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손 마른 사람과 예수의 마음
본문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 주일을 맞이합니다. 1981년 제정된 장애인의 날은 올해도 변함없이 실시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일년 365일 가운데 364일은 비장애인의 날이고 4월 20일만 장애인의 날이 되었습니다. 방송과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4월 한 달에 걸쳐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각종 시상 프로그램을 편성하지만 대체로 사회에서 바라보는 장애인에 관한 시선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 보기 보다는 불쌍한 사람, 동정의 대상 정도로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총선 때문에 그나마도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한 한 해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서너 집 건너 한 가정씩 장애인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현실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과연 한국에는 장애인들이 별로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에 사는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72. 5%가 일주일에 닷새도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최근 불거진 장애인들의 주장은 바로 이동권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에서 쇠사슬과 사다리로 목을 걸고 절규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는 모습들은 여전합니다. 장애인들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편의시설도 문제이지만 장애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장애인의 52. 3%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입니다. 요즘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정부는 의무교육제도를 통해서 장애인도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 해 놓았지만 장애인들이 학교를 가려고 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마음 놓고 교실을 오가며 수업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조성 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저학력의 악순환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단순히 인간답게 사는 교양의 수준이 아닙니다. 학력은 사회 계층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하고 때론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회가 주어지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저학력은 최소한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매김도 보장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문에 장애인은 장애와 경제력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매시간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이라크전쟁, 팔레스타인 사태 등의 소식은 바로 장애인의 양산을 뜻하고 있습니다.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 즉 사고로 인한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쟁으로 무참히 죽어가거나 다친 그들은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참혹한 죽음과 함께 장애인을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사고로 인한 장애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매일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장애인을 특수 집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측면에서 전 국민이 함께하는 사회를 위한 인식의 전환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 입니다. 그래야 정말 장애인들도 참여하는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선거 때마다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어려운 분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어떠냐에 따라 표수가 좌우되곤 하는데 우리 나라는 유권자들의 인식도 후보자들의 인식도 아직 장애인을 비롯한 복지정책에 관심이 없는 관계로 공약이 주로 경제논리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2004년 장애인주일을 맞으며 한국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해 각성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왔고 장애를 도구화 했습니다. 장애인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설 수 있는 자리를 박탈했습니다. 때문에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했고 장애인들에게도 스스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애인을 동등한 사람, 똑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당당한 자연인으로 장애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는 한 손 마른 사람을 보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사람을 고치면 자신이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해방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당장 손마른 것을 고치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 지나서 고칠 수도 있는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장애인은 평생동안 고통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소망하는 한 가지 소원 그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예수는 어려운 모함을 받더라도 살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 9장 41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장애우들도 죄의 문제는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훨씬 적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흉악범들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죄의 질이 매우 고약한 중범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장애인들이 있습니까? 한때 저는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경찰서장이 주는 표창장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다 신체가 건강하고 나이가 젊고 외형적으로 보아서 아무 장애를 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 흉악범이 되었지, 휠체어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중범자 되는 것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실정에 장애인이 범죄자가 되는 것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죄를 지을 가능성에 있어서 그것이 매우 적은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장애우 목회를 하신 목사님들의 말씀이 그들의 범죄율은 비장애인들보다 훨씬 적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하신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장애인들 같이만 착하게 살면 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답니다.
십수 년 전에 미국 교육계에 큰 화젯거리가 미국 국민의 화젯거리로 등장을 했습니다. Harvard 대학의 교수였던 헨리 나우엔 박사께서 갑자기 그 교수직을 사임하셨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그가 책을 출판했다 하면 그 책이 무조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책 20 여권이 모두 그랬습니다. 어려서부터는 천재 신동이라는 그런 이름으로 자라났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가장 인기 높은 그런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그 교수직을 갑자기 초개같이 내버리고 무엇을 했느냐? 장애인 집단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데이브 브레이크 복지원이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하는 일이 뭐냐? 정신지체인들 뒷바라지하는데 그들이 변을 보면 치워주고 방 청소해주고 목욕시켜주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매스컴들이 온통 기사화 했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얼마나 많이 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했겠습니까? 왜 이렇게 했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이들을 도와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이들과 같이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보려고 왔습니다. " 그렇게 말해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와서 함께 살면서 좀 배우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관심이 가장 많이 갔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신지체 아니면 육체적 장애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면 이 장애인 주일이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주의할 것이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상적,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 그것이 장애인을 향한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우들은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영적으로 유익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우리 장애우들을 보신대로 장애우들이 큰 소리를 치고 교만스럽게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은 약점이 생기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나타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바울은 이 찌르는 가시만 없었다면 사실 무한히 교만하여질 가능성이 많다고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가시로 인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바울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큰 인물들을 보시면 결정적 아픔의 가시 하나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어야지 들추어낼수록 온갖 추한 것이 드러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던 날,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에게 결정적 가시 하나를 주죠?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가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을 때 아들 요셉을 앉혀놓고 자신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시 부분이었던 그 환도뼈에 아들의 손을 대게하고 맹세를 시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가시가, 이 장애가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은 겸손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말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말더듬이 언어 장애인입니다.
베드로는 성격 결함이 있습니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고 다혈질적 반응을 보입니다.
삭개오는 신체장애인, 난쟁이입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이것만 좀 빼버렸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평생 나를 찌르는구나!' 다 가지고 살게 마련입니다.
가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는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빼려 하지 말고 품어야 합니다. 여기 가시는 장애라고 바꾸어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장애인들은 감사를 더 많이 하고 살아감이 분명합니다. 장애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눈물납니다. 장애인들은 몇 발작을 걷는 것만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 동안 사고 없이 자기 주변이 지나간 것에 대해서만도 잠자리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자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많은 일중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까? 신비한 기적을 통해서 권력자가 되려고 하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하여 예수는 그 대가로 칭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셨는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역의 상당부분을 장애를 해방시키는 일에 힘을 쏟으셨던 것입니다.. 치유사역은 회복을 상징합니다. 슬픔도 눈물도 없는 기쁨과 웃음만 있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영혼을 천하보다 사랑한다고 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먼저 장애인들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장애인이 많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없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면 당연히 교인의 10%도 장애인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교회에는 장애인들이 잘 안보이는 걸까요? 바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에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언덕이 가파르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오셔서 예배드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나마 진잠에는 휠체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는 교회가 우리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화장실도 하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출입이 안되는 구조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점자성경·자료, 수화통역 등 필요한 내용들을 장애인이 있건 없건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각 부서와 조직에도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의 제도를 정책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교회 안에 함께하는 모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편의시설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동들에게도 필요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장애인을 오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해야 할 동등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지 결코 '구제의 대상'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배우고 그들도 우리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건강하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차별당하는 일 없이 서로의 약한 부분을 세워주며 협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장애우들의 장애 원인이 선천적 요인보다 후천적 요인이 훨씬 많다는데, 그렇다고 할 때 우리 모두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인 것입니다.
이 사회가 지금 서비스 경쟁입니다. 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서비스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다 왕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비스가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교인들도 교회에 와서 대접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희생할 것 찾으러 와야 합니다. 교회에 올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합니다.
장애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합니다. 세상에서는 더 좋아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남은 가족들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조심하지만 기쁨이 있는 장례식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시더니 이제는 주님 품으로 평안히 가셨구나!' 참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는 슬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 평안의 세계에 가셨으니 참 잘된 일이다!' 하면서 말입니다.
2001년 4월 5일 서울 잠실 야구 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의 시구자는 두 다리가 없어서 철제인공 다리를 만들어 부착한 에덤 킹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어린이였습니다. 신문에는 이렇게 났습니다. “부모도 조국도 버린 장애아를 Robert King씨가 데려가 이렇게 훌륭히 길러주었다!” 그 미국인 Robert King씨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키우다 데리고 와서는 그 경기장에서 공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 분은 외국 어린이 8명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그렇게 길러주고 있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됩니다. 여기 지금 저와 같이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은 다 시각 장애인입니다. 중증이 아닌 것뿐입니다. 사람이 한 60세 넘어가면 누구나 다 치매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치매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뭐, 40만 넘어도 건망증이 조금씩 나타난다고 합니다. 대전역에서 대전역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정상적 아닙니다. 아니, 다리미질 하다가 전화벨 소리 듣고 다리미를 귀에 갖다 대는 사람 정상입니까? 다 치매 환자입니다. 얼마 전 대전에서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선배님들에게 치매에 대한 유우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3회이고 59년생이니까 46살인데 그러니 선배님이라고 해도 아직 50은 안되신 분들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치매 초기는 소변을 보고 자크를 올리지 않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증은 자크를 내리지 않고 소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증은 손주에게 “쉬~” 하면서 자기가 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치매 초기 증세는 4년 전 것은 기억이 나는데 방금 들은 것은 기억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선배님들은 유우머를 잘 못하는 제가 오랫 만에 재미있는 유우머를 했다고 하시면서들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한 선배님이 물어보십니다. “ 조금 전에 한 유우머가 뭐였지?”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배님은 직장에 가셔서 그 유우머를 한 번 사용하시겠다고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박장대소하며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고통받는 자, 버림받는 자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던 장애인들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깨뜨리고 한 인간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소망입니다.
세계적으로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서너 집 건너 한 가정씩 장애인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현실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과연 한국에는 장애인들이 별로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에 사는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72. 5%가 일주일에 닷새도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최근 불거진 장애인들의 주장은 바로 이동권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에서 쇠사슬과 사다리로 목을 걸고 절규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는 모습들은 여전합니다. 장애인들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편의시설도 문제이지만 장애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장애인의 52. 3%가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입니다. 요즘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정부는 의무교육제도를 통해서 장애인도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 해 놓았지만 장애인들이 학교를 가려고 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마음 놓고 교실을 오가며 수업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조성 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저학력의 악순환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단순히 인간답게 사는 교양의 수준이 아닙니다. 학력은 사회 계층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하고 때론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회가 주어지기까지 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저학력은 최소한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매김도 보장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문에 장애인은 장애와 경제력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매시간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이라크전쟁, 팔레스타인 사태 등의 소식은 바로 장애인의 양산을 뜻하고 있습니다.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 즉 사고로 인한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쟁으로 무참히 죽어가거나 다친 그들은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참혹한 죽음과 함께 장애인을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사고로 인한 장애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매일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장애인을 특수 집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의 측면에서 전 국민이 함께하는 사회를 위한 인식의 전환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 입니다. 그래야 정말 장애인들도 참여하는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선거 때마다 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어려운 분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어떠냐에 따라 표수가 좌우되곤 하는데 우리 나라는 유권자들의 인식도 후보자들의 인식도 아직 장애인을 비롯한 복지정책에 관심이 없는 관계로 공약이 주로 경제논리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2004년 장애인주일을 맞으며 한국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해 각성해야 합니다.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왔고 장애를 도구화 했습니다. 장애인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설 수 있는 자리를 박탈했습니다. 때문에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했고 장애인들에게도 스스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애인을 동등한 사람, 똑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당당한 자연인으로 장애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는 한 손 마른 사람을 보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사람을 고치면 자신이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해방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당장 손마른 것을 고치지 않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 지나서 고칠 수도 있는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장애인은 평생동안 고통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소망하는 한 가지 소원 그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예수는 어려운 모함을 받더라도 살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 9장 41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장애우들도 죄의 문제는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훨씬 적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흉악범들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죄의 질이 매우 고약한 중범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장애인들이 있습니까? 한때 저는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경찰서장이 주는 표창장도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다 신체가 건강하고 나이가 젊고 외형적으로 보아서 아무 장애를 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 흉악범이 되었지, 휠체어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중범자 되는 것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실정에 장애인이 범죄자가 되는 것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죄를 지을 가능성에 있어서 그것이 매우 적은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장애우 목회를 하신 목사님들의 말씀이 그들의 범죄율은 비장애인들보다 훨씬 적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하신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장애인들 같이만 착하게 살면 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답니다.
십수 년 전에 미국 교육계에 큰 화젯거리가 미국 국민의 화젯거리로 등장을 했습니다. Harvard 대학의 교수였던 헨리 나우엔 박사께서 갑자기 그 교수직을 사임하셨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그가 책을 출판했다 하면 그 책이 무조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책 20 여권이 모두 그랬습니다. 어려서부터는 천재 신동이라는 그런 이름으로 자라났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가장 인기 높은 그런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그 교수직을 갑자기 초개같이 내버리고 무엇을 했느냐? 장애인 집단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데이브 브레이크 복지원이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하는 일이 뭐냐? 정신지체인들 뒷바라지하는데 그들이 변을 보면 치워주고 방 청소해주고 목욕시켜주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매스컴들이 온통 기사화 했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얼마나 많이 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했겠습니까? 왜 이렇게 했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이들을 도와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이들과 같이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보려고 왔습니다. " 그렇게 말해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와서 함께 살면서 좀 배우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관심이 가장 많이 갔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신지체 아니면 육체적 장애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면 이 장애인 주일이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주의할 것이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상적,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 그것이 장애인을 향한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우들은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영적으로 유익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우리 장애우들을 보신대로 장애우들이 큰 소리를 치고 교만스럽게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은 약점이 생기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에 나타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바울은 이 찌르는 가시만 없었다면 사실 무한히 교만하여질 가능성이 많다고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가시로 인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바울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큰 인물들을 보시면 결정적 아픔의 가시 하나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어야지 들추어낼수록 온갖 추한 것이 드러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던 날,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에게 결정적 가시 하나를 주죠?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가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을 때 아들 요셉을 앉혀놓고 자신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시 부분이었던 그 환도뼈에 아들의 손을 대게하고 맹세를 시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가시가, 이 장애가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은 겸손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말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말더듬이 언어 장애인입니다.
베드로는 성격 결함이 있습니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고 다혈질적 반응을 보입니다.
삭개오는 신체장애인, 난쟁이입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이것만 좀 빼버렸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평생 나를 찌르는구나!' 다 가지고 살게 마련입니다.
가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는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빼려 하지 말고 품어야 합니다. 여기 가시는 장애라고 바꾸어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장애인들은 감사를 더 많이 하고 살아감이 분명합니다. 장애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눈물납니다. 장애인들은 몇 발작을 걷는 것만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 동안 사고 없이 자기 주변이 지나간 것에 대해서만도 잠자리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자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많은 일중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까? 신비한 기적을 통해서 권력자가 되려고 하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하여 예수는 그 대가로 칭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셨는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역의 상당부분을 장애를 해방시키는 일에 힘을 쏟으셨던 것입니다.. 치유사역은 회복을 상징합니다. 슬픔도 눈물도 없는 기쁨과 웃음만 있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영혼을 천하보다 사랑한다고 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먼저 장애인들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장애인이 많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없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면 당연히 교인의 10%도 장애인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교회에는 장애인들이 잘 안보이는 걸까요? 바로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에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언덕이 가파르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오셔서 예배드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나마 진잠에는 휠체어를 타고 출입할 수 있는 교회가 우리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화장실도 하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출입이 안되는 구조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이 없습니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점자성경·자료, 수화통역 등 필요한 내용들을 장애인이 있건 없건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각 부서와 조직에도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의 제도를 정책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교회 안에 함께하는 모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편의시설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동들에게도 필요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장애인을 오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해야 할 동등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지 결코 '구제의 대상'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배우고 그들도 우리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건강하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차별당하는 일 없이 서로의 약한 부분을 세워주며 협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장애우들의 장애 원인이 선천적 요인보다 후천적 요인이 훨씬 많다는데, 그렇다고 할 때 우리 모두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인 것입니다.
이 사회가 지금 서비스 경쟁입니다. 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서비스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다 왕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비스가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교인들도 교회에 와서 대접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희생할 것 찾으러 와야 합니다. 교회에 올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합니다.
장애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합니다. 세상에서는 더 좋아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남은 가족들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조심하지만 기쁨이 있는 장례식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시더니 이제는 주님 품으로 평안히 가셨구나!' 참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는 슬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 평안의 세계에 가셨으니 참 잘된 일이다!' 하면서 말입니다.
2001년 4월 5일 서울 잠실 야구 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의 시구자는 두 다리가 없어서 철제인공 다리를 만들어 부착한 에덤 킹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어린이였습니다. 신문에는 이렇게 났습니다. “부모도 조국도 버린 장애아를 Robert King씨가 데려가 이렇게 훌륭히 길러주었다!” 그 미국인 Robert King씨는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키우다 데리고 와서는 그 경기장에서 공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 분은 외국 어린이 8명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그렇게 길러주고 있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됩니다. 여기 지금 저와 같이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은 다 시각 장애인입니다. 중증이 아닌 것뿐입니다. 사람이 한 60세 넘어가면 누구나 다 치매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치매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뭐, 40만 넘어도 건망증이 조금씩 나타난다고 합니다. 대전역에서 대전역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정상적 아닙니다. 아니, 다리미질 하다가 전화벨 소리 듣고 다리미를 귀에 갖다 대는 사람 정상입니까? 다 치매 환자입니다. 얼마 전 대전에서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선배님들에게 치매에 대한 유우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3회이고 59년생이니까 46살인데 그러니 선배님이라고 해도 아직 50은 안되신 분들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치매 초기는 소변을 보고 자크를 올리지 않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증은 자크를 내리지 않고 소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증은 손주에게 “쉬~” 하면서 자기가 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치매 초기 증세는 4년 전 것은 기억이 나는데 방금 들은 것은 기억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선배님들은 유우머를 잘 못하는 제가 오랫 만에 재미있는 유우머를 했다고 하시면서들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한 선배님이 물어보십니다. “ 조금 전에 한 유우머가 뭐였지?”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배님은 직장에 가셔서 그 유우머를 한 번 사용하시겠다고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박장대소하며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고통받는 자, 버림받는 자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던 장애인들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와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깨뜨리고 한 인간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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