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는 삶
본문
오래전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한 명문 고등학교에 영어 선생이 부임했습니다.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젊은 삶의 낭만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라틴어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라”는 시를 가르쳐 줍니다. 말하자면 ‘인생은 한번 뿐이다. 현재 젊음을 즐겨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바램 때문에, 혹은 미래의 어떤 성취를 위해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는 자유정신을 고취시켜 준다는 내용입니다. 원래 영문학에서 라틴어 “카르페 디엠”은 중세 기사들이 귀부인들과 즐기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카르페 디엠”은 오늘의 본문 전도서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젊음을 마음껏 즐기라는 것입니다. 젊다는 것을 기뻐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며 모든 것이 헛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경고는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충고로 이어집니다. “기억하라”는 히브리 단어 “자카르”는 “회상하라, 생각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그러나 메멘토 모리, 너는 죽을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인생을 보라는 것입니다. 유한적 존재,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목격한 그러한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신전의식(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자신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가 유혹했을 때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얻고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유혹을 저버린 것은 남들이나 주인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한 삶을 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혹에 대한 그의 반응은 ‘내가 어찌 여호와께 득죄하리까’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감옥에 있던지 바로 앞에 있던지 여호와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셨다고 성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인간은 대부분 타락한 본성대로 따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을 피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가인의 살인이나 모세의 살인도 드러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에서 죄는 이런 행위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생각까지, 그 모든 행위의 동기까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윤리는 참으로 엄격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이슬람에서의 죄나 윤리는 외면적인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적 의식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엄격한 지역에서는 종교경찰이 이런 의식을 준수하는지 감시합니다. 이슬람도 공동체적 종교이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법 파괴는 엄격하게 다스려집니다. 이슬람세계에서 종교와 일반 생활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삶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변에서 무슬림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은 종교인으로서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을 보면 의아해 합니다. 그들의 판단은 외적 행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이 몰려온다는 긴장의 분위가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데오 의식으로 개인의 영성이 건강하고 공동체가 건강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단이나 타종교 등에 대한 기독교의 지나친 염려나 두려움은 그만큼 기독교 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둘째, 충만한 시간(카이로스)을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간은 충만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시간(크로노스)을 충만한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인생은 외롭고 희망이 없습니다. 일상의 시간은 지루하고 덧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은 충만한 시간입니다. 그런 삶에도 아픔과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 귀중하고 매 순간이 영원과 연관된 구원의 시간이 됩니다. 매순간이 귀중한 시간이며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헛됨으로 귀결되는 현재적 쾌락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 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더불어 누리도록, 특히 인간에게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의 오용이 오늘의 환경 파괴, 사회, 도덕적 질서의 파괴, 그리고 개인의 인격 파괴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청년의 때를 즐기는 데 분별력이 없으면 중요한 세월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의 낭비는 눌리는 인생을 초래하지만 세월의 아낌은 인생을 누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번 겨울방학에 농촌 전도를 다녀왔습니다. 농촌인구의 거의가 노령이라 대부분의 어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시간은 지루한 것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하고 화투치고 그 반복적인 삶을 낙으로 삼고 피하려고 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그분들과 사귐의 시간을 갖고 목요일 저녁에는 교회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저녁의 풍성한 상을 같이 대하고 성전에서 말씀과 찬양의 잔치도 베풀었습니다. 모두 얼굴이 환해지고 축복 송과 기도를 한 우리의 손을 잡고 헤어짐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는 몇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다고, 예수를 믿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도 혹은 해외 선교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런 충만한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종말론적 삶입니다.
대학생 찬양단과 국군중앙 교도소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있습니다. 기쁨에 찬 성가대 지휘자였는데,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회심한 이후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를 거의 십년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찬양단으로부터 악보를 얻어 교도소 성가대를 위해 준비하는 그의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감사와 은혜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인생은 감옥생활이 아니라 천국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후 한동안 사형제 폐지와 그 지휘자를 위해 기도했었습니다. 제가 교도소나 청소년 보호소에서 만났던 이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지성. 감정. 그리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잘 통합되지 못하여 그들 안에서 삶에 대한, 현재를 즐기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그들을 세상의 심판대 앞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였더라도 세상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세상에서 죄의 판결을 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삶의 과거에로 회귀가 아니라 태조에 주어진 생명의 숨이 그것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라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종국에는 누구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해명해야 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 세 가지를 유념하여 죄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은 청년의 즐거움의 조건이 됩니다. 청년의 때는 가장 좋은 시절이지만, 삶에 대한 충분한 평가는 처음과 끝 곧 창조주와 죽음의 때를 고려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즐거움을 강조하면서 권면하는 현재의 낙은 개인의 생명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청년 때의 기쁨도 헛되고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이라는 실재와 더불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사람은 겸손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살 것입니다. 저의 한 후배는 선교사로 있던 중 암에 걸려 2년 투병하다가 제작년 가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어린 두 딸을 두고 가기가 마음 아파서 좀 더 삶을 연장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끝자락 무의식 속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감사하다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 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였다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시는 여러분은 마지막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카르페 디엠”은 오늘의 본문 전도서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젊음을 마음껏 즐기라는 것입니다. 젊다는 것을 기뻐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며 모든 것이 헛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경고는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충고로 이어집니다. “기억하라”는 히브리 단어 “자카르”는 “회상하라, 생각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그러나 메멘토 모리, 너는 죽을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인생을 보라는 것입니다. 유한적 존재,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목격한 그러한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신전의식(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자신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가 유혹했을 때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얻고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유혹을 저버린 것은 남들이나 주인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한 삶을 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혹에 대한 그의 반응은 ‘내가 어찌 여호와께 득죄하리까’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감옥에 있던지 바로 앞에 있던지 여호와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셨다고 성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인간은 대부분 타락한 본성대로 따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을 피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가인의 살인이나 모세의 살인도 드러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에서 죄는 이런 행위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생각까지, 그 모든 행위의 동기까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윤리는 참으로 엄격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이슬람에서의 죄나 윤리는 외면적인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적 의식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엄격한 지역에서는 종교경찰이 이런 의식을 준수하는지 감시합니다. 이슬람도 공동체적 종교이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법 파괴는 엄격하게 다스려집니다. 이슬람세계에서 종교와 일반 생활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삶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변에서 무슬림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은 종교인으로서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을 보면 의아해 합니다. 그들의 판단은 외적 행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이 몰려온다는 긴장의 분위가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데오 의식으로 개인의 영성이 건강하고 공동체가 건강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단이나 타종교 등에 대한 기독교의 지나친 염려나 두려움은 그만큼 기독교 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둘째, 충만한 시간(카이로스)을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간은 충만해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시간(크로노스)을 충만한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인생은 외롭고 희망이 없습니다. 일상의 시간은 지루하고 덧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은 충만한 시간입니다. 그런 삶에도 아픔과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의 소망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 귀중하고 매 순간이 영원과 연관된 구원의 시간이 됩니다. 매순간이 귀중한 시간이며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헛됨으로 귀결되는 현재적 쾌락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 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더불어 누리도록, 특히 인간에게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의 오용이 오늘의 환경 파괴, 사회, 도덕적 질서의 파괴, 그리고 개인의 인격 파괴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청년의 때를 즐기는 데 분별력이 없으면 중요한 세월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의 낭비는 눌리는 인생을 초래하지만 세월의 아낌은 인생을 누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번 겨울방학에 농촌 전도를 다녀왔습니다. 농촌인구의 거의가 노령이라 대부분의 어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시간은 지루한 것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하고 화투치고 그 반복적인 삶을 낙으로 삼고 피하려고 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그분들과 사귐의 시간을 갖고 목요일 저녁에는 교회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저녁의 풍성한 상을 같이 대하고 성전에서 말씀과 찬양의 잔치도 베풀었습니다. 모두 얼굴이 환해지고 축복 송과 기도를 한 우리의 손을 잡고 헤어짐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는 몇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다고, 예수를 믿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도 혹은 해외 선교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런 충만한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면서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셋째, 종말론적 삶입니다.
대학생 찬양단과 국군중앙 교도소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있습니다. 기쁨에 찬 성가대 지휘자였는데,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회심한 이후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를 거의 십년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찬양단으로부터 악보를 얻어 교도소 성가대를 위해 준비하는 그의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감사와 은혜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인생은 감옥생활이 아니라 천국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후 한동안 사형제 폐지와 그 지휘자를 위해 기도했었습니다. 제가 교도소나 청소년 보호소에서 만났던 이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지성. 감정. 그리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잘 통합되지 못하여 그들 안에서 삶에 대한, 현재를 즐기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그들을 세상의 심판대 앞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였더라도 세상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세상에서 죄의 판결을 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삶의 과거에로 회귀가 아니라 태조에 주어진 생명의 숨이 그것을 주신 분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라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종국에는 누구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해명해야 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 세 가지를 유념하여 죄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은 청년의 즐거움의 조건이 됩니다. 청년의 때는 가장 좋은 시절이지만, 삶에 대한 충분한 평가는 처음과 끝 곧 창조주와 죽음의 때를 고려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인생의 즐거움을 강조하면서 권면하는 현재의 낙은 개인의 생명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청년 때의 기쁨도 헛되고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이라는 실재와 더불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사람은 겸손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살 것입니다. 저의 한 후배는 선교사로 있던 중 암에 걸려 2년 투병하다가 제작년 가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어린 두 딸을 두고 가기가 마음 아파서 좀 더 삶을 연장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끝자락 무의식 속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감사하다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 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였다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시는 여러분은 마지막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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