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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꿈을 꾸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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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환상 속의 그대”의 가사입니다.
결코 시간이 멈추어 줄 순 없다. 요!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 뿐인데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환상에서 나와야한다.
바로 지금이 그때이고 바로 여기가 그 장소이다.
Present 현재는 Present 선물이기도 합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이런 것 할께요, 나중에 내가 나이 먹어서, 신앙 좋아지면 무엇 무엇을 할께요. 부도날지도 모르는 약속어음을 자꾸 여호와 하나님 앞에 끊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한가하는 것, 지금 여기서의 내 마음의 방향이 이 내 모든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 야곱, 요셉에게 꿈을 주십니다.
“너는 네 친척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정하는 한 장소로 가라… 거기서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새 비젼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개야 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한솔아, 지영아, 본환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 적이 있어요? 없지요. 목사인 내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아요. 이런 성서의 표현방식은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우리 안에서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갈등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받았을 때가 75세입니다.
이미 새 것을 꿈꿀 나이가 아닙니다. 조용히 자기 주변을 정리해야 할 때인데 아브라함의 내면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평생 살면서 이런 이런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들을 단지 하나의 푸념으로만 뭍어두고 내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남은 여생에 새로운 민족 새로운 공동체, 이제까지는 없었던 그 새 민족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되! 그렇지 않다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한 비젼을 주셨겠어? 중요한 것은 지금 시작하는 거야, 내가 완성 못하면 내 자손이 하고 내 자손이 못하면 그 후손이 하지! 지금 누군가 그 일을 시작해야 되,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없는 것이야! 이런 내면의 도전이 들끓었습니다. 그러다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리고 광야로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그 결단의 순간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게 명령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 75세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이전의 삶은 하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다는 것 밖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새민족, 꿈꾸는 민족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75세가 되어 청년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이 형님, 아버지에게 범죄하고 집에서 도망나와 막막한 땅에 돌베게를 베고 누웠습니다. 도망가는 주제에 야곱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야곱으로 하여금 새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펼쳐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꾸는 요셉, 요셉이 다른 형제와 달랐던 것은 꿈을 꾸는데 있습니다. 그 형님들은 양치고 농사하는데는 요셉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자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꿈에 대해서는 형님들이 요셉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항상 미래의 꿈에 자신을 두고 달려갔습니다.
“환상 속에 살지 말라”는 것은 아무런 꿈도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꿈을 가졌다면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꿈에 얼마나 충실한 오늘을, 지금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미래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는 진상이고, 실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미래와 지금의 나의 모습이 전혀 동떨어져 따로 놀 때 그것은 환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노예민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노예였고 그들의 자손도, 그 자손의 자손도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 주저앉지 않고 자기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찾아 이집트를 뛰쳐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입니다.
청년이 왜 변화와 진보의 세력이 됩니까? 그 꿈에 있어서 어떤 전제도 없다. 순수하다
청년은 지식과 경험에서 기성세대보다 못합니다. 그들은 맨손입니다. 별 다른 사회적 위치와 지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그들의 강점입니다 이들은 어느 곳에도 매임 없이 공정하고 자유롭게 이 사회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수해야 할 것이 별로 없기에 아주 공정한 입장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행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청년이 거꾸로 아무것도 없기에 작은 유혹에도 굴할 수 있고 쉽게 길들여 질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때 역사진보의 첨병 같이 행하다가 직장을 갖고 사회에 편입되면서 아주 돌변해서, 너무 쉽게 보수화 되어가는 많은 젊은이들을 보아왔습니다.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이고 빌을 일은 등불입니다. 청년이 이렇게 길들여 질 때 그 사회와 역사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청년이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진취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합니다. 청년은 변화 앞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청년은 비록 나이가 젊어도 그는 이미 청년이 아닙니다. 역으로 나이가 들어도 영원히 청년의 마음을 가진 청년도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교회 변화의 첨단에 서있습니다. 그만큼 청년적인 교회입니다. 강남향린 교회에서 여러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갱신위원회, 분가선교위원회, 담임목사 청빙위원회등 중요한 일이 잇을때 전 교회적으로 대표기구를 구성해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청년을 대표해서 참여한 분들이 이렇게 교회적으로 중요한 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해서 결의 할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했습니다.
청년들이 교회의 중요한 운명을 결정할 각종 위원회에 장로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이 결코 열등한 발언권과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실제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증명됩니다. 대개 한국교회는 청년이 있어도 소모품처럼 취급받기가 쉽상입니다. 그들은 실제 교회내 굳은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도 그들의 의견은 수많은 의사결정 과정을 겪으면서 굴절되고 삭감되거나 무시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교회의 주인으로 행세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됩니다.
젊은 사람, 청년들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진취적이라 하더라도 제 자신의 경험과 문화는 역시 50대입니다. 20대 30대 청년의 마음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열린 50대입니다. 제 문화나 입장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롭고 진취적인 요구가 있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얼마든지 주도권을 쥐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부서도 만들고, 청년예배도 드리고, 교회 안에 작은 교회로 청년교회도 하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여러분의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꿈도 꾸고, 목사님 이거 해도 돼요? 안 돼요? 눈치보고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가 교회도 찢어서 나누는 판에 무엇인들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나쁜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기상천외한 발상들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우리 교회가 예수의 뜻을 훌륭하게 나타내는 교회가 되게 할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여러분들에게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청년의 활동, 청년성이 사라지면 우리교회 역시 맛잃은 소금이 됩니다. 교회가 여러분들의 진취적 활동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청년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큰 울타리와 틀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청년들이 자신이 주인임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진취적인 교회의 주인은 가장 진취적이어야 할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청년이 주인의식을 갖지 못하고 나이, 경제력, 사회적 위치, 교회 내 직책 등에 주눅이 들어 점차 주도적 역할을 윗세대에 양도해 나간다면 스스로를 도구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바입니다만 조금씩 우리에게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강남향린 청년 하나가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른들은 서로 좋아서 모이는데, 청년들에게는 그런 구심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향후 청년들 스스로가 주인됨을 자각하고 분발해 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청년기에 또 다른 특징으로 (이건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 입니다만) 책임감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어느 날 불처럼 열심을 내다가 사라져 버릴 때는 무슨 역할을 맡았든지 아랑곳 하지 않고 팽개쳐 버립니다. 제가 매년 보아도 청년신도회 임원이 임명받고 들어올 때 임원이 다르고 임기를 마치고 나갈 때 임원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아예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임원은 물론이고 어느 때는 회장마저도 책임감을 갖지 못합니다. 내가 필요한 한에서 단물을 빨아드리는 한 유용한 신앙이고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발을 끊습니다. 일관성이 결여되고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청년기에 특징이 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의 기분보다 공동체 내에서의 역할과 약속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청년은 힘이 넘칩니다. 그러나 spirit이 뒷받침이 안 되면 무용지물입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청년이 되지 못합니다. 청년기는 가장 공동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때입니다. 각자 가정을 가지면 나와 내가 완전히 마음을 주고받고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적 삶을 경험하기 어렵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용납하고 대변자가 되어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우정의 친구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고집하지 않고 네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나는 없고 주님만 계신 것 가장 숭고한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선 자리에서 꿈을 꾸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새 일을 시작하십시오. 오늘의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 새 꿈을 꾸고 새로운 만남을 갖고, 서로 큰 우정으로 하나가 되는 새 차원의 삶을 만들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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