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예수 당시 저 여리고성 밖에서 토하여낸 한 소경의 생명적 절규였습니다. 자신이 소경이라고 하는 처절한 현실에 대한 절망과 암흑의 비탄 속에서, 광명의 세계로 탈출하고 싶은 생명 욕구의 절규였습니다. 아니 현재에서 미래로 비약하고 싶은 몸부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예수를 향한 믿음의 절규였습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 행복해지고 싶은 미래적 충동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소경이 되어버린 자신의 눈이 열려 보기를 원하는 믿음의 함성이었습니다.
1 그는 보기를 원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그 자신이 소경이었기 때문에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중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비극으로 충만한 그의 인간 실존의 모습이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여리고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 같습니다. 그는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자, 앞을 볼 수 없는 자, 캄캄함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거지였다고 하였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하여 길가에서 구걸하기 위해 앉아 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을 몰랐던 죄인이었습니다.
2.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귀로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여리고의 남자(20세 이상)들이 예수와 함께 명절을 지키러 함께 가던 중이었습니다(막 10:46a).
그는 눈이 어두웠던 대신에 듣는 귀, 청각은 발달되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무리들의 발자국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 '나사렛 예수'가 함께 하고 있음도 들었습니다. 정말 뜻밖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이 보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는 번개가 번쩍임같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그 시간은 바로 그의 인생을 새로운 괘도로 진입시키는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3.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멸시하는 어조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이름을 고쳐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성문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는 바로 그 예수가, 오실 인류의 메시야라고 하는 믿음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빛이 필요한 죄인이요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주님을 볼 수 없으나, 열린 그의 마음의 눈이 주를 힘있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두 손을 쭉 벌리고, 인격의 지성소를 마구 흔들어 버리는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구원의 소망을 토하고 만 것입니다.
4.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더욱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8절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함성은 군중들을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군중들은 이 하잘 것 없는 소경 거지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며 그의 함성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군중들의 제지하는 소리를 이겨내는 바디매오의 소리가 또 터져 나왔습니다.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막 10:48b).
생명 있는 신앙은 압제와 박해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운동하는 힘이 있습니다. 더욱 소리를 지르는 그의 함성은 군중의 제지를 뚫고 분명히 주님의 마음을 두드리고 말았습니다.
5.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그 소리 앞에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부르라’, ‘부르며’, ‘부르신다’라고 하는 말이 연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디매오에게 사실상 복음이었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실로 주님은 그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분이었습니다(막 2:17).
마침내 바디매오에게 복음이 들려온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확실히 복음이었습니다. 소망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 속에는 암흑에서 광명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1,000배의 축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6.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뛰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0절에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에게는 현재에서 미래를 향하여 돌진하고 마는 불가항력적 몸부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몸에 걸쳤던 누더기 같은 ‘겉옷’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는 ‘뛰어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체하거나 머무를 줄 모르는 과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나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이 빛 앞으로 나왔습니다. 병자가 의사 앞에 나왔습니다. 절망이 소망 앞으로 나왔습니다. 죄인이 구주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 구원 앞에 나왔습니다. 희망의 행동이었습니다. 불확실이 확실 앞에 나왔습니다. 실로 예수를 향한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쏜 화살처럼 예수께 달려온 것입니다. 필사적인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7.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소원도 너무 간단하였습니다.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소원은 구걸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요구대로 ‘돈’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사람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의 요구였습니다. 필사적인 요구였습니다. 단 한번만의 요구였습니다. 본질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는 어두운 현재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미래를 추구하였습니다. 사실상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미래를 요구한 것입니다.
2 그는 믿음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자체가 구원의 공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의 믿음이 구원을 얻는 방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의 믿음의 주요 믿음의 대상은 나사렛 예수,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보기를 원했던 모든 믿음의 작용은 이미 주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었습니다(엡 2:8).
물론 그의 믿음은 지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인정했습니다(막 10:47). 또한 감정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예수를 불렀습니다(막 10:48).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에게로 뛰어나오는 의지적 결단이 있었습니다(막 10:50).
말하자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고, 육신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의 구원을 확증하여 주신 결과입니다. 그는 그의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을 보는 1,000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3 그는 믿음으로 삶의 신기원을 출발시켰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삶에 신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전(B. C. )의 삶에서 주후(A. D. )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둠에서 광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달리게 되었습니다. 새 감정, 새 지식, 새 결심, 새 방향, 새 목적, 새 의미가 되었습니다.
곧 보게 된 바디매오! 밝은 눈으로 예수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온 천지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정말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영육으로 주님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좇는다’(ajkolouqevw)는 말은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내용 전환’을 가리킵니다. ‘의미 전환’, ‘목적 전환’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① 제자가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 ② 시민이 시민의 법을 따르는 경우, ③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 ④ 신하가 어명을 따르는 경우, ⑤ 노예가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경우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예수를 선생으로, 예수를 자기 사령관으로, 예수를 자기 주인으로, 예수를 자기의 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새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곧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사는 충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걸하던 그 암흑의 길에서 광명의 빛되신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창조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기능의 눈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보통 사물을 식별하는 육안(肉眼)입니다. 또 하나는 그 식별한 사물을 다스리는 지안(智眼)입니다. 즉 이성의 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사물과 사물을 다스리게 하신 존재의 근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그것은 영의 눈(靈眼)입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열리는 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은 혈통으로는 안됩니다. 육정으로도 안됩니다. 또 자신의 뜻대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1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요 3:6).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봅니다(요 3:3, 5).
이러한 영의 눈이 열린 그 사람들은 사실상 금세와 육신을 추구하는 이 세상 삶보다 1,000배나 더한 구원의 복을 받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1,000배나 더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약속된 내세에서 1,000배나 더한 영생의 복, 불사(不死)의 삶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복은 예수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 받은 복입니다. 바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받은 복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신앙이 있는 한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현재보다 나은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의 영광입니다. 유한에서 영원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입니다. 진노에서 사죄입니다. 영벌에서 영생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하는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소경에서 믿음의 눈을 뜨는 1,000배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앉은뱅이에서 일어나 걷는 1,000배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평안의 축복이 1,000배나 더하기를 축원합니다. 영육의 가난에서 1,000배나 더하는 부요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1 그는 보기를 원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그 자신이 소경이었기 때문에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중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비극으로 충만한 그의 인간 실존의 모습이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여리고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 같습니다. 그는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자, 앞을 볼 수 없는 자, 캄캄함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거지였다고 하였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하여 길가에서 구걸하기 위해 앉아 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을 몰랐던 죄인이었습니다.
2.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귀로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여리고의 남자(20세 이상)들이 예수와 함께 명절을 지키러 함께 가던 중이었습니다(막 10:46a).
그는 눈이 어두웠던 대신에 듣는 귀, 청각은 발달되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무리들의 발자국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 '나사렛 예수'가 함께 하고 있음도 들었습니다. 정말 뜻밖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이 보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는 번개가 번쩍임같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그 시간은 바로 그의 인생을 새로운 괘도로 진입시키는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3.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멸시하는 어조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이름을 고쳐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성문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는 바로 그 예수가, 오실 인류의 메시야라고 하는 믿음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빛이 필요한 죄인이요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주님을 볼 수 없으나, 열린 그의 마음의 눈이 주를 힘있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두 손을 쭉 벌리고, 인격의 지성소를 마구 흔들어 버리는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구원의 소망을 토하고 만 것입니다.
4.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더욱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8절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함성은 군중들을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군중들은 이 하잘 것 없는 소경 거지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며 그의 함성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군중들의 제지하는 소리를 이겨내는 바디매오의 소리가 또 터져 나왔습니다.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막 10:48b).
생명 있는 신앙은 압제와 박해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운동하는 힘이 있습니다. 더욱 소리를 지르는 그의 함성은 군중의 제지를 뚫고 분명히 주님의 마음을 두드리고 말았습니다.
5.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그 소리 앞에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부르라’, ‘부르며’, ‘부르신다’라고 하는 말이 연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디매오에게 사실상 복음이었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실로 주님은 그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분이었습니다(막 2:17).
마침내 바디매오에게 복음이 들려온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확실히 복음이었습니다. 소망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 속에는 암흑에서 광명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1,000배의 축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6.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뛰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0절에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에게는 현재에서 미래를 향하여 돌진하고 마는 불가항력적 몸부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몸에 걸쳤던 누더기 같은 ‘겉옷’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는 ‘뛰어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체하거나 머무를 줄 모르는 과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나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이 빛 앞으로 나왔습니다. 병자가 의사 앞에 나왔습니다. 절망이 소망 앞으로 나왔습니다. 죄인이 구주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 구원 앞에 나왔습니다. 희망의 행동이었습니다. 불확실이 확실 앞에 나왔습니다. 실로 예수를 향한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쏜 화살처럼 예수께 달려온 것입니다. 필사적인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7.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보기를 원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소원도 너무 간단하였습니다.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소원은 구걸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요구대로 ‘돈’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사람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의 전능을 믿는 믿음의 요구였습니다. 필사적인 요구였습니다. 단 한번만의 요구였습니다. 본질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는 어두운 현재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미래를 추구하였습니다. 사실상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미래를 요구한 것입니다.
2 그는 믿음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자체가 구원의 공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의 믿음이 구원을 얻는 방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의 믿음의 주요 믿음의 대상은 나사렛 예수,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보기를 원했던 모든 믿음의 작용은 이미 주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었습니다(엡 2:8).
물론 그의 믿음은 지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인정했습니다(막 10:47). 또한 감정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예수를 불렀습니다(막 10:48).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에게로 뛰어나오는 의지적 결단이 있었습니다(막 10:50).
말하자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고, 육신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의 구원을 확증하여 주신 결과입니다. 그는 그의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을 보는 1,000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3 그는 믿음으로 삶의 신기원을 출발시켰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삶에 신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전(B. C. )의 삶에서 주후(A. D. )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둠에서 광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달리게 되었습니다. 새 감정, 새 지식, 새 결심, 새 방향, 새 목적, 새 의미가 되었습니다.
곧 보게 된 바디매오! 밝은 눈으로 예수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온 천지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정말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새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영육으로 주님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좇는다’(ajkolouqevw)는 말은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내용 전환’을 가리킵니다. ‘의미 전환’, ‘목적 전환’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① 제자가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 ② 시민이 시민의 법을 따르는 경우, ③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 ④ 신하가 어명을 따르는 경우, ⑤ 노예가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경우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예수를 선생으로, 예수를 자기 사령관으로, 예수를 자기 주인으로, 예수를 자기의 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새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곧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사는 충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걸하던 그 암흑의 길에서 광명의 빛되신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1,000배나 더한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창조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기능의 눈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보통 사물을 식별하는 육안(肉眼)입니다. 또 하나는 그 식별한 사물을 다스리는 지안(智眼)입니다. 즉 이성의 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사물과 사물을 다스리게 하신 존재의 근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그것은 영의 눈(靈眼)입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열리는 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은 혈통으로는 안됩니다. 육정으로도 안됩니다. 또 자신의 뜻대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1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요 3:6).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봅니다(요 3:3, 5).
이러한 영의 눈이 열린 그 사람들은 사실상 금세와 육신을 추구하는 이 세상 삶보다 1,000배나 더한 구원의 복을 받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1,000배나 더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약속된 내세에서 1,000배나 더한 영생의 복, 불사(不死)의 삶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복은 예수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 받은 복입니다. 바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받은 복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신앙이 있는 한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현재보다 나은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의 영광입니다. 유한에서 영원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입니다. 진노에서 사죄입니다. 영벌에서 영생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하는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소경에서 믿음의 눈을 뜨는 1,000배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앉은뱅이에서 일어나 걷는 1,000배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평안의 축복이 1,000배나 더하기를 축원합니다. 영육의 가난에서 1,000배나 더하는 부요의 축복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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