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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 창2:20-25, 행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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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 창2:20-25, 행 18:1-4




어느 심리학자가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배우자에 대해서 거는 꿈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른바 신데렐라의 꿈이고, 또 하나는 온달의 꿈입니다.


여자 편에서 가지는 신데렐라의 꿈은 백마를 탄 왕자님이 번쩍거리는 유리 구두를 들고서 자기를 곧 찾아와 줄 것을 기대하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꿈입니다.


남자 편에서 가지는 온달의 꿈은 현재의 자신이 보잘것없지만, 평강 공주 같은 유능한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를 통해 자신이 훌륭한 인물인 되는 꿈입니다. 이 두 가지의 꿈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상대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꿈꾸는 거야 누가 말릴 수 없는 것이지만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면 이런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 본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지어서 부부로 삼아주신 것은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배필이 되라고 우리를 짝지어주신 것은 아니라, 서로 간에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십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름다운 신앙 부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는,


1.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 된 부부입니다.


구약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에덴이라는 생활의 터전을 만드시고 나서 아담을 지으신 후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과 함께 살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시고 이끄사 결혼하게 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정 제도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 이십니다.


아담은 지음 받은 후에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땅에 충만 하라는 것과 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에덴을 지키고 다스리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땅에 충만하려면 자녀를 생산하여야 하는데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땅을 지키고 다스리는 일도 혼자서는 벅찬 일입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지으시고, 가정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당연한 일을 외면하고 주를 떠나 불신앙으로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사1:2-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떠나 사는 불신앙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무지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마땅히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돕는 배필은 아담과 같은 사람이어야 했고, 아담을 가장 잘 알고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실 때, 아담의 가슴에서 갈빗대를 빼내어 지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몇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재료가 아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본문 창2:23-24에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했습니다. 부부는 한 몸, 한 마음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질서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고전11:8~9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라고 말씀한 것은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5:23에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처럼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남자가 여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남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남자가 홀로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돕는 배필인 여자가 꼭 필요합니다. 갈비뼈가 없으면 남자의 심장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 부분을 여자가 커버 해주지 아니하면 남자는 남자의 역할을 절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도움이 필요하고, 여자는 남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 되기를 소망합니다.


2.피차 사랑과 존중으로 하나 된 부부입니다.


남성들 가운데에는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서 여자를 우습게 여기고 심지어는 무시하고 학대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모습입니다. 또 어느 부부 중에는 집안 형편이 너무 기울어 많이 가진 자 편에서 상대를 무시하고 홀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골에서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해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농산물 이것, 저것 챙겨가지고 서울에 사는 판사 아들 집을 찾았습니다. 며느리도 집을 비우고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판사 아들 덕에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에 촌로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를 구경 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해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 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기에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로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아들 가족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가져온 농산물을 챙겨 도망치듯 다시 시골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막힌 사실을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분을 삭이고 있는데, 판사 아들로부터 왜 안 주무시고 그냥 가셨느냐고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아”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노모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가계부한테 물어봐라 그러면 잘 알 것이다”며 수화기를 내팽개치듯 끊어 버렸습니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고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 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고심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 들어오는가?”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태를 파악하고 온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습니다. 이러 한 일이 있고 난 다음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대가 가난 하다고, 못 배웠다고, 비천 하다고, 여자라고 무시하고 경하게 여기는 것은 부부의 도리가 아닙니다.


질서 상으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지만 남자는 여자 없이 존재와 역할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할 길이 없으니,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협력자요 동역자인 것입니다. 고전11:11~12에 “그러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라고 말씀한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지음 받은 동등한 사람이요 동역자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동등한 배필이라는 뜻도 있고 적절한 배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와주는 자, 구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자가 없이는 남자가 남자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역할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역자요, 동등한 동역자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부가 피차 사랑과 존중으로 하나 되기를 소망합니다.


3.신앙관, 인생관, 삶의 가치관이 하나 된 부부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름다운 신앙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피차 사랑과 존경이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같이 붙어 다닙니다. 바늘과 실처럼, 신약과 구약처럼 언제나 붙어 있습니다. 한 번도 떨어져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욥의 부부도 갈등관계 때문에 떨어져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 성경에 보면 세 번 이사를 다녔습니다. 첫 번 이사는 로마로 간 것입니다. 행18: 1-3에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했습니다. 이 부부가 본토를 떠나 로마로 이사한 이유는 교회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핍박이 심하여 교회에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관이 같은 그들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로마로 이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사는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사한 것입니다(행18:2) 로마에서 글라우디오가 교회를 다시 핍박하게 되니까 다시 고린도로 이사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생명이었습니다. 이상적인 신앙부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개는 사람을 따르고, 고양이는 장소에 집착 하지만 신앙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봉사할 수 있는 교회생활을 중히 여깁니다.


세 번째 이사는 바울을 따라가는 이사였습니다. 행18:18에 보면 브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만난 후 바울을 따라 다녔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명을 위해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서 개척된 교회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인생관, 가치관이 같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 하면서도 갈등이 없었습니다.


부부란 상대가 어떤 결함이 있을지라도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가리어 주어야 합니다. 늘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금술은 좋은 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부모님과 친척들은 헤어지라는 압박을 계속 하였습니다.


둘이는 할 수 없이 그 압력에 의하여 이혼하기로 하고 10년 전 주례자를 찾아가서 상의하였습니다. 주례자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이혼 잔치를 성대하게 하고 아내가 상처 나지 않게 흡족하게 하여주고 아내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들어주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드디어 몇 일 후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혼 잔치였습니다. 남편은 여러 사람 앞에서 그 동안 아내에게 감사하였던 것들을 열거하면서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하시오. 어떤 것이라도 들어 줄 것입니다."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또렷하게 원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원해요." 둘은 다시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았고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 나오는데 그중 네 번이나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당시에 여자는 인구조사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때인데도 성경에는 여섯 번이나 두 부부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남편보다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을 먼저 거명하는 경우가 네 번이나 된다는 것은 아내의 활동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의 이해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의 일을 하도록 배려해주고 격려해 주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와 로마에서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내어놓을 때 이들은 성도들의 음식과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도들을 먹이고 협력하는 데에는 아마 남편보다 아내의 믿음과 활동이 더 컸을 것입니다. 남편인 아굴라는 자신의 아내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며 재산을 사용하는 것을 기꺼이 협력하였습니다. 아내의 사역을 이해하고 뒤치다꺼리를 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 가운데 부부가 함께 주님을 잘 믿고 성령 충만하며 헌신해서 잘 섬기는 그런 부부는 그리 많지 못합니다. 대개는 각각의 믿음입니다. 한쪽이 아예 주님을 안 믿거나 또는 믿는다 해도 한쪽은 그저 아내 따라 또는 남편 따라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경우입니다. 부부가 다 헌신하고 잘 믿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와 복음을 위해 한 마음으로 헌신한 부부는 하나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칭찬과 상급과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가정처럼 신앙관, 인생관, 가치관이 같은 신앙 부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가정의 달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행복한 신앙 부부의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하나 된 부부입니다.


◎.피차 사랑과 존중으로 하나 된 부부입니다.


◎.신앙관, 인생관, 삶의 가치관이 하나 된 부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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