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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삶의 알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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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에 자취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의 도시락에 있는 삶은 계란과 계란반찬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의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는 책에 보면 자신이 야간상업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양재원이라는 친구와의 우정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의 집에는 장 닭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암탉이 매일 알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친구 명박이가 영양실조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몇 달간 매일 계란 하나씩을 자기 집에서 몰래 가지고 와서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암탉은 두 마리인데 알은 하나밖에 낳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그 친구 부모님에 의해 마침내 진상이 탄로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탄로 나기까지의 몇 달간 ‘날마다 한 개씩 공급받은 계란’은 일생을 통한 최고의 감동적인 영양제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 재원이의 고마운 마음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아니 그는 앞으로도 그의 고마운 마음을 일생동안 새기면서 살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이 명박 대통령이 이런 계란 하나에 담긴 서민들의 애환을 잊지 않고 국민을 섬기며 우리 민족을 선진화된 미래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계란 하나의 도움은 알맹이가 있는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도와준다고 할 때에 입술에만 그치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만 도와준다고 하면서 실제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힘들게 사는구나. ” 하고 말하면서 전해주는 위로의 한 마디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젊은 친구에게 계란 하나는 알맹이가 있는 도움입니다.
 삼월을 시작하면서 1919년 삼일절 기미독립선언을 생각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은 나라를 생각하고 염려했지만 구체적으로 알맹이가 있는 독립운동을 했던 선각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알맹이가 있는 독립운동이 이 나라의 광복을 가져왔습니다. 헌신은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면 한평생을 어부로 살았던 노인이 바다에 나가서 대어를 잡아서 악전고투 끝에 그 고기를 항구로 끌고 오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 고기의 뼈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수고했지만 그 결과는 알맹이는 없이 빈껍데기만 거두었을 때 노인의 마음은 허전했고 낙심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말씀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서 날마다 연락하면서 살았지만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지만 아브라함 품에 안기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나사로의 삶은 알맹이 있었고 부자는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육적, 정신적, 영적, 삶의 영역에 알맹이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삶의 알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먼저 삶의 알맹이를 얻고자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면 삶의 알맹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며 재물을 다 소비합니다.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면 안정감이 없습니다. 향락을 추구하는 삶의 결과는 궁핍해지고 말았습니다. 탕자는 열심히 보이는 세계를 추구했지만 그 는 삶의 알맹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처음에 세상을 바라보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갖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어요.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어요. 둘째로 아들이 대로 잘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는 마약중독, 쇼핑중독, 섹스중독, 도박중독, 알콜중독, 니코친 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추구했지만 결과로는 세상의 것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다 잃어버렸습니다. 성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 삶의 알맹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6장 말씀을 보면 홍수의 심판으로 물에 빠져 멸망하는 사람들과 구원받은 노아의 8식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들의 초점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아내를 삼았다는 것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가정의 시작입니다. 자녀의 출산과 교육은 결혼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결혼관계의 기준은 외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도외시 한 채로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고 최종적으로는 죄의 결과로 그들은 홍수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노아와 8식구는 오랜 시간 동안 방주를 지었고 그 예비된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삶을 보면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의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갈등관계에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가식세계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보와 포기의 미덕을 발휘합니다. 왜 이것이 가능합니까? 아브라함이 내면적인 보이지 않는 은밀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물과 목초지가 넉넉한 요단 뜰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타락한 백성인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사는 곳입니다. 은밀을 추구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고 그 는 행복했고 물질의 부도 누렸지만 롯의 소유는 한 줌의 재만 남았습니다.
 삶의 알갱이가 있으려면 삶의 중심을 하늘 아버지께 두어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나에게 두면 삶의 알맹이는 없다. 둘째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는 없었고 자기만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생각은 관심 밖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원함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심을 두면서 생활했습니다. 그 결과는 돼지를 치게 되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넉넉히 먹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여인은 삶의 중심을 하늘 아버지께 두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삶의 중심을 두었다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여인은 자신들에게 삶의 중심을 두었습니다. 이 결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입니다.
 사무엘상 25장을 보면 나발은 거부였지만 삶의 초점을 자기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유랑생활을 하던 다윗부대가 자신의 재산을 잘 보호해주었지만 그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다윗부대가 궁핍해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도 다윗에게 모욕을 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아비가일은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래서 도망병신세로 살고 있는 다윗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나라를 세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중심을 내게 아니라 주님께 두게 되면 우리는 신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면 자신의 탐욕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감사도 없어지고 온갖 원망만이 지배합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 두었던 나발은 다윗이 복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서 몸이 굳어져 죽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했고 병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부인과는 결혼한 지 13년 만에 사별했고 재혼했는데 모두 20명의 자녀를 길렀는데 그 중에 10명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실명을 해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도 삶의 중심에 늘 예수님을 두었고 작곡을 시작 할 때에 공란에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 도와주소서 하고 기록했습니다. 작곡을 마칠 때에는 S. D. G(Soli Deo Gloria)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분이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입니다. 그는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영혼의 소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도 그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어 행복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나에게 두면 기도시간도 아깝고요 찬송도 싫고 말씀도 멀리하고 봉헌하려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면 기도시간이 행복하고, 찬송시간이 즐겁고 말씀이 송이꿀보다 달아요, 봉헌할 때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기를 권면드립니다. 아멘.
 하늘 아버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삶의 알맹이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을 때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남은 자존감도 상실합니다. 그래서 수치를 무릅쓰고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아버지 앞에 나왔을 때에 좋은 옷을 입고, 가락지가 끼워지고 좋은 신발이 신겨집니다. 품꾼의 하나도 될 수 없는 신세였는데 잃어버렸다가 다시 아들이 되어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멘.
 주님의 사람들은 늘 주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한나는 하늘 아버지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녀를 갖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주님 앞에 나아갔고 그 결과로 아들 사무엘을 가졌고 그 후에 그 아들을 드리려고 주님께 나아갔어요. 주님께 나아가기를 즐겨했던 한나의 생애는 행복했습니다.
 한나의 아들 사무엘도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무엘상 7장을 보면 이스라엘민족이 블레셋의 침입으로 위기 가운데에 있을 때에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합니다. 미스바에 모여서 주님께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고 아스다롯을 섬기면 삶의 알맹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쭉정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고자 나가면 알맹이는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에 알맹이가 있습니다.
 사무엘상8장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합니다. 이 때에 사무엘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신뢰심과 선호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때에도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나아가서 기도했습니다.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싫어한다. ” 종종 믿음의 사람들도 일이 형통하면 주님 앞에 더 나아가고 감사하면서 살다가 일이 어려워지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면 주님께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합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둘째 아들이 훌륭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아버지 집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좋았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실망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늘 아버지와 좋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기도의 말씀이 시편 143편입니다. 5, 6절을 읽습니다. 옛날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모든 행하신 일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베푸셨던 은혜를 생각합니다. 이제 힘을 얻고 손을 주님을 향해서 펴면서 마른 땅이 비를 사모하는 것처럼 주님을 사모합니다. 종종 교우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울 때에 좋았던 때를 마음에 떠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은 나빴던 것만을 기억해요. 그러면 관계는 더 힘들어집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려고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준비하는 일로 짜증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을 하면서 말합니다. “예수님, 동생에게 말씀만 듣지 말고 나를 도와서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권면해주세요. ” 일에만 집중하면 예수님을 놓쳐버립니다.
 예수님은 압력밥솥을 좋아하실까요? 전기밥솥을 좋아하실까요? 전기밥솥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목사가 심방을 왔는데 식사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따뜻한 밤을 대접하려고 예배가 시작될 무렵에 밥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신경이 전기밥솥에 가 있습니다. 전기밥솥은 식식거리면 가서 불을 조절해주어야 합니다. 목사의 신경은 언제 압력밥솥이 식식거릴까에 신경이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기밥솥은 식식거리지 않고 지가 알아서 밥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배를 방해하는 압력밥솥보다 예배를 돕는 전기밥솥을 좋아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착한 사람이어서 예수님 오기 전에는 열심히 마르다와 함께 손님접대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손님이 오면 그 때부터는 손님과 교제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면 손님에게는 부담이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래 전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 중에 데이비 레베키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의 왼손 투수였습니다. 그는 아주 탁월한 선수였기에 그 팀의 에이스였습니다. 시즌 중에 왼팔에 통증이 왔지만 꿈 참고 던져서 그 해에 팀이 우승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암이었습니다. 시기를 놓쳐서 악은 악화되었고 대수술을 해서 왼팔 근육의 50%를 잘라내는 대수술이었습니다.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절망하지 않고 재활훈련에 성공해서 2년 후에 다시 왼손투수로 에이스가 되었고 이 선수의 활동으로 팀이 우승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팔에 감염이 되어 팔을 잘라내었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말했습니다. “아무도 인생이 멋진 것이라고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눈을 들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잘라져 나갈 왼팔을 바라보면서 절망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붙들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이후 그는 오른손을 다시 연습해서 오른손 투수로 다시 한 번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외팔이 잘린 채로 선수생활을 은퇴했습니다. 그는 불행하지 않았고 컴백이라는 자서전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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