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온 자유인들
본문
우리나라는 1905년(광무 9년) 11월 17일 일본의 협박에 의하여 ‘을사보호조약’(또는 ‘을사5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국권을 찬탈당하고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국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된다.
이때 조선의 8대신(大臣) 중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3명이 이를 반대하였고, 나머지 5명은 찬성을 하였으니,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다. 이들을 을사조약을 찬성한 ‘을사5적’(乙巳5賊)이라 부른다.
이렇게 국권을 빼앗긴 사실이 11월 20일 「황성신문」에 보도되었고, 당시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실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국내에서 갖은 잔혹한 행위를 하면서도, 세계 언론에는 “한국 민족은 미개하고 열등한 민족이어서
일본이 도와주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자립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명분을 얻기 위하여 조선 황실의 세자인 영친왕을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
저들의 황족인 나시모또 요시꼬(이방자)와 강제로 결혼시켜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으로 파리로 끌고 가서
세계 열강에게 구경을 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고종 황제를 기미년(1919년) 1월 22일 독약으로 시해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우리의 선조들은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 이와 같은 일본의 만행이 계속되는 동안, 1918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항의 조약 중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발표되자 이를 기회로
국내에서 독립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인 16명과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드디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 3. 1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의 활화산을 형성한 사건이다. 삼일정신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4. 19의거를 거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냉혹한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꽃을 피웠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마침내 1987년 민주화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민족주의적, 반(反)제국주의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 내지 반(半)지배를 받고 있던 세계의 여러 약소국에 큰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같은 해 일어난 중국의 5. 4운동을 비롯해서 인도의 ‘사탸그라하 운동’ 및 베트남의 독립운동 등이
모두 3. 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오늘은 삼일절 81주년 기념일이다.
역사학자들은 100년 전 조선의 상황과 오늘의 한국 상황이 유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언제보다도
삼일정신의 계승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삼일운동의 어떤 정신을 계승하여야 할까?
오늘 삼일절 81주년을 맞아 우리의 역사를 보고, 성경의 말씀을 보고, 현실을 보며, 말씀 속에서 삼일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삼일운동에서 계승할 것은
첫째, ‘생존권을 위한 민중의 저항정신’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여 식민지로 삼아 백성의 자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당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지 않은 점을 틈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땅을 빼앗았고,
농업수탈을 위한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1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 지으면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빼앗아 갔으며, 젊은이들을 전쟁에 총알받이로 보내고, 또 어른들은 징용으로 끌어다가 북해도를 비롯하여
사할린 등지로 보내어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 그때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은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도 많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을 공장에서 돈 벌게 해 준다는
빌미로 끌어다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군대의 위안부로 삼았다.
그러나 이 시절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당시 나라의 위정자들은 나라의 백성을 살리는 길은 오히려 국권을 넘기는 일이라
판단하여 국권을 넘겼지만, 역사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심판하였다.
그들은 결국 나라를 판 그 공헌으로 일제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 영화를 누렸고, 막대한 토지를 포상으로
받아 지금까지도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친일 지식인은 어떠했나?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이 나라를 개화하고 개발하는 길이라 여겨 친일했다고 항변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는 그들을 ‘부일협력자’로 심판하였다.
오히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선각자 등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올바른 예언으로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절).
그 내용은 놀랍게도 당시의 위정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패망이었다.
그것도 도성과 왕궁이 헐리는 참혹한 광경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4-5절).
나라가 망하면 그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백성들이다.
위정자들은 나라의 안위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영화를 위해 변절하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이런 교훈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진실로 나타난다.
성경은 이런 현실 속에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을 선포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8-19, 21).
희년이란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것으로 그날이 되면 빚으로 빼앗긴 땅을 되돌려 받고,
빚을 탕감받으며, 노예가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소망이다.
이스라엘은 그날이 곧 메시아의 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예수는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민중들의 소망을 오늘 이 자리에 연결하고 계신 것이다.
삼일절 81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가 계승할 삼일정신은 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저항정신이다.
둘째, 우리가 계승할 삼일정신은 ‘기독교의 역사참여 정신’이다.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쓰러져 가는 이 땅의 역사에 참여해 왔다.
구한말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해 반봉건정신을 가르쳤고, 쓰러져 가던 나라를 위해 민족정신을
가르쳐 왔다.
일제는 이런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 인사들을 대거 투옥했다.
하지만 삼일운동으로 기독교의 역사참여 정신은 다시 고양되었다.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다만 민족 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평양, 선천, 원산, 신의주 등 12개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에 기독교가 그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 실례를 든다면, 만세운동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곳이 311개 지역이었는데, 기독교가 78개 지역,
천도교가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공동이 42개 지역으로 나타나 기독교가 전체의 25-28%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사람들이 19,000명인데,
그중 기독교인이 3,373명으로 약 17%였는데, 당시 기독교인 수가 전체 인구 2천만 명
가운데 1-1. 5%인 20-30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만큼 대단한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파괴된 교회시설은 예배당이 47동, 일부 파괴가 24동, 손해가 41동이며,
1919년 6월 30일 현재 투옥된 교역자 수가 151명이고 고문으로 죽은 사람이 5명이며,
기독교 학교 2동이 소실되었다.
그 중에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있는 제암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4월 15일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정규 군대가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출입문과 창문을 봉쇄한 후
교회당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으로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29명이 학살을 당하였고 마을이
모두 불탄 이 사건은, 우리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도 악랄한 사건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의 경우, 1920년 10월 14일 17세의 나이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몸이
일곱 토막이 되어 죽어 갔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화학당에 다닐 때 정동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손정도 목사님으로부터 애국신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참여 전통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꽃을 피웠고, 90년대에는 아무도 통일을
말하지 못하던 때에 기독교의 선구적 ‘평화통일운동’ 에서 다시 빛을 발하였다.
셋째, 삼일정신을 오늘에 계승하는 것은 ‘새로운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 나라의 바람직한 미래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여기 주의할 것이 있다.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읽는 것이다.
오늘 성서 본문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혹해한다.
왜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당혹해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5절).
이 엄청난 고통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타락과 우상숭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악은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을 단절시킨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죄악을 로마서는 이렇게 말한다.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썩어짐의 종노릇”(롬 8:20, 21).
말하자면 ‘맘몬’에 정신을 판 죄, 즉 경제지상주의이며 부패를 용인한 죄, 곧 결과중심주의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성공하면 된다’는 도덕적 불감증이 우리의 죄악이며, 이것이 ‘어떻든 잘살게만 해 주면
된다’는 식의 경제지상주의와 결합하여 사회적 죄악을 양산한 것이 우리의 죄이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이 죄악을 고치시며 새로운 소망을 약속하신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6-8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포로기 70년의 정제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련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그 이후에는 반드시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사명은 현재의 절망 속에서 미래의 새 희망을 백성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현재를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움직이시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소망의 성취는 이제 바벨론에서 겪는 백성들의 연단과 정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은 후임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언자의 사명이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을 선언하고 그러나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 22).
오늘 우리는 맘몬에 굴복하고 허무에 굴복하며 부패의 종이 되었지만,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을
고대하고 자유 얻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현재는 고난과 탄식의 연속이다. 신음 속에 살고 있다.
죄가 허무를 만들며, 허무는 정신적인 공허를 만들고, 공허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실존을 상실하고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울부짖음의 실체는 곧 갈망이기 때문이다.
비록 경멸 속에서도 맘몬과 부패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은
새 세계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만들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바로 지금이 그것을 준비하는 때이다.
비록 지금은 죄인이지만 의인의 새 창조, 부활의 영광 속에서 희망에 근거한 희망에 충실하게 살며 다시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소망으로 살아가야 하며 다시 움직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선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며(시 67:4), 억압받는 백성의 호소와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다(출 2:23-25).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거주할 땅을 주어 살아가게 하셨다.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천부적 권리(은혜)이다.
이 권리(은혜)를 무력으로 탈취하거나 팔아 넘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도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경계선을 옮기지 못한다(신 19:14)는 구약 시대부터 주신 계명은 곧 이 땅의 백성의
생존권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형태이든지 백성을 억압하는 무력적 통치를 배격하고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나가시는 분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의 생존권을 수호하시며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폭력과 억압, 착취와 불의를 미워하시며 공평과 정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신다.
새것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기존의 것을 폐하시고 새 시대를 준비하고 계신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다. 그것은 곧 귀를 기울이는 지혜를 갖는 것이다.
‘강도 만난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신음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곧 다시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국권을 찬탈당하고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국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된다.
이때 조선의 8대신(大臣) 중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3명이 이를 반대하였고, 나머지 5명은 찬성을 하였으니,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다. 이들을 을사조약을 찬성한 ‘을사5적’(乙巳5賊)이라 부른다.
이렇게 국권을 빼앗긴 사실이 11월 20일 「황성신문」에 보도되었고, 당시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실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국내에서 갖은 잔혹한 행위를 하면서도, 세계 언론에는 “한국 민족은 미개하고 열등한 민족이어서
일본이 도와주고 가르쳐 주지 않으면 자립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명분을 얻기 위하여 조선 황실의 세자인 영친왕을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
저들의 황족인 나시모또 요시꼬(이방자)와 강제로 결혼시켜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으로 파리로 끌고 가서
세계 열강에게 구경을 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고종 황제를 기미년(1919년) 1월 22일 독약으로 시해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우리의 선조들은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 이와 같은 일본의 만행이 계속되는 동안, 1918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항의 조약 중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발표되자 이를 기회로
국내에서 독립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인 16명과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드디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 3. 1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의 활화산을 형성한 사건이다. 삼일정신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4. 19의거를 거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냉혹한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꽃을 피웠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마침내 1987년 민주화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민족주의적, 반(反)제국주의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 내지 반(半)지배를 받고 있던 세계의 여러 약소국에 큰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같은 해 일어난 중국의 5. 4운동을 비롯해서 인도의 ‘사탸그라하 운동’ 및 베트남의 독립운동 등이
모두 3. 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오늘은 삼일절 81주년 기념일이다.
역사학자들은 100년 전 조선의 상황과 오늘의 한국 상황이 유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언제보다도
삼일정신의 계승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삼일운동의 어떤 정신을 계승하여야 할까?
오늘 삼일절 81주년을 맞아 우리의 역사를 보고, 성경의 말씀을 보고, 현실을 보며, 말씀 속에서 삼일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삼일운동에서 계승할 것은
첫째, ‘생존권을 위한 민중의 저항정신’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여 식민지로 삼아 백성의 자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당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지 않은 점을 틈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땅을 빼앗았고,
농업수탈을 위한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1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 지으면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빼앗아 갔으며, 젊은이들을 전쟁에 총알받이로 보내고, 또 어른들은 징용으로 끌어다가 북해도를 비롯하여
사할린 등지로 보내어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 그때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은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도 많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을 공장에서 돈 벌게 해 준다는
빌미로 끌어다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군대의 위안부로 삼았다.
그러나 이 시절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당시 나라의 위정자들은 나라의 백성을 살리는 길은 오히려 국권을 넘기는 일이라
판단하여 국권을 넘겼지만, 역사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심판하였다.
그들은 결국 나라를 판 그 공헌으로 일제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 영화를 누렸고, 막대한 토지를 포상으로
받아 지금까지도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친일 지식인은 어떠했나?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이 나라를 개화하고 개발하는 길이라 여겨 친일했다고 항변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는 그들을 ‘부일협력자’로 심판하였다.
오히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선각자 등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올바른 예언으로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절).
그 내용은 놀랍게도 당시의 위정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패망이었다.
그것도 도성과 왕궁이 헐리는 참혹한 광경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4-5절).
나라가 망하면 그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백성들이다.
위정자들은 나라의 안위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영화를 위해 변절하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이런 교훈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진실로 나타난다.
성경은 이런 현실 속에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을 선포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8-19, 21).
희년이란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것으로 그날이 되면 빚으로 빼앗긴 땅을 되돌려 받고,
빚을 탕감받으며, 노예가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소망이다.
이스라엘은 그날이 곧 메시아의 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예수는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민중들의 소망을 오늘 이 자리에 연결하고 계신 것이다.
삼일절 81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가 계승할 삼일정신은 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저항정신이다.
둘째, 우리가 계승할 삼일정신은 ‘기독교의 역사참여 정신’이다.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쓰러져 가는 이 땅의 역사에 참여해 왔다.
구한말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해 반봉건정신을 가르쳤고, 쓰러져 가던 나라를 위해 민족정신을
가르쳐 왔다.
일제는 이런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 인사들을 대거 투옥했다.
하지만 삼일운동으로 기독교의 역사참여 정신은 다시 고양되었다.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다만 민족 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평양, 선천, 원산, 신의주 등 12개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에 기독교가 그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 실례를 든다면, 만세운동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곳이 311개 지역이었는데, 기독교가 78개 지역,
천도교가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공동이 42개 지역으로 나타나 기독교가 전체의 25-28%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사람들이 19,000명인데,
그중 기독교인이 3,373명으로 약 17%였는데, 당시 기독교인 수가 전체 인구 2천만 명
가운데 1-1. 5%인 20-30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만큼 대단한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파괴된 교회시설은 예배당이 47동, 일부 파괴가 24동, 손해가 41동이며,
1919년 6월 30일 현재 투옥된 교역자 수가 151명이고 고문으로 죽은 사람이 5명이며,
기독교 학교 2동이 소실되었다.
그 중에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있는 제암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4월 15일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정규 군대가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출입문과 창문을 봉쇄한 후
교회당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으로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29명이 학살을 당하였고 마을이
모두 불탄 이 사건은, 우리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도 악랄한 사건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의 경우, 1920년 10월 14일 17세의 나이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몸이
일곱 토막이 되어 죽어 갔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화학당에 다닐 때 정동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손정도 목사님으로부터 애국신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참여 전통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꽃을 피웠고, 90년대에는 아무도 통일을
말하지 못하던 때에 기독교의 선구적 ‘평화통일운동’ 에서 다시 빛을 발하였다.
셋째, 삼일정신을 오늘에 계승하는 것은 ‘새로운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 나라의 바람직한 미래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여기 주의할 것이 있다.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읽는 것이다.
오늘 성서 본문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혹해한다.
왜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당혹해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5절).
이 엄청난 고통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타락과 우상숭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악은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을 단절시킨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죄악을 로마서는 이렇게 말한다.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썩어짐의 종노릇”(롬 8:20, 21).
말하자면 ‘맘몬’에 정신을 판 죄, 즉 경제지상주의이며 부패를 용인한 죄, 곧 결과중심주의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성공하면 된다’는 도덕적 불감증이 우리의 죄악이며, 이것이 ‘어떻든 잘살게만 해 주면
된다’는 식의 경제지상주의와 결합하여 사회적 죄악을 양산한 것이 우리의 죄이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이 죄악을 고치시며 새로운 소망을 약속하신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6-8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포로기 70년의 정제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시련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그 이후에는 반드시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사명은 현재의 절망 속에서 미래의 새 희망을 백성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현재를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움직이시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소망의 성취는 이제 바벨론에서 겪는 백성들의 연단과 정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은 후임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언자의 사명이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을 선언하고 그러나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 22).
오늘 우리는 맘몬에 굴복하고 허무에 굴복하며 부패의 종이 되었지만,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을
고대하고 자유 얻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현재는 고난과 탄식의 연속이다. 신음 속에 살고 있다.
죄가 허무를 만들며, 허무는 정신적인 공허를 만들고, 공허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실존을 상실하고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울부짖음의 실체는 곧 갈망이기 때문이다.
비록 경멸 속에서도 맘몬과 부패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고통하고 있다는 것은
새 세계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만들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바로 지금이 그것을 준비하는 때이다.
비록 지금은 죄인이지만 의인의 새 창조, 부활의 영광 속에서 희망에 근거한 희망에 충실하게 살며 다시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소망으로 살아가야 하며 다시 움직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선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며(시 67:4), 억압받는 백성의 호소와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다(출 2:23-25).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거주할 땅을 주어 살아가게 하셨다.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천부적 권리(은혜)이다.
이 권리(은혜)를 무력으로 탈취하거나 팔아 넘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도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경계선을 옮기지 못한다(신 19:14)는 구약 시대부터 주신 계명은 곧 이 땅의 백성의
생존권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형태이든지 백성을 억압하는 무력적 통치를 배격하고 자유와 평화를 지켜 나가시는 분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의 생존권을 수호하시며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폭력과 억압, 착취와 불의를 미워하시며 공평과 정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신다.
새것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기존의 것을 폐하시고 새 시대를 준비하고 계신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다. 그것은 곧 귀를 기울이는 지혜를 갖는 것이다.
‘강도 만난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신음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곧 다시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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