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에바다
본문
제가 방금 봉독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귀먹고 어눌한 장면을 고치시는 장면이고, 8장에 가면 소경을 고치십니다. 8장 18절에 가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장애인을 고치신 이적이나 8장에서 소경을 고치신 이적이 실은 그들의 육체적 장애뿐 아니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혀가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오늘 우리들의 영적 장애까지도 함께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 표적을 통해 우리들의 눈도 귀도 열리고, 혀도 풀리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 장애인을 어떻게 고치셨는지 과정을 보겠습니다. 우선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33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귀먹고 어눌한 장애인을 무리로부터 불러내서 따로 만나 주신 겁니다. 주님은 항상 이렇게 하십니다. 단체 면담은 사절이고, 상상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아니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병리현상 중 하나가 집단 무의식, 집단 체면 현상이라고 봅니다. 이게 다 일제와 군사문화의 잔재일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전체주의, 획일주의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붉은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십 수백만이 거리 응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을 세계에 과시했을지 모르겠으나 한편 자부심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개운치 않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 개최를 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미 쪽도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복장, 똑같은 손발짓, 똑같은 구호로 경직되게 응원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붉은 악마와 북한의 매스게임이 다를 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촛불 시위와 북한의 카드섹션이 다를 게 무엇입니까? 손에 든 연장만 다릅니다. 어쩌면 그토록 기계적입니까? 전체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집단 속에서 개체는 완전히 해소됩니다.
아직도 우리는 영적 집단 최면에 걸려있습니다.
일종의 치명적 사회병리현상입니다. 이 시대의 지구촌 문화의 대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것은 해체주의입니다. 개성이 존중되는 개별, 개체주의입니다. 과거 획일적이고 경직된 문화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게 존중되고 개성이 높이 평가 됩니다. 그래서 개인이 주체가 되는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집단문화의 상징인 유행이 대세입니다. 다 똑같이 입고, 똑같은 구호를 질러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유행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유별납니다. 유행을 따라잡지 못하면 사회에서 도태되고 배제당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교회는 안 됩니다. 큰 교회가 대세입니다. 대중 속에 있어야 안도감이 생기고 소속감이 생깁니다. 이건 다 정신병입니다. 집단 속에 떠밀려 적당히 함께 있어야, 익명의 신자로 있어야 신경 쓸 일도 없고 편합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거기에는 주님이 없고, 치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일대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집단 속에 있는 장애인을 굳이 불러내서 따로 만나신 겁니다. 끝까지 무리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은 분은 평생 주님 만날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주님을 만나 내 장애를 고치고 싶다면 무리를 떠나십시오. 주님을 개인 면담하십시오.
8장에 나오는 맹인 고치신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23절 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 고독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라는 겁니다. 그래야 거기에 이적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우리 집사람이 잘 믿으니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 가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절대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아내가 잘 믿으면 감동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일대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절대 아내 덕에 남편 천국 못가고, 부모 덕에 자식 천국 못 갑니다. 일대일로 만나야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부디 속지 마십시오.
다음으로는 믿음을 고무하셨습니다. 33절 하반절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 이것은 특이한 장면이지만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자극하기 위해 스킨쉽을 하신 겁니다. 지금 장애인은 못 듣고 말을 못 합니다. 지금 주님이 장애인과 소통하신 겁니다. 희망을 가지라는 신호를 보낸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장애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장애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하, 주님이 무언가 하시려나보다’하고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양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혀에 손을 대신 겁니다. 8장에 나오는 소경을 고치실 때도 그랬습니다. 눈에 안수를 하십니다. 마찬가지 효과를 노리신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장애인을 고치기 전에 믿음을 자극하셨을까요? 왜 장애인으로 하여금 벅찬 기대와 믿음을 가지게 하셨을까요?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적이나 기적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권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적을 나타내기 전에 믿음을 자극한 겁니다.
오늘 본문 앞 장인 6장 5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고향에서는 아무런 이적을 보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 저 사람 요셉의 아들인데…’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향에서 이적을 못 행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 왜 믿지 않는 곳에는 기적이 안 나타납니까? 그런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봐야 덕이 되지 않고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손이 마비가 된 장애인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그 이적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이 오히려 주님의 신변을 위협하는 화근이 됩니다. 주님이 환자를 고치신 후에 하신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이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발생합니다. 이게 이적의 공식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기적이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의 정말 장애가 치유되기를 바라십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과정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34절 상반절 입니다. “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것은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기도자세입니다. 유대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모든 선한 것이 하늘에서 오고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야 집중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님이 장애인을 앞에 두고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는 것은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원어적으로는 신음소리를 냈다는 뜻입니다. 기도 없는 이적은 없습니다. 주님도 장애인을 앞에 두고 신음하듯 기도함으로써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기적이 내게 전달되는 배관입니다. 하다 못해 방송국에서 발사하는 전파도 주파수가 맞아야 내게 전달 됩니다. 수도국에 있는 물이 내 집에 들어오려면 배관이 필요합니다. 전기도 마찬가지로 배선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만 가지 축복이 내게 전달되려면 배관, 통로, 주파수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필수입니다. 주님도 신음하듯 기도하심으로 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허투로 듣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장애로 놓이길 바라신다면 기도하십시오. 신음하며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립니다. 주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며 ‘에바다’ 하시자,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집니다. 주위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십시오. 무리 속에 있다고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확신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내 장애를 온전케 하실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에바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온전해 지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 장애인을 어떻게 고치셨는지 과정을 보겠습니다. 우선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33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귀먹고 어눌한 장애인을 무리로부터 불러내서 따로 만나 주신 겁니다. 주님은 항상 이렇게 하십니다. 단체 면담은 사절이고, 상상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아니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병리현상 중 하나가 집단 무의식, 집단 체면 현상이라고 봅니다. 이게 다 일제와 군사문화의 잔재일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전체주의, 획일주의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붉은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십 수백만이 거리 응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을 세계에 과시했을지 모르겠으나 한편 자부심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개운치 않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 개최를 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미 쪽도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복장, 똑같은 손발짓, 똑같은 구호로 경직되게 응원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붉은 악마와 북한의 매스게임이 다를 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촛불 시위와 북한의 카드섹션이 다를 게 무엇입니까? 손에 든 연장만 다릅니다. 어쩌면 그토록 기계적입니까? 전체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집단 속에서 개체는 완전히 해소됩니다.
아직도 우리는 영적 집단 최면에 걸려있습니다.
일종의 치명적 사회병리현상입니다. 이 시대의 지구촌 문화의 대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것은 해체주의입니다. 개성이 존중되는 개별, 개체주의입니다. 과거 획일적이고 경직된 문화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게 존중되고 개성이 높이 평가 됩니다. 그래서 개인이 주체가 되는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집단문화의 상징인 유행이 대세입니다. 다 똑같이 입고, 똑같은 구호를 질러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유행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유별납니다. 유행을 따라잡지 못하면 사회에서 도태되고 배제당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교회는 안 됩니다. 큰 교회가 대세입니다. 대중 속에 있어야 안도감이 생기고 소속감이 생깁니다. 이건 다 정신병입니다. 집단 속에 떠밀려 적당히 함께 있어야, 익명의 신자로 있어야 신경 쓸 일도 없고 편합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거기에는 주님이 없고, 치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일대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집단 속에 있는 장애인을 굳이 불러내서 따로 만나신 겁니다. 끝까지 무리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은 분은 평생 주님 만날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주님을 만나 내 장애를 고치고 싶다면 무리를 떠나십시오. 주님을 개인 면담하십시오.
8장에 나오는 맹인 고치신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23절 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 고독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라는 겁니다. 그래야 거기에 이적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우리 집사람이 잘 믿으니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천국 가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절대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아내가 잘 믿으면 감동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일대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절대 아내 덕에 남편 천국 못가고, 부모 덕에 자식 천국 못 갑니다. 일대일로 만나야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부디 속지 마십시오.
다음으로는 믿음을 고무하셨습니다. 33절 하반절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 이것은 특이한 장면이지만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자극하기 위해 스킨쉽을 하신 겁니다. 지금 장애인은 못 듣고 말을 못 합니다. 지금 주님이 장애인과 소통하신 겁니다. 희망을 가지라는 신호를 보낸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장애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장애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하, 주님이 무언가 하시려나보다’하고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양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혀에 손을 대신 겁니다. 8장에 나오는 소경을 고치실 때도 그랬습니다. 눈에 안수를 하십니다. 마찬가지 효과를 노리신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장애인을 고치기 전에 믿음을 자극하셨을까요? 왜 장애인으로 하여금 벅찬 기대와 믿음을 가지게 하셨을까요?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적이나 기적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권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적을 나타내기 전에 믿음을 자극한 겁니다.
오늘 본문 앞 장인 6장 5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고향에서는 아무런 이적을 보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 저 사람 요셉의 아들인데…’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향에서 이적을 못 행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 왜 믿지 않는 곳에는 기적이 안 나타납니까? 그런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봐야 덕이 되지 않고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손이 마비가 된 장애인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그 이적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적이 오히려 주님의 신변을 위협하는 화근이 됩니다. 주님이 환자를 고치신 후에 하신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이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발생합니다. 이게 이적의 공식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기적이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의 정말 장애가 치유되기를 바라십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과정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34절 상반절 입니다. “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것은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기도자세입니다. 유대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모든 선한 것이 하늘에서 오고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야 집중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님이 장애인을 앞에 두고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는 것은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원어적으로는 신음소리를 냈다는 뜻입니다. 기도 없는 이적은 없습니다. 주님도 장애인을 앞에 두고 신음하듯 기도함으로써 온전케 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기적이 내게 전달되는 배관입니다. 하다 못해 방송국에서 발사하는 전파도 주파수가 맞아야 내게 전달 됩니다. 수도국에 있는 물이 내 집에 들어오려면 배관이 필요합니다. 전기도 마찬가지로 배선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만 가지 축복이 내게 전달되려면 배관, 통로, 주파수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필수입니다. 주님도 신음하듯 기도하심으로 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허투로 듣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장애로 놓이길 바라신다면 기도하십시오. 신음하며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립니다. 주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며 ‘에바다’ 하시자,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집니다. 주위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십시오. 무리 속에 있다고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확신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내 장애를 온전케 하실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에바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온전해 지시길 기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