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9명과 1명의 차이
본문
근육이 점차 약해져서 결국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근육 디스트로피”라는 희귀한 병을 앓는 16살의 김민식군이 새해 아침에 마비되어가는 손으로 쓴 시입니다.
"새해 아침 커다란 해가 떠올라
세상은 빛으로 충만하다.
햇빛을 받아 안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소나무들은 유난히 더 푸르다.
앞산을 오래 바라보며 끝까지 눈을 뜬다.
나도 나무들 곁으로 가
서고 싶다. ”
부모는 절망으로 넘어졌는데, 김민식군은 시를 쓰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육신은 병마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만, 마음과 영은 굴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시가 따뜻하고 꿋꿋합니다. 원망도 억울함도 없습니다.
“시를 쓰면 희망이 보여요. ”라는 그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생각”이란 시 마지막 연에서는 “나는 사계절 내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사계절 내 당신을 경배합니다. ”라 노래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장애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국민의 8-10%가 장애인이라는 통계에 따르면, 장애인과 가족으로서 모든 국민이 장애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대도 사회구조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조로는 미흡합니다. 많은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편견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할 때 문둥병자 10명이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를 고쳐주소서. ”라는 간청입니다. 문둥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기던 시대입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문둥병 판정을 받으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가족,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나는 부정하다. ”소리 질러야 합니다.
3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육체적으로 문둥병으로 인한 장애의 고통,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격리됨으로 겪는 마음과 정신의 고통,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영적 고통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정신, 영적 고통은 사회적 구조나 종교적 관행과 율법이 만들어 낸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병 자체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 때 가족과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랑을 받는다면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제적으로 사랑을 나눌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내쫓으며 손가락질 받습니다. “너는 죄인이야!” 천형(天刑) 그 자체보다도 천형으로 간주하는 제도로 인한 소외(疎外)가 훨씬 더 큰 고통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나는 부정하다. ”라 해야 하는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치면서 율법적 사회적 관습의 굴레를 벗어보려고 시도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하십니다. 길 위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9명은 그대로 자기 고향을 향했지만,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께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에서 9명과 1명이 달라집니다. 예수께서 이 1명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9명과 1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10명 모두 천형이 치유되었습니다. 가족과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회적 편견과 제도와 관습으로부터의 소외를 더 이상 맛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인으로 살아가던 굴레도 벗어 자유와 해방을 누립니다. 여기까지는 10명이 같습니다.
그런데 되돌아온 한 명에게는 “네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 ”는 “믿음”, 곧 “예수는 나의 구주” 고백이 있고 9명은 없습니다. 믿음의 고백은 영적인 자유를 허락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1명은 자신에게, 가족과 사회에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바르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9명과 1명의 차이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적 장애를 고치십니다.
문둥병을 치유하십니다. 문둥병은 감각을 잃는 병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보면서도 고통이 없고, 부정에 분노를 상실하고, 악한 세력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마음과 영의 문둥병자입니다.
믿음의 확신 없이 주의 은총에 대한 사모하는 심령이 소멸되었다면 위험한 장애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 주일을 지키면서 먼저는 주변의 육체적 장애를 가진 이웃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장애를 살펴야 합니다.
장애가 생기면 치유되길 바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애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장애를 뛰어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새해 아침 커다란 해가 떠올라
세상은 빛으로 충만하다.
햇빛을 받아 안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소나무들은 유난히 더 푸르다.
앞산을 오래 바라보며 끝까지 눈을 뜬다.
나도 나무들 곁으로 가
서고 싶다. ”
부모는 절망으로 넘어졌는데, 김민식군은 시를 쓰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육신은 병마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만, 마음과 영은 굴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시가 따뜻하고 꿋꿋합니다. 원망도 억울함도 없습니다.
“시를 쓰면 희망이 보여요. ”라는 그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생각”이란 시 마지막 연에서는 “나는 사계절 내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사계절 내 당신을 경배합니다. ”라 노래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장애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국민의 8-10%가 장애인이라는 통계에 따르면, 장애인과 가족으로서 모든 국민이 장애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대도 사회구조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조로는 미흡합니다. 많은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편견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할 때 문둥병자 10명이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를 고쳐주소서. ”라는 간청입니다. 문둥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기던 시대입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문둥병 판정을 받으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가족,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나는 부정하다. ”소리 질러야 합니다.
3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육체적으로 문둥병으로 인한 장애의 고통,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격리됨으로 겪는 마음과 정신의 고통,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영적 고통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정신, 영적 고통은 사회적 구조나 종교적 관행과 율법이 만들어 낸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병 자체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이 때 가족과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랑을 받는다면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제적으로 사랑을 나눌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내쫓으며 손가락질 받습니다. “너는 죄인이야!” 천형(天刑) 그 자체보다도 천형으로 간주하는 제도로 인한 소외(疎外)가 훨씬 더 큰 고통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나는 부정하다. ”라 해야 하는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치면서 율법적 사회적 관습의 굴레를 벗어보려고 시도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하십니다. 길 위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9명은 그대로 자기 고향을 향했지만,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께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에서 9명과 1명이 달라집니다. 예수께서 이 1명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9명과 1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10명 모두 천형이 치유되었습니다. 가족과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회적 편견과 제도와 관습으로부터의 소외를 더 이상 맛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인으로 살아가던 굴레도 벗어 자유와 해방을 누립니다. 여기까지는 10명이 같습니다.
그런데 되돌아온 한 명에게는 “네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 ”는 “믿음”, 곧 “예수는 나의 구주” 고백이 있고 9명은 없습니다. 믿음의 고백은 영적인 자유를 허락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1명은 자신에게, 가족과 사회에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바르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9명과 1명의 차이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적 장애를 고치십니다.
문둥병을 치유하십니다. 문둥병은 감각을 잃는 병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보면서도 고통이 없고, 부정에 분노를 상실하고, 악한 세력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마음과 영의 문둥병자입니다.
믿음의 확신 없이 주의 은총에 대한 사모하는 심령이 소멸되었다면 위험한 장애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 주일을 지키면서 먼저는 주변의 육체적 장애를 가진 이웃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장애를 살펴야 합니다.
장애가 생기면 치유되길 바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애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장애를 뛰어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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