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본문
오늘은 4월 마지막 날입니다. 부활의 달 4월을 은혜 가운데 인도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부활절이 지났다고 부활에 대해 잊어버리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5월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 5월은 가정의 달 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특히 축복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만일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목양교회 교인은 우선 빠뜨려서는 안 될 대답, 먼저 해야 할 대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중심성구인 고린도후서 6장 2절의 말씀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그 다음으로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네, 봄철, 좋은 때입니다" 그렇지요. 한자로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고 합니다. 내일이 근로자의 날이어서 연휴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더욱 공감을 줍니다.
이 봄에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대답할 것입니다.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수험생들은 "네, 입시준비에 짓눌려 지내는 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분들은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네, 자다가 깰 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럼으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빠뜨리지 말아야할 대답이 있습니다. "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할 때입니다" 하는 대답입니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왜 그렇습니까" "누가 나를 새롭게 해야합니까" "어떻게 나라를 새롭게 해야합니까" 세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찾으면서 은혜 받고, 깨달으려고 합니다.
왜 지금이 나라를 새롭게 해야할 때라고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새 천년이 시작되고 새 세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6대 총선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국회가 개원하는데 16대 총선은 권력의 중심이 시민에게로 옮겨온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변화가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가 구체화되어 가면서 통일에 대한 소망과 관심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통일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새로워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모습이 이대로인 채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을 오염시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4월 마지막 날입니다. 4월은 4·19 민주혁명의 달입니다. 퍽 조용하게 넘어갔습니다만 올해는 4·19 40주년이었습니다. 4·19 때 흘린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새로워져야합니다.
지금은 나라가 새로워져야할 때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사무엘의 음성을 크게 들어야할 때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일정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프하는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시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신앙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오랫동안 제 자리 걸음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가 비약적인 성장을 한 시기였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면 10년 단위로 두 배씩 성장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장이 둔화되었다고 염려하는데 관점에 따라서는 지금 성장이 둔화된 것이 아니라 그 때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목양교회는 새 성전을 짓고 있는 지금이 바로 다시 한 번 점프해야할 때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때를 놓치면 불행해집니다. 병도 치료의 시기를 놓치면 악화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라를 새롭게 할 기회를 지금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안 됩니다.
지금 나라를 새롭게 하지 못하면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혼탁한 이 모습을 지니고 화석처럼 굳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누가 앞장서야합니까
정치인들이라고 대답하기 쉬울 것입니다. 정답일까요
정치인들을 통해서는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저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정답은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지금까지 신앙과 애국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굽 왕실의 영화를 버리고 동족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출애굽을 이끈 모세, 애국자 가운데 애국자입니다.
페르시아 왕실에서 임금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고국으로 돌아간 동족들이 어려움과 모욕을 당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 재건에 앞장 선 느헤미야, 애국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족들을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에스더는 또한 어떻습니까
예레미야는 멸망당한 조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1:1), 나라를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사실을 자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족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롬9:3-4a)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이와 같은 말들이
바울의 애국심과 동족애(同族愛)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로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4-35)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매어 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눅 19:42-44), 완악한 동족, 장차 고난받을 동족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윤리의 교과서도 됩니다.
성경은 또한 문학의 교과서도 됩니다.
경박한 과학자들은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틀리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지만 진지한 과학자들은 성경이야말로 과학자들에게도 교과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와 함께 성경은 또한 애국교본(愛國敎本)도 됩니다.
신앙과 애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면 신앙인의 본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아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주보에서 설교 제목을 보고 "축복 받는 길에 대해 설교하지 무엇 하러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설교를 하나" "기도에 대해서 설교할 것이지 무엇 하러 애국에 대해 설교하나"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마음, 버리셔야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형편 속에서 기독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기독교와 애국이 더욱 뜨겁게 결합되었습니다. 교회는 애국운동의 본산지였습니다. 예수 믿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애국운동 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상동감리교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가들을 "상동파(尙洞派)"라고 부릅니다. 백범 김구(白凡金九) 선생도 상동파 가운데 한 분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하소서"
우리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은 곧 애국자였습니다.
찬송가 371장 "삼찬리 반도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 주신 동산"을 지은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선생은 애국의 길을 처음에는 독립협회 운동에서 찾습니다. 그 다음에는 언론에서 찾습니다.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육에서 찾습니다. 배화학당의 교사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깨달은 결론은 신앙이야말로 참된 애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원도 홍천 모곡이라는 곳으로 가서 열 칸 짜리 예배당을 세우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운동을 합니다. 거기서 지은 찬송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거기서 무궁화 묘목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보 광고 면에 5월 목회 계획을 넣으면서 실수로 속장 세미나를 빠뜨렸는데 5월에 하순에 속장 세미나 갑니다. 장소가 바로 홍천 모곡 한서 남궁억 선생이 일하던 곳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사랑에 앞장섰던 신앙선배들의 전통을 계승해야합니다.
어떻게 새롭게 해야합니까
사무엘은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사울을 왕으로 삼습니다.
길갈로 가서 새롭게 해야합니다.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길갈은 여리고 동쪽 십리쯤 떨어진 곳인데 오늘날의 이름은 키르벳 엔 니틀레입니다.
길갈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수아서 4장과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처음 머문 곳이 길갈입니다.
우리가 수지에 들어와서 임시예배 처소를 차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장소가 우리에게는 길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는 헤브론이 중심지가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칠년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립니다. 그렇다면 올해 가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교육관은 헤브론, 본당은 예루살렘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다윗이 헤브론에서 칠 년 다스렸다고 해서 우리도 교육관에 칠 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육관 생활은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합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의 뜻은 "굴러간다"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수치가 다 굴러갔다고 해서 이 곳 이름이 길갈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분단의 길갈이 빨리 와야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수치가 굴러가는 날이 속히 와야 합니다.
길갈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무엘 당시 3대 중요 도시는 벧엘, 길갈, 미스바였습니다(삼상 7:16) 그 가운데서 길갈은 무엇보다도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 요단강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세웁니다. 강바닥에 있던 돌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시어 마른땅을 밟고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을 뽑아 요단 강의 돌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요단을 건너가 세우게 했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아마 각 지파에서 힘이 제일 센 사람들을 뽑아서 큰돌들을 들어다 세웠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金容基) 장로님은 가나안 농군학교 입구에 돌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라고 이 돌들도 누워있지 않고 일어나 있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누워서 게으름을 부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일어나서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여호수아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특히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한 것을 알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열두 돌을 세운 것입니다. 신앙의 증표로 세운 것입니다.
길갈은 신앙의 증거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 길갈에서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길갈은 제2의 시내산입니다.
길갈에는 성소가 있었습니다. 길갈이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베냐민 지파를 위한 성소였는데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성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믿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뜻입니다.
사무엘서 10장을 보면 사울은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람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있던 사울을 그 앞에 세우고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소개를 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삼상 10:22-24).
그런데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왕으로 선출되고도 사물은 왕으로 즉위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밭에서 일했습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치 요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아직 의원이 아니고 당선자의 신분으로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던 중, 암몬 사람들의 침공해서 길르앗 야베스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울이 앞장서서 암몬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집니다.
이 때 사무엘이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선포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사울의 즉위식을 올리자", "사울이 왕이라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자"는 뜻입니다.
미스바에서는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갈에서는 반대자가 없었습니다. 만장일치로 사울을 추대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때 미스바에서 반대하던 사람들 죽입시다!" 하니까 사울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오늘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푼 날입니다"합니다.
용서와 화해와 일치가 이뤄졌습니다.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15절에 중요한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여호와 앞에"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보이는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여호와 앞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취임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한 장소로 제일 적합한 곳이 길갈이기 때문에 "길길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데 작은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새 예화 종합 대사전이라는 책을 보니까 애국이라는 항목의 제일 앞에 "크리스천 나라사랑 10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는 않은데 내용이 참 좋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① 이 나라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② 나라를 위해, 남북통일과 위정자를 위해 매일 기도하라
③ 각자 처한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라
④ 작은 일에서부터 타인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정직하며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생각하라
⑤ 내가 먼저 질서의 본을 보여라
⑥ '나누어 가지는 삶'을 몸에 배게 하라
⑦ 생명을 귀히 여기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⑧ 창조질서와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해 아나바다 운동을 실천하라
(아나바다 하고 있는 여선교회 회원들, 애국자들입니다)
⑨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지라
⑩ 주의 말씀으로 자녀를 기르라
어려운 것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시면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새롭게 하지 않으면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합니까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새롭게 해야합니다.
어떻게 새롭게 해야합니까
길갈로 가서, 다시 말씀드려 믿음으로, 작은 일부터 새롭게 해야합니다.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생활을 하는 목양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5월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 5월은 가정의 달 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특히 축복해 주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만일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목양교회 교인은 우선 빠뜨려서는 안 될 대답, 먼저 해야 할 대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중심성구인 고린도후서 6장 2절의 말씀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그 다음으로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네, 봄철, 좋은 때입니다" 그렇지요. 한자로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고 합니다. 내일이 근로자의 날이어서 연휴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더욱 공감을 줍니다.
이 봄에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대답할 것입니다.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수험생들은 "네, 입시준비에 짓눌려 지내는 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분들은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네, 자다가 깰 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럼으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빠뜨리지 말아야할 대답이 있습니다. "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할 때입니다" 하는 대답입니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왜 그렇습니까" "누가 나를 새롭게 해야합니까" "어떻게 나라를 새롭게 해야합니까" 세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찾으면서 은혜 받고, 깨달으려고 합니다.
왜 지금이 나라를 새롭게 해야할 때라고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새 천년이 시작되고 새 세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6대 총선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국회가 개원하는데 16대 총선은 권력의 중심이 시민에게로 옮겨온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변화가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가 구체화되어 가면서 통일에 대한 소망과 관심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통일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새로워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모습이 이대로인 채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을 오염시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4월 마지막 날입니다. 4월은 4·19 민주혁명의 달입니다. 퍽 조용하게 넘어갔습니다만 올해는 4·19 40주년이었습니다. 4·19 때 흘린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새로워져야합니다.
지금은 나라가 새로워져야할 때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사무엘의 음성을 크게 들어야할 때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일정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프하는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시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신앙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오랫동안 제 자리 걸음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가 비약적인 성장을 한 시기였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면 10년 단위로 두 배씩 성장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장이 둔화되었다고 염려하는데 관점에 따라서는 지금 성장이 둔화된 것이 아니라 그 때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목양교회는 새 성전을 짓고 있는 지금이 바로 다시 한 번 점프해야할 때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때를 놓치면 불행해집니다. 병도 치료의 시기를 놓치면 악화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라를 새롭게 할 기회를 지금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안 됩니다.
지금 나라를 새롭게 하지 못하면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혼탁한 이 모습을 지니고 화석처럼 굳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누가 앞장서야합니까
정치인들이라고 대답하기 쉬울 것입니다. 정답일까요
정치인들을 통해서는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저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정답은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지금까지 신앙과 애국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굽 왕실의 영화를 버리고 동족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출애굽을 이끈 모세, 애국자 가운데 애국자입니다.
페르시아 왕실에서 임금의 술 맡은 관원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고국으로 돌아간 동족들이 어려움과 모욕을 당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 재건에 앞장 선 느헤미야, 애국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족들을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에스더는 또한 어떻습니까
예레미야는 멸망당한 조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1:1), 나라를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사실을 자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족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롬9:3-4a)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이와 같은 말들이
바울의 애국심과 동족애(同族愛)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로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4-35)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매어 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눅 19:42-44), 완악한 동족, 장차 고난받을 동족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윤리의 교과서도 됩니다.
성경은 또한 문학의 교과서도 됩니다.
경박한 과학자들은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틀리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지만 진지한 과학자들은 성경이야말로 과학자들에게도 교과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와 함께 성경은 또한 애국교본(愛國敎本)도 됩니다.
신앙과 애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면 신앙인의 본분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아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주보에서 설교 제목을 보고 "축복 받는 길에 대해 설교하지 무엇 하러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설교를 하나" "기도에 대해서 설교할 것이지 무엇 하러 애국에 대해 설교하나"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마음, 버리셔야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형편 속에서 기독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기독교와 애국이 더욱 뜨겁게 결합되었습니다. 교회는 애국운동의 본산지였습니다. 예수 믿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애국운동 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상동감리교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가들을 "상동파(尙洞派)"라고 부릅니다. 백범 김구(白凡金九) 선생도 상동파 가운데 한 분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하소서"
우리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은 곧 애국자였습니다.
찬송가 371장 "삼찬리 반도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 주신 동산"을 지은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선생은 애국의 길을 처음에는 독립협회 운동에서 찾습니다. 그 다음에는 언론에서 찾습니다.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육에서 찾습니다. 배화학당의 교사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깨달은 결론은 신앙이야말로 참된 애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원도 홍천 모곡이라는 곳으로 가서 열 칸 짜리 예배당을 세우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운동을 합니다. 거기서 지은 찬송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거기서 무궁화 묘목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보 광고 면에 5월 목회 계획을 넣으면서 실수로 속장 세미나를 빠뜨렸는데 5월에 하순에 속장 세미나 갑니다. 장소가 바로 홍천 모곡 한서 남궁억 선생이 일하던 곳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사랑에 앞장섰던 신앙선배들의 전통을 계승해야합니다.
어떻게 새롭게 해야합니까
사무엘은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사울을 왕으로 삼습니다.
길갈로 가서 새롭게 해야합니다.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길갈은 여리고 동쪽 십리쯤 떨어진 곳인데 오늘날의 이름은 키르벳 엔 니틀레입니다.
길갈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수아서 4장과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처음 머문 곳이 길갈입니다.
우리가 수지에 들어와서 임시예배 처소를 차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장소가 우리에게는 길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는 헤브론이 중심지가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칠년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립니다. 그렇다면 올해 가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교육관은 헤브론, 본당은 예루살렘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다윗이 헤브론에서 칠 년 다스렸다고 해서 우리도 교육관에 칠 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육관 생활은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합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의 뜻은 "굴러간다"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수치가 다 굴러갔다고 해서 이 곳 이름이 길갈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분단의 길갈이 빨리 와야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수치가 굴러가는 날이 속히 와야 합니다.
길갈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무엘 당시 3대 중요 도시는 벧엘, 길갈, 미스바였습니다(삼상 7:16) 그 가운데서 길갈은 무엇보다도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 요단강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세웁니다. 강바닥에 있던 돌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시어 마른땅을 밟고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을 뽑아 요단 강의 돌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요단을 건너가 세우게 했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아마 각 지파에서 힘이 제일 센 사람들을 뽑아서 큰돌들을 들어다 세웠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金容基) 장로님은 가나안 농군학교 입구에 돌들을 세워 놓았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라고 이 돌들도 누워있지 않고 일어나 있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누워서 게으름을 부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일어나서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여호수아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특히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한 것을 알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열두 돌을 세운 것입니다. 신앙의 증표로 세운 것입니다.
길갈은 신앙의 증거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 길갈에서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길갈은 제2의 시내산입니다.
길갈에는 성소가 있었습니다. 길갈이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베냐민 지파를 위한 성소였는데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성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를 새롭게 하자"는 것은 "믿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뜻입니다.
사무엘서 10장을 보면 사울은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람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있던 사울을 그 앞에 세우고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소개를 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삼상 10:22-24).
그런데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왕으로 선출되고도 사물은 왕으로 즉위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밭에서 일했습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치 요즘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아직 의원이 아니고 당선자의 신분으로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던 중, 암몬 사람들의 침공해서 길르앗 야베스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울이 앞장서서 암몬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집니다.
이 때 사무엘이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선포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사울의 즉위식을 올리자", "사울이 왕이라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자"는 뜻입니다.
미스바에서는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갈에서는 반대자가 없었습니다. 만장일치로 사울을 추대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때 미스바에서 반대하던 사람들 죽입시다!" 하니까 사울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오늘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푼 날입니다"합니다.
용서와 화해와 일치가 이뤄졌습니다.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15절에 중요한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여호와 앞에"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보이는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여호와 앞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취임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한 장소로 제일 적합한 곳이 길갈이기 때문에 "길길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데 작은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새 예화 종합 대사전이라는 책을 보니까 애국이라는 항목의 제일 앞에 "크리스천 나라사랑 10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는 않은데 내용이 참 좋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① 이 나라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② 나라를 위해, 남북통일과 위정자를 위해 매일 기도하라
③ 각자 처한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라
④ 작은 일에서부터 타인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정직하며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생각하라
⑤ 내가 먼저 질서의 본을 보여라
⑥ '나누어 가지는 삶'을 몸에 배게 하라
⑦ 생명을 귀히 여기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⑧ 창조질서와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해 아나바다 운동을 실천하라
(아나바다 하고 있는 여선교회 회원들, 애국자들입니다)
⑨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지라
⑩ 주의 말씀으로 자녀를 기르라
어려운 것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시면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새롭게 하지 않으면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합니까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새롭게 해야합니다.
어떻게 새롭게 해야합니까
길갈로 가서, 다시 말씀드려 믿음으로, 작은 일부터 새롭게 해야합니다.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생활을 하는 목양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