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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국서 활동하며 독립 도운 선교사 제럴딘 피치

최고관리자
2020.07.09 16:52 18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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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만주 침략에서 시작됐다고 보나 사실 일본은 1905년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 이에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서는 1919년 3월 1일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현재 한국인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인 여성 선교사 제럴딘 피치(1892∼1976·사진) 여사가 ‘한국의 독립기념일’이란 제목으로 1940년 3월 1일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피치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1883∼1979)의 아내다. 피치 부부는 이승만 김구 등 독립운동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의 집에 한 달 동안 보호해 준 게 대표적이다.


피치 부부와 이승만의 인연은 이승만이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미주로 귀환하려 할 때 여비를 마련해 주면서 시작됐다. 이 인연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이어진다. 독립을 위해 미국 행정부 요인 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으나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 한계를 느낀 이승만은 미국과 중국에 인맥이 있던 피치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피치 여사는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의 아내 쑹메이링 여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활용해 중국 국민당 정부에 편지를 보내 임시정부를 공식 승인할 것을 요청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내인 엘리너 여사와 접촉해 미 대통령에게 한국의 입장과 상황을 전하려 노력했다.


이와 함께 뉴욕타임스 상하이이브닝포스트 등 미국과 중국의 여러 언론매체에 한국 관련 글을 기고해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약상을 알렸다. 일종의 대미 언론 창구 역할을 한 셈이다. 기고문에서 그는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 공동의 적이며 일본의 행동은 기독교와 민주주의에 큰 장애가 된다는 걸 여러 번 강조했다.


피치 여사는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에 힘을 실어줬지만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이 하나 된 독립운동을 펼치도록 도왔다.


피치 여사와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인정받아 연합국에 합류한 뒤 해방이 되면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그러나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임시정부 승인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피치 여사는 해방 후에도 한국의 여성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국가를 만들도록 도왔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김명섭 교수)는 22일 경기도 부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한·미 관계와 기독교 특별심포지엄’을 갖고 피치 여사의 행적을 조명했다.


이날 ‘태평양전쟁 시기 이승만의 대미 외교활동에 미친 제럴딘 피치의 역할’을 주제로 발제한 박명수 소장은 “피치 여사의 활동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됐다”며 “이번 연구가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피치 여사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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