 불을 뿜었고 총에 맞은 사람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었습니다. 총을 쏜 남자는 오스 와일드라는 청년.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에는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만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정신 의학자는 말하기를 “가정의 비극!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초래했다!”사랑받지 못한 한 여인,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 저지른 비극!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홈... 홈 스위트 홈이십니까 (한 사회가 건강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한 가정의 건강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오늘 가정의 달 5월의 한 가운데 서있습니다. 믿음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가정이 왜 중요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획과 의도에 의해서 세우신 기관은 교회와 가정, 둘 밖에 없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서로 도와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 한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그리고 그 주님의 주권이 실현되어야 하는 곳으로 제일 먼저 가정을 말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신앙이 실천되어야 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하시는 것 반 만해도 아니 반에 반 만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워 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이 가정이 주인이어야 하고 가정이 믿음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다함께!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가정!”
본문이 쓰여진 그 시대 그리스나 로마 문화에 의하면 여자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기보다는 주고받는 물건으로 취급받고 노예처럼 팔리기도 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른 바 남존여비!가 그것입니다. 남존여비! 한자로 무슨 뜻인지 다 아시지요 어려운 한자보다 더 쉽게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남자가 존재하는 한 여자는 비참하다”이런 사상이 지배하는 그 시대에 바울이 본문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쇼킹한 일입니다.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비들아 아이들을 격노케 말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원리는 우열이 아니라 동등한 권면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나와 있는 3가지의 관계를 관통하고 있는 법칙은 에베소서 5장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너희는 피차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서로 복종하는 문제는 부흥회 때나 월례회로 모일 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신자가 갖는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이 불신자들보다 더 크고 중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의 회복!입니다. 왜냐하면 총체적인 문제의 지표가 가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지고 반대로 사회구성의 기본이 되는 가정이 건강하고 건전해야 교회가 건강하고 사회가 건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
1. 부부관계
-아내의 복종
바울이 본문에서 아내와 남편에게 주는 책임은 표현만 다르지 동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이라는 말을 복종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내가 해야 할 책임을 먼저 들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주님이 레이디 퍼스트!라는 원칙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다. 아내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생의 새 주인 고백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이 주인이고 나는 그 주인의 말을 복종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마다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질서를 따라 지으시고 남편에게 주시는 명령과 아내에게 주시는 말씀이 먼저 나오고 뒤에 나오는 것은 부부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아내로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사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요, 남자로 아내의 순종을 받고 산다는 것이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질서와 행복은 가정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이요 바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최상의 것을 주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먼저 아내에게 주시는 것이 복종을 말씀하십니다. 복종이란 원래 차례로 정렬시킨다는 말에서 유래 된 것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복종을 하도록 하신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질서의 차원에서 먼저 해야 하는 사람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동등하지만 그 안에서 얼마든지 복종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 누가 높나) 성경은 가정에서 창조의 질서를 성취하고 부부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들이 먼저 남편에게 복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내된 분들은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아내의 복종이 있을 때 남편의 리더쉽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멘 누가 더 아멘을 크게 해야 할까요 아내가 남편보다 더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을지라도, 더 높은 학력과 더 좋은 집안의 배경을 가졌더라도 아내와 남편으로 맺어지면 남편을 머리(지도력)로 세워질 때 그 가정은 질서가 서고 화목과 행복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지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있으면서 이 질서가 없기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에 유행한 말 가운데 “공주병”이라는 게 있었다. 이 병의 해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상만 하면서 주둥이만 놀리는 병! 그러나 저는 아내 된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공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공주가 되길 원하십니까 왕비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간단합니다. 남편을 왕자로, 왕비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쬬다의 아내) 여자분들은 아멘을 별로 안 하시네요 남편에게 기쁨으로, 자발적인 복종으로 남편의 권위를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렇다고 남편들이 좋아만 할 일이 아닙니다. 남편들의 책임이 금방 뒤 따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 남편의 책임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단어는 에로스나 우정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라는 말입니다. 남편 된 성도들이여! 이것 저것 조건 따지지 말고 아내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들의 아멘 더 나가서 성경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괴롭게 하지 말라! 저도 남편입니다만 남편에게는 아내를 괴롭힐 수 있는 타고 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노인부부들이 등장해서 할아버지가 종이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맞추는 그런 T. V 프로가 나왔다고 합니다. “부부사이”라는 단어를 할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할아버지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다급해진 할아버지가 멋지게 설명합니다. “할멈과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할머니가 망설임 없이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웬수!”할아버지가 더 다급해서 말합니다. 두자가 아니라 4자로 뭐라고 하지 할머니의 대답이 자신감으로 넘쳐 납니다. “평생웬수!” 혹시 저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아내를 괴롭게 하신 남편이 계신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괴롭게 하는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희랍어(피크로스)의 뜻은 “독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내를 깨지기 쉬운 더 연약한 질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남편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아내들은 평생 눈물로, 아픔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아내의 복종으로 남편이 권위가 세워지는 것처럼 남편의 사랑으로 아내가 아내 된 자리를 확보하고 사랑받는 아내로 세워질 때 가정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정이 잘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남편되신 성도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를 학대하거나 군림하는 남편이 아니라 아내를 세워주고 아내를 칭찬하고 사랑해서 건강한 가정의 참된 가장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편의 눈물 상처는 회복이 안 되지만 심령은 치유된다)
큰 두 번째로 ....
2. 부모와 자녀의 관계(20절)
-. 자녀의 순종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훨씬 강도가 더 강한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힘의 강약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권위를 주님이 주신 권위로 인정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집안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부모 된 자는 마땅히 자기의 욕심에 따라 자녀들을 키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과연 어디에서 배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이 주님의 권위를 배우고 실천하는 가장 좋은 현장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버지가 지도력을 발휘하고 권위를 세우고 있는 가정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유만 주었지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전부 엄마에게 교육을 맡기고 용돈이나 던져 주고 가끔 소리 지르는 것으로 대신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 떼만 쓰면 다 이루어진다는 “떼법”을 가르치는 세상입니다. (부모에게 대한 순종이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이 될 때: 당신이 부모야 그럴 때라도 부모에게 순종의 자세를 잃지 말라)
자녀들이 어렸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느 때 그 부모들을 고려장시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류대학만 보내려고 애쓰지 마시고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 영생의 법을 가르치시는 부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부모의 책임
“아비들아!”라고 한 것은 가정의 궁극적인 권위자, 최고 책임자, 자녀 교육의 모든 책임은 바로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버지는 거기까지 힘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지도력을 발휘하고 권위를 세우고 있는 가정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유만 주었지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전부 엄마에게 교육을 맡기고 용돈이나 던져 주고 가끔 소리 지르는 것으로 대신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모두가 다 엄마 책임으로 떠밉니다. “집안에서 애들 하나 가르치지 못 한다”고 소리만 지르지 아버지의 책임은 피해 갑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자녀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식탁에 아버지의 자리를 고정석으로 만들어 놓고 아버지가 안 들어오실 때도 그 자리는 안 앉기로 했다. 아버지가 출장 갔을 때 7살 아들이 그 자리에 앉고 맙니다. 엄마가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 그 날만은 용서하기로 한다. “네가 아빠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오늘은 네가 아빠 역할을 해 봐라! 옆에 있던 그 꼬마 누나가 말한다. “아빠! 식사 마치고 내 숙제 좀 도와주세요”그 7 살배기 꼬마가 뭐라고 했을까요 함께 해 볼까요 “나 바빠, 피곤해 네 엄마에게 물어 봐!”7살 아이가 뭘 알겠어요 다 누구에게 배운 걸까요 전부 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신문을 보니까 고등학생 100명 중에 22명은 하루에 아버지와 단 1분도 대화를 안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끔 아버지는 대화라고 생각하는데 아들은 잔소리로 듣는다. 코드가 안 맞는 것이다. 대화를 하려면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줄 줄 알아야 한다. 부부의 하루 평균 대화는 10분이라는 통계: 그것도 대부분 세금 냈느냐 아이는 학원에서 왔느냐는 정보교회 수준! 지적수준이 아니라 정적수준이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아버지 부재의 아버지 시대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 학교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버지의 노릇을 회복하시는 아버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비들아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마라!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경우 -. 지나친 징계(교육의 차원을 넘어서 화풀이의 대상이 될 때) -. 부모들의 이중성(이것은 교회나 가정이 똑 같다. 목사가 말대로 살지 못하면서, 부모가 모본을 보이지 못하면서 말만 앞설 때 설득력을 상실한다) -. 가장 나쁜 형태는 무관심(평소에는 한 마디도 안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매 들고 나타나는 부모.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 길)
자녀들을 격노케 하는 것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요 자녀가 용기를 잃는 다는 것은 미래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여, 자녀들을, 젊은이들을 격노케 하지 말고 격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형광들 스위치를 올리면 켜지고 내리면 꺼지는 것처럼 글자 한 자만 바꾸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자녀를 격노케 말고 자녀를 격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력 장애자 너희는 별 수 없는 장애인이야... 당신이야 장애인이다. 당신이야 말로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사랑하는 성도여, 여호와 하나님은 가정과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의 원칙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내가 지키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 속에서 아무리 좋은 모델을 보아도 내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화가가 목사님께 질문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지요. 믿음은 어느 교횐서나 느낄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신부에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는 사랑일고 대답합니다. 사랑은 가난도 부요하게 하고 눈물도 달콤하게 하고 적은 것도 많게 만들고 사랑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지요. 이번에는 피곤에 지친 군인에게 질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가 잇는 곳에 아름다움도 함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평화! 이것들을 어떻게 그림으로 동시에 표현 할 수 있을까 화가는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에 와보니 아이들 눈 속에 믿음이 있었고 자기를 바라다보는 아내의 눈 속에 사랑이 가득했고 그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세워진 그 가정에 평화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개달았습니다. 그 화가 그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다름 아닌 바로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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