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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남은 자 7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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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파멸을 받게 되는가, 하는 우려를 갖게 했 으나 그렇지도 않다.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예를 든다. 엘리야가 자기의 고통을 말하였으 나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이라고 했다. 바울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아직은 소망이 있다고 말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인 것이니 바울의 은혜론에 기대를 걸어본 다.
1. 아브라함의 자손 모두가 버림을 받았다면 바울은 누구인가? (11:1) 바울은 자기가 순수 이스라엘이요 베냐민지파임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씨중에 바울이 있다. 바울의 민족이 구원을 받느냐, 버림을 받느냐는 이로써 성립이 안된 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출발을 본다. 저가 셈족의 후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민족을 돌보시고, 지키시기를 원하실 때 아브라함을 통하여 은혜의 길이 열린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말할 때는 바울, 바울보다는 예수의 12제자 는 물론 예수 자신이 다윗의 후손으로써 이스라엘 순수 혈통이니 이 스라엘이 버림을 받는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의 이름으로 실패 했 으니 민족 우월시대는 끝이 났으며 민족 중심의 구원 독, "집단구원" 이라는 뜻은 좌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저희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 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기에 바울의 로마서 10장이 성립되지만, 행위중 심 시대가 끝난 예수의 구원시대는 은혜의 기준에서 구원을 받게 되니 민족이니 혈통은 문제되지 않는다.
2. 남은 자 7천 사상은 무엇을 뜻하는가?(11:2-5) 엘리야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인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엘리야 혼자 남아 있었던 것은 당시로써는 사 실이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천이 있다고 하시 므로 엘리야의 우월감에 쐐기를 박으신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엘리야가 분명 승리자요 여호와 하나님 백성으로써 지조를 지켰으나 그것은 (혼자 남았다는 생각은) 엘리야가 실패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7천이 있다. 고 하신 말씀을 엘리야는 어떻게 들었을까? 엘리야가 갈멜산 싸움 이후에 로뎀나무 밑에서 좌절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엘리야는 "남은 자 7천" 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 곧, 은혜의 세계를 모두 알았다면 그가 그토록 처참한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은혜의 길은 행위 선택이 아니다(11:6-10) 엘리야가 누리던 민족 우월 정신은 구약정신의 중심이 아니다. 구약시대의 출발이라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성취한 사람 이었지 아브함의 행위가 선택되거나 의로 인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할례의 표적을 차츰 혼돈하여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고 심판은 행위 중심이 아니다. 만약 행위로서 구원이 성립된다면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그 어느 누 구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 사실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바울이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요 예수의 대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의 포악한 성격 광신적 바리새 정신을 보지 않으시고 그 중 심에 선한 욕망이 있음을 보신 여호와 하나님은 바울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즉, 은혜로 구원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유효한 이상 이스라엘이 멸망 (집 단 멸망)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웅변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바울의 놀라운 발견이다.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 해석의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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