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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졸업] 마하나임-하나님의 군대

본문

오늘 본문은 소망 없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오면서 영적 충만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특히 상급학년으로 진급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각오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하나임!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힌 지 5년 되던 해에 멸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마른 뼈가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영적인 눈이 띄여져야 합니다. (1~2절)
 가치관이 변하여야 합니다. 나의 시각에서 세상적인 시각에서 관점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종교 작가인 스코트 팩이란 사람의 "랍비의 선물"이란 글의 내용입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산 속에 수도원을 짓고 공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찾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과 불신이 쌓여지고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처음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들의 삶은 지옥같이 느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 수도원을 떠나가고 다섯 사람만 남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수도원 문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기다려 볼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고민하다 그들은 평소에 존경하는 랍비를 찾아가서 그에게 묻기로 했습니다. 묵묵히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랍비가 대답합니다. "이제 다섯 사람 남았지요? 이들 다섯 사람 중에 메시아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나올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는 바입니다. " 랍비의 예언을 들은 후부터 그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 단점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동료들에게서 가능성과 장점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메시아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그가 누구일까?"하고 서로의 가능성을 따져 봅니다. "토마스일까? 그는 의심이 많긴 하지만 정직한 사람이지. 그러니까 혹시 그가 메시야가 될지 모르지" "제임스일까? 그는 반항심이 많지만 그 친구의 마음 바탕은 정의를 사모하니까 아마 그 일지도 몰라" "아니, 필립일지도 몰라. 우리가 보기에는 무능하고 약하지만 사랑은 많은 사람이니까 그가 메시야가 될지 모르지". " 혹, 요한일까? 감정이 격한 편이지만 기도의 사람의 사람이니 그의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이 들으실지 모르지". "아니면 아론일꺼야? 욕심은 많지만, 그의 의용과 열정을 따를 사람이 없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자 모두가 메시야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수도원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존경과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자 그 소문은 사방으로 퍼지고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로 수도원은 가득 차게 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성경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은 오늘의 경쟁사회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남을 높일 때 자신도 함께 높아져 모두가 이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할 일을 이루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볼 때는 실패요, 한 숨이요, 어려움이요, 힘듦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모든 기회로 보게 됩니다.
졸업생들과 여러분들의 이러한 영적인 눈이 뜨여지길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4절)
 모든 것의 기본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창조의 그 권능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될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분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이상의 권위를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존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줄 믿으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장하고 계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말입니다.
 작은 실수 하나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습니다. 큰 물고기도 작은 미끼에 걸려 잡힙니다.
 두 번째는 딱 "한 번만.. " 이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항상 딱 한번이라는 말을 유혹의 미끼로 사용합니다. 딱 한번인데 뭘…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딱 한 번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엄청난 저주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 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더 깊이 영적 생활을 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직 젊어 좀 나이가 먹으면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되잖아 ….. 사단의 이 말에 속아서 젊은 시절을 허송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네 번째는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데 뭘 그래.... "입니다.
 남들 다 편하게 사는 데 뭘 너 혼자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어도 적당하게 믿고 교회를 다녀도 적당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보다 더 낫고 훌륭한 사람들의 모습을 롤 모델로 삼아 ‘그처럼 해야지’ 보다는, 자기와 같거나 못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고 ‘그들도 그러는데 뭘’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졸업생과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까? 사탄의 음성을 들으시렵니까?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생기로 임하여야 합니다. (5~6절)
 여호와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었습니다. 생기! 즉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이 생기로 인하여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생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영입니다.
 어떤 부인이 믿지 않는 남편을 간신히 이끌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은 손을 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도 이 순간 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약속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슬픈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손을 들고 예수 믿기로 약속하실 줄 알았는데 왜 안 들었죠?" 그러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그 동안 당신은 크리스찬으로 살아왔고 나는 불신자로 살아왔소. 그런데 그 동안 당신의 생활을 보면 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소. 내가 화내면 당신도 화내고, 내가 술을 마시면 당신도 마셨고, 내가 춤추러 가면 당신도 가고, 내가 걱정하면 당신도 걱정하고, 내가 일요일 바다로 가면 당신도 따라나섰지 않소.... 이처럼 당신과 나의 생활이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특별히 크리스찬이 되어야 하는지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소" 얼마나 신앙생활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변화되었는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생기로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마른 뼈에 살아나는,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파괴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좋은 관계가 파괴되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무너진 관계를 수축해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850명과 누구 신이 진짜인가를 두고 대결 할 때, 제일 먼저 ‘무너진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하였던 것입니다.
 깨어진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진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의 불이 제단에 내려졌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습니까? 혹시 생기 없는 겉모양만 크리스찬은 아닌지요?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는 살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기억하심을 바랍니다.

 넷째.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11~12절)
 소망의 삶 자체의 모습입니다. 단테는 그의 저서 실낙원, 지옥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입구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 이곳에서는 더 이상의 소망를 버려야 합니다 이곳은 소망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 소망은 삶의 의미입니다. 소망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지옥같은 삶입니다. 주변에서 힘들게 사는 분들의 고백이 뭡니까? ‘이 지옥같은 생활 이제 지긋지긋해’라는 겁니다. 왜요? 그것은 내일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여! 우리의 소원이 진정 간절하며 순수하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머지 않아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거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마른뼈 같은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소망과 약속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사는 형태를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참 많습니다.
 두번째는,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안 하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사명에 따라 사는 사람 있습니다. 사명에 따라 살고 사명에 따라 죽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 번째 사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용되어집니다. 진정 기쁨의 삶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졸업생들과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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