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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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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 성령 충만 받은 것이 어디서 나타나야 하느냐하면 '피차 서로 복종하라'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실천 강령이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종이 상전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차원에서 부부에 대한 말씀을 전하도록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예배, 어버이주일예배, 그리고 오늘 스승의 주일입니다. 그런데 스승의 주일은 여러모로 설교를 듣습니다. 제자의 삶에 대해서는 자주 듣기 때문에 오늘은 대신 성령 충만한 자의 실천 강령인 부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잘 지내야 된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으면 자녀와의 관계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없다 . 부부는 대화의 담이 막히면 안 된다. 서로 사랑해야 된다. 이런 말들은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다시 말씀드리면 설교를 듣지 않아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굳이 교회에 와서 듣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부부세미나나 이런 프로에 참여하면 더 좋은 내용과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부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부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시대에 뒤 떨어졌다든지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든지 이런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환경과 여건과 시대와 문화와 분위기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부부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보다도 부부와 가정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에덴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아내인 화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짝지어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니까 부부의 원리와 원칙은 성경말씀대로 지켜나갈 때 아름다운 가정,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아멘이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이 사실 아내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부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말씀에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지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내용과 말씀을 들으시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대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허락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신비한 일인가 하는 것을 배우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부부이야기, 말하자면 남편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성경이 부부됨에 대한 묘사를 무엇으로 비유해서 말씀하는가하면 교회와 주님의 관계로 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 사실 이 부분이 굉장한 신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이렇게 진술하십니다.
그 다름에 24절로 들어가는데 '그러나'라고 번역된 것보다 '그러므로' 혹은 '그런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원문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라' '그런즉'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 여자 분들은 복종이라는 단어 때문에 호 마음 상해하실지 모릅니다마는 그 복종이라는 단어 이전에 도대체 주님과 교회의 관계란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언제나 머리와 몸이라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말씀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를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전에 먼저 풀고 가야 될 것이 있습니다. 5장 22절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왜냐하면 남편의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은데 그는 몸의 구주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진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비유가 합당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주님이 우리의 구주 신 것 같이 그런 '구세주'라는 개념으로 섬기란 말입니까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여기서 혼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4:10에 똑같은 쓰인 내용이 이렇게 표현되어 나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들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여기에 구주라는 것은 '믿는 자들이 주시시라' 보세요. 여기서 구주라는 것은 지의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했다는 그런 의미의 구주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하자면 보호자라는 의미에서 구주라는 뜻입니다.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도우시고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보호자 그런 뜻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정확하게 같은 뜻입니다마는 왜 교회가 주께 복종해야 될까요 그가 교회의 보호자요, 양육하시는 분이요,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남편의 지위가 아내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든지 남편이 하고 우리는 거기서 받아먹는 제비새끼들이란 말이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나는 벌어오고 너희는 벌어 온 것으로 먹는 자에 불과하다’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요즘 맞벌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여자 분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경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몸과 머리의 개념입니다. 1장 23절로 돌아가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니까 곧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분명히 ‘만물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 충만 이라는 말이 어디에 붙는 것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회가 없이는 충만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만큼 대접하는 것인가 하면 우리 없이는 교회 없이는 신자들 없이는 홀로 만족하거나 완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실 정도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부르신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되셨다는 것이 갖는 큰 은혜와 커다란 신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아니면 스스로 충만을 보류하겠다는 계획은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를 잘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께서 ‘교회의 보호자’라는 것은 우열의 개념에서 이야기가 아니라 역할의 부분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이렇다는 것이지요. 어떤 권위와 질서의 개념에서 보호자입니다마는 그것마저도 아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실천 강령이 ‘질서’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질서요 부부와의 관계도 질서요 상전과 하인의 관계도 질서입니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두신 것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과의 질서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가 사람을 창조하시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에덴에서 행복한 가정을 가꾸며 살아가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은 질서의 파괴입니다.
그리니까 질서의 파괴가 죄를 낳게 된 것이지요. 가정에서의 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위해서는 질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종과 사랑은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교회가 주님께 하듯 주님이 교회에게 하듯, 이런 관계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예를 들어서 머리가 좋아야 운동도 잘 합니다. 머리가 좋아야 축구도 잘 합니다. 머리가 좋아야 뭐든지 잘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공을 차거나 머리가 좋아도 피쳐의 공을 머리고 받아치고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 머리를 따라 줘야합니다. 그러니까 머리에 든 것이 몸으로 실천되는 것으로 평가 받는 것입니다.
왜 교회와 주님을 함께 묶어서 설명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그것이 남편과 아내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방법 외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신비합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충만을 채울 수 있는 곳이요, 영의 말씀을 공급받는 곳이요, 주님과 묶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고집을 내 세우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희생하며 그 속에서 교회의 책임과 의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몸으로 연합되어 가면 어떤 위기와 어려움도 이겨냅니다. 행복한 삶으로 채울 수 있는 유이란 곳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후손들에게 귀한 유산을 물러주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유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고집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어느 머리든지 자가 몸을 아끼는 법입니다. 감기가 온다. 그러면 몸을 두툼하게 감싸게 됩니다. 손가락 하나 다치거나 몸이 이상이 있으면 온갖 좋다는 약은 비타민 A에서부터 온갖 것을 다 갖다먹습니다. ‘몸을 아낀다. '는 것은 결코 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책임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똑 같습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남편 흉을 보거나 아내 흉을 본다면 그것을 바로 자기를 흉보는 것이 됩니다. 사실 이 원리가 창조사역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갈 때 창조원리를 따르는 것이고 그 원리 안에서 축복이 보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했습니다.
두 번째 여자를 만드는데 경험이 좀 있어서 그런지 남자보다 더 아름답게 창조했습니다. 들어 갈 때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나오고 균형을 잘 잡았습니다. 올록볼록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창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가슴과 배가 일직선상에 놓인다면 이것은 창조섭리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인병이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좀 우스게로 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창조 섭리대로 가야 됩니다. 사회적 변화나, 문화나, 시대적 흐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여성적 권위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하나 창조의 원리는 성경적 원리를 떠나서는 절대로 가정이 건강하게 설수 없습니다.
병원에 남편이 아파서 입원을 했습니다. 자식들과 며느리가 찾아와서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해도 아버지는 ‘바쁜데 빨리 가라, 내일 일찍 출근해야 되지 않니’ 그러면서 자꾸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조금만 없어도 ‘이 여편네 이디 갔다 왔냐’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왜 입니까 편한 것입니다. 연합되어 있기에 편한 것입니다.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종 부리듯 하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남편이 소를 팔려가서 여러 군데서 사기를 당하고 결국 계란 한판을 들고 들어와도 ‘잘했소’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한 몸의 관계입니다. 한 몸이니 서로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 있습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 어떻게 이런 인간과 결혼을 했나’ ‘이 인간 만나서 내 인생이 이토록 망가졌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역할과 책임을 다 하지 못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복종과 사랑의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이렇게 빗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누가 잘 했나 누가 못했나 이렇게 따집니다. 사회학적으로도 따집니다. 법정에 가서도 따집니다. 누가 잘 했나 누가 못했나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잘 했나 누가 못했나는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질서를 제대로 믿음을 지키고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갖는 특징 중에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으며,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맡겨서 나의 운명과 나의 존재를 의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이 원리를 사소한 문제로 생각한다면 사실 그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서도 순종하는 법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당연한 부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아내가 값어치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보다 못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사명은 가정입니다. 남편을 보필하십시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말씀의 원칙과 원리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주님께 하듯 교회께 하듯 말입니다. 이것은 싫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원리요 기준이요 법입니다. 그래서 따라야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합니다. 누가 손해고 누가 이익이고 그것이 없습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 해야 내가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들었지 목사님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거’그러면 아내가 ‘네 먼저 사랑부터 해 보시지’이런 것이 아니라 그가 맡은 위치에서 한 몸 안에서 행하는 동일한 내용이란 말입니다. 누가 손해보고 유익이고가 없다는 말이지요.
저희 지방회 목사님 중에 옆과 뒤쪽을 제외하고 앞부분은 머리카락이 없으신 분이 계십니다. 부부성장대회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어떤 목사님이 머리까락 없으신 목사님께 이발소가면 이발비 깎아 주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없는데 이발할 것도 없어서입니다. 그랬더니 머리까락이 없으신 목사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머리카락이 많으면 대충대충 신경 안 쓰고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지만 자기 같은 경우는 한 울 한울 신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이발비를 같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없다고 싼 것이 아니고 있다고 비싼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부부도 누구하나 잘 난 부분이 없습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마세요.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것 쉽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도하는 것도 쉬울 수 있습니다. 금식하는 것 그것 어찌 보면 별것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한 부분이지요. 삶의 한 부분을 때어내서 할 수 있는 일은 쉽습니다. 그래서 철야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작정기도 없고 40일 금식하라는 소리는 없지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습니다. 이것을 시켜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가 태어나자마자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한 것 아시지요. 그러면 그 전에는 잘 몰랐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은혜의 삶을 살기 전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가 어느 사건이나 어느 계기가 되어서 체험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은혜를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에녹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있었지만 므두셀라가 태어난 것을 계기로 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므두셀라라는 뜻이 ‘이 아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므두셀라가 태어났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부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문제는 있을 때 그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없어져도 얼마나 불편합니까 실명이 되면 이로 말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눈 멀쩡할 때는 그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긴장합시다. 오늘 하루 함께함을 감사하시며 서로 복종하고 사랑하십시오. 내일은 믿음으로 보시고 오늘을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들 딸 다 떠나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부부입니다. 제가 정년퇴직하고 교회를 떠나도 함께 따라오는 유일한 사람이 제 집사람입니다. 아무리 망신창이가 되어 누워있다 하더라도 옆을 굳건히 지키는 분은 아내요 남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부가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아내가 아프면 그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불편하면 무엇 때문에 불편해하는지 알게 될 때가 많습니다. 얼굴을 보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자꾸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서로가 정말로 안 맞는 부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 이혼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이런 생각이 더는 부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어느 부분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없겠지만 저는 일반적인 형태의 부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놓칠 수 없는 생각과 믿음 중에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을 수없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눈 감고 잡아도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 잡을 수 있다’아닙니다. 그때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잡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주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원리와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가정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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