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천주교의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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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천주교의 비교연구
김명룡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조직신학)
가톨릭 교회(천주교)와 개신교회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서론적으로 여러분이 유념해야 할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개신교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발전된 나라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 자유가 신장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열강들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봐서 가톨릭 국가들은 두세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2류 국가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유럽을 살펴봐도, 아메리카 대륙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멕시코를 비롯해서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많은 국가들이 전부 가톨릭 국가인데 한결같이 북쪽에 있는 미국에 비해서 굉장히 뒤쳐져 있습니다.
왜,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져 있는가?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논문들을 조사해 보면 가톨릭 정신이 개신교 정신에 비해서 상당히 열등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바꿔 말하면 우리 개신교 정신이 가톨릭 정신에 비해서 월등히 우수한 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교는 국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면 가톨릭이 가장 호감을 갖는 종교로 되어 있어요. 반면 우리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나쁩니다. 불교와 개신교가 비슷하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로 많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개선이 아니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위대한 종교에서 그렇지 않은 종교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전부 우리 개신교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얘기를 계속 들으면 저의 서론적인 얘기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와 가톨릭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가톨릭은 7가지 성사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 성찬, 신품, 고백, 견진, 혼인, 종부 이렇게 7가지죠. 가톨릭교회는 이렇게 성사가 중심이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일단 개신교회에도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신품성사라는 것은 신부님이 되는 예식을 얘기하고 혼인성사는 결혼식을 얘기하죠. 그리고 이 신품과 혼인성사는 택일입니다. 고백성사라는 것은 일명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님께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에 의해서 원죄가 사해집니다. 그리고 성찬식을 통해서 또 이런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집니다. 가톨릭의 교리서를 읽어보면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 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가톨릭교회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는 전통이 있어요.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를 일컬어서 대죄라고 하고 소죄는 조금 사소한 것을 의미하죠. 예를 들면 살인, 간음, 이간질, 질투, 미사 불참 이런 것들은 대죄에 해당됩니다. 이런 대죄를 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님에게 가서 고해하는 성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이 신부를 비난하는 경우가 개신교에 비해서 월등히 적어요.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회는 자기 죄를 다 숨겨놓고 목사님을 보고 있기 때문에 한 교회 성도들이 다 목사님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이상하면 그것이 걸려서 목사님들이 대단히 혼이 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하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다 죄를 알죠. 여성들의 경우에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고해하고 나면 한 몇 개월 동안 신부님 얼굴을 뵙기가 어려워서 도망 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신부님이 나타나면 숨어버리고 물론, 신부님이 고해한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봐요.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이 술을 마시고 혹시 실수를 했다고 해도 '어떻게 신부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하고 대들려고 하다가도 신부님이 딱 눈만 크게 뜨고 보고 있으면 전부다 고개가 수그러들게 되어 있죠. 그런데 대죄는 반드시 고해를 해야 해요. 반드시 신부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심이 깊을수록 고해성사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용서가 되지 않으면 구원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가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데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해 사제가 원죄를 사하고, 신부가 원죄를 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미사를 드리며 성찬을 할 때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 죄가 용서되는 순간이죠.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신부를 통해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네 죄를 사하노라' 하는 그 순간에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가 있어요. 중세 때 가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는데, 물론 지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아먹지는 않죠.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신학적인 이론이 변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대단히 교육적인 방법으로 일을 행합니다. 죄를 크게 지은 사람일 경우는 그냥 용서를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 시설 등에 보내서 그곳에서 1주일, 2주일 정도 봉사하게 한 다음 죄를 용서해 줘요. 제가 볼 때는 상당히 교육적인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건강이 나쁘신 분이, 그러나 재력은 있는 분이 고해를 했고 죄가 대단히 중할 때 '당신은 장애인 시설에서 가서 일할 수가 없으니까 대신 장애인 시설을 만들 돈을 헌금하시오'라고 얘기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벌써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는, 중세에 있었던 면죄부 팔아먹는 것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진입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쁜 마음을 먹으면 지금도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있는 이론적인 기초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신부가 직접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견진성사라는 것은 우리 개신교회의 어느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해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입교문답과 약간 닮은 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던 아이들이 장성하게 되면 신부님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는 의식입니다. 뭐냐하면 지금까지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랐지만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죄를 극복하고 마귀와 싸우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거예요. 이 견진성사는 성령의 능력을 주입하는 것이죠. 신부님께서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주입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종부성사라는 것도 있습니다. 요즘은 이것을 종부성사라고 지칭하지 않고 병자성사라고 지칭을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신부님께서 오셔서 눈과 코와 귀와 손과 발에 기름을 부으시고 기도를 해주는 예식인데 이것은 일생토록 눈으로 지은 죄, 귀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손, 발로 지은 죄를 용서하는 예식이에요. 이렇게 기도하면 그 죄가 사해진다는 거예요.
가톨릭은 그 핵심이 성사제도에 있습니다. 죄의 용서에 있어요. 그리고 죄의 용서가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그런 특징이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교회 이론에 의하면 사제가 없으면 참된 의미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사제를 통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18장 9절에서 14절 사이에 보면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그렇게 기도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사제에게 가라고 가르친 적이 없어요.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직접성의 종교라면 가톨릭은 간접성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의 용서를 받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종교임에 비해서, 가톨릭은 철저하게 사제들에 의해서 묶여져 있는 종교예요. 사제가 없으면 죄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가톨릭은 제사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가톨릭이 제사의 종교라는 뜻은 가톨릭은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미사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가톨릭은 원래 설교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 제사의 핵심은 뭔가 하면 죄의 용서에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의 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에요. 그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에 잘 참석하고 있다가도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에 어떻게 하다가 빠졌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미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그 순간입니다. 떡을 받아먹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죄용서가 그 때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미사를 드리는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죄의 용서에 있어요.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한 번 생각을 해 봐요. 가톨릭교회 성도들이 우리 개신교 성도들에 비해서 조금 개화가 덜 된 특징들이 있어요. 지나간 450년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 개신교 성도들이 대단히 진취적이고 개화된 정신, 앞서 나가는 정신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하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거예요. 루터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모든 평신도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마주쳐야 한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경을 직접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번역해서 평신도들에게 주었어요.
가톨릭교회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오랫동안 성경을 번역하는 성서공회를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서 성도들에게 가져다주는 성서공회가 성령의 기관이면 성령의 기관이지 어떻게 마귀들의 집단일 수 있겠어요. 그런데 마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어요.
이렇듯 가톨릭에선 일반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성경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최근에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서 성모 마리아 상이 울었다고 해서 순례객이 몰려들고 난리를 쳤어요.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고. 그 돌로 된 상이 울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에 울었겠습니까? 안 울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은 위험한 분들이에요. 앞으로 사이비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분들이에요. 그 돌이 어떻게 울어요.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연구해 보면 성모 마리아가 울었다는 전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신이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도 종파별로 차이가 있는데 미신이 많은 종파일수록 조금 수준이 낮은 종파에요. 수준이 올라갈수록 미신이 줄어듭니다. 순례객들이 자꾸 몰려드니까 그 지역의 주교께서 '아무래도 확실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눈물을 수거해서 정식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올리브 계통의 야자 기름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누군가 밤에 와서 부어두고 간 거예요. 그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울었다'고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도 이 따위 이상한 미신이 있으면 빨리 척결을 해야 합니다. 이 가톨릭교회의 성도들이 왜 미신에 많이 빠지는가 그리고 왜 일반적으로 개화되지 못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첫째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1주일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 미사를 드리는 순간인데 여러분들 미사에 참석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앉았다 섰다 앉았다 섰다 이거 몇 번 하고 가서 떡 받아먹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개화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개화가 될 시간이 없어요. 요즘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강론한다고 해서 설교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 10분 정도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개신교회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고 성도들을 깨우치고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하고 그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 속에서 결단을 하고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개신교에서 배워간 거예요. 원래 가톨릭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가톨릭교회에 그 시간이 공식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근본적으로 제사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의 종교 아닙니까? 초등학교도 안 나오신 교회 안의 권사님들과 시장에서 콩나물을 팔고 계시는 일자 무식의 할머니하고 두 분을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만큼 달라요. 그 시장에 있는 분은 정말 무식한데, 교회 안의 권사님은 절대 안 무식해요.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정말 대학을 서너 개 나온 정도로 똑똑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육을 많이 받은 거예요. 그 긴 세월 동안 목사님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교육을 받았는지 몰라요. 교회교육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일 낮, 저녁, 수요일, 새벽, 구역예배, 부흥회, 신앙강좌, 하여간 1년 간 교육받는 시간을 따져보면 대학에서 20학점 따는 것만큼 교육을 받습니다. 그것을 평생하셨으니 얼마나 개화가 되었겠어요. 물론 가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긴 있는데, 그 말을 많이 하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머리에 든 게 없으면 말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머리 안에 뭔가 들었기 때문에 자꾸 뭔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그만큼 개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히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힌 그 사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못하고 주일날 미사에 참여해서 앉았다 섰다 하고 온 사람하고 똑같겠어요, 다르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톨릭 국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부딪혔던 개신교 국가하고 얼마나 더 발전을 하겠느냐 그 말이에요. 이것은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에요.
지난 450년의 역사는 개신교 국가들이 한결같이 세계의 제일 가는 국가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뒤늦게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중요한 것들을 배워서 고쳐 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되요.
두 번째로 중요한 측면은 마리아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섬기는 것인가?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그래요.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마리아론, 즉 현재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교리서를 통해 직접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론의 핵심을 정리하면 5가지 정도가 되요. 첫째,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둘째,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다섯째,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재성입니다.
첫째 주장을 살펴보죠.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을까요? 가톨릭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 보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여'로 시작하고 있어요.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여기에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의 말씀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두고 한 말씀이죠.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난 예수님의 형제들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남자 형제만 네 분이 있어요. 그리고 그 누이들이, 이렇게 복수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여자 동생이 최소한 두 분 이상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절대로 평생 동정녀가 아니에요. 마리아에게는 자식이 많았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생시키실 때만 동정녀라고 생각을 합니다. 계속 동정녀가 아니에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성경에서 이렇게 명백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라고, 평생 요셉과는 아무런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 나오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동생들은 어떻게 되느냐? 사촌이라는 거예요. 이종사촌, 고종사촌. 가톨릭이 공식적으로 그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이 본문은 초등학교 3학년이 봐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난 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그렇게 우기는 거예요.
교황께서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셨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하는데 가톨릭교회는 최근에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허락했어요. 그래서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까지는 긍정적으로 발전을 했지만, 아직도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을 주지 않았어요. 성경해석의 권한은 전적으로 교회에 속합니다. 이것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도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가 가르친 대로 성경을 읽어야 해요. 그래서 이 본문에서 ' '이 형제들은' 할 때의 이 형제는 '사촌'이다'라고 교황이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사촌이에요. 영원히 사촌입니다. 바꿀 수가 없습니다. 교황이 그분의 보좌에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실 때에 절대적으로 무오한 거예요.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선포했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여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또 하나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경에 오류가 없다,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가톨릭은 '교황께서 하신 말씀은 영원히 오류가 없다.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개신교 정신하고 가톨릭 정신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즉 권위에 대한 문제에 있는 거예요 개신교회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영원토록 이 성경의 말씀에 따라야 된다. 이것이 개신교 정신입니다. 개신교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해도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면 그 가르침은 그날로 고쳐야 되요. 가톨릭의 정신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황의 말씀, 교회가 가르치는 말씀은 영원토록 오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회를 개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톨릭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가능해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교황이 정말 위대한 정신을 가지셔서 '교회를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개혁하자'고 해서 개혁하는 경우에는 교회의 잘못을 고칠 수가 있는데 신학자들이, 성도들이 아무리 '이것은 고쳐야 되겠습니다' 해도 고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교황의 말씀에 오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교황의 말씀 가운데 수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죄악된 인간의 말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개신교의 신자가 된 것을 참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가톨릭은 교회의 이 권위를 근거로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이었다고 가르칩니다.
'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고도 말을 합니다. 원죄가 없었던 분, 자범죄가 없었던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승천하신 분도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교리들이 마리아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라고 주장해요. 정확하게 얘기하면 마리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있어서의 육신의 어머니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잖아요. 이 말의 뜻은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표현하고 있을까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이게 삼단논법치고는 괴상한 삼단논법입니다. 이게 뭐 같으냐 하면 '빨간 티셔츠를 입은 분을 보고 너는 빨간 티셔츠를 입었구나, 공산주의는 빨갛다. 그러니 너는 공산주의다'라는 것과 비슷한 괴상한 삼단논법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왜 이렇게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말을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이 지상 생활에 있어서만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고, 영원토록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거예요. 영원토록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다 하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기도의 유효성, 마리아의 구원의 중보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요.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리아는 영원토록 교회를 보호하시는 어머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리고 교회를 보호하는 성모, 어머니가 계세요.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있는 거예요.
그러면 마리아께 기도하는 게 유효할까요? 가톨릭교회에서는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능한 대로 마리아에게 깊이 결합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교리서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마리아에게 기도는 물론 가능한 대로 깊이 결합하란 얘기에요. 우리가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전달이 되고 예수님의 응답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아주 효성이 지극하셔서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청을 올리면 예수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많이 기도를 합니다. 직접 주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대신 간구해 줄 것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예수님이라면 또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적인 기능을 하시는 성모 마리아가 또 존재를 하는 거예요.
마리아에 대한 기도의 유효성과 관련하여 <마리아의 영광>이란 책을 쓴 성 리구리란 분이 있어요. 이 분은 마리아 신학자로 대단히 유명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마리아의 영광>이란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환상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봤습니다. 왼쪽 끝에는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오른쪽 끝에는 마리아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왼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올라가다가 위를 보니 위에는 주님이 계시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놀라서 떨어졌죠. 그 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 오기를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 오른쪽 사다리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었는데 이 분이 자애롭게 맞아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아가 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이것이 리구리가 본 대단히 유명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은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유명한 환상이에요. 이 환상이 얘기하는 핵심적인 정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가면 안 되는 것이 마리아에게 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리고 이 환상은 예수님보다도 마리아가 참으로 자애롭다하는 것을 나타내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성도 여러분! 정말 마리아가 예수님보다도 자애롭겠습니까? 저는 참으로 자애로우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애로우신 분이 없어요.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동자가 자애로우시지 누가 자애롭겠습니까? 어떻게 한 인간이 주님보다 자애로울 수 있겠어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마리아론을 발전시켜,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래서 이러한 마리아론을 연구하신 어떤 분들은 이 마리아론을 보면 가톨릭은 틀림없이 이단이다! 그러니까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납득할 만한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톨릭 신자들과 이단이다, 사이비다 싸우기를 원치 않아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도와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가톨릭교회 안에 마리아관이 발전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원시 종교에 여신 숭배 정신이 있었는데 여신 숭배 정신이 가톨릭교회 안에 여신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 숭배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 숭배는 기원을 찾아 들어가면 원시 종교의 여신 숭배에 기원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잘 안 되요. 왜냐하면 마리아론을 연구해 보면 18, 19, 20세기 들어와서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지금도 발전하고 있어요. 요즘이 여신을 숭배하는 시대가 아닌데, 왜 지금까지 마리아론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을까? 저는 여신 숭배의 문제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가톨릭교회가 루터가 발견하신 위대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해요.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복음을 모른다. 그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루터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루터는 독일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수도승이었어요. 이 수도원은 규율이 엄하기로 너무나도 유명했어요. 보통사람들이 여기서 견뎌내질 못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 어마어마한 규율을 다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나름대로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서 그것을 다 지켰어요. 보통이 아니었죠.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성자가 한 분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마르틴 루터다' 라고 할 정도였어요. 사람들은 루터를 성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니까 성자이기는커녕 회칠한 무덤이란 사실을 잘 알게 되었어요. '내가 회칠한 무덤이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무서워서, 주님이 자신을 심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더 위선자다. 내가 이 정욕과 죄악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루터는 두려웠습니다. 주님이 무서웠어요. 중세 시대의 벽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벽화가 굉장히 많아요.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시는 그 무서운 주님의 모습이 중세 벽화들에 굉장히 많아요. 그 루터의 머리 속에 그 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거예요. 이 때 루터에게 가장 심각한 고민이 무엇이었나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자비하신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 분의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루터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시편을 연구하며 마침내 너무나도 유명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오호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도 자애로우시구나.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심으로 죄인인 이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납하고 계시는구나!' 루터는 너무나도 놀라운 하나님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했어요. 그 은총의 신, 지극한 사랑의 신, 그 사랑의 신을 발견하기 시작해요. 우리 개신교회를 일컬어서 복음적인 교회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복음적이라고 하는 핵심은 자비한 신의 발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개신교회 안에서는 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비교적 잘 살아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다,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내가 비록 죄를 범했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이 상태 그대로 용납하시고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갑니다. 그런데 루터가 발견한 이 위대한 복음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도 주님 앞에 가면 두려운 거예요. 루터가 주님 앞에 갔을 때 무서운 주님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처럼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 앞에 가면 무서운 거예요. 심판하실 것 같다 그 말이에요. 이런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는 자애로운 어떤 존재를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어릴 때 경험을 해보면 어머니가 자애롭잖아요. 자애로운 어머니 상이 마리아에게 투영이 되어서 자애로운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요청하게 된 거예요.
저는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이렇게 필요로 하고 발전시키게 된 그 중심 이유는 루터가 발견한 이 위대한 복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임시변통적으로 자애로운 어머니가 필요하게 된 거예요. 그 분이 없으면 그들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에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도 뭔가 조금 선한 행동을 하고 미사를 열심히 참석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줄을 알아요. 복음의 핵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그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들, 핵심적인 것들 3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들이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핵심적인 것들을 말씀드렸어요.
가톨릭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신앙적,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회에 비해 열등한, 문제가 많았던 그런 종교가 틀림없어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가톨릭교회가 최근에 와서 왜 발전하고 있는가? 이 점을 간단하게 얘기해보려고 해요.
왜 최근에 와서 발전하고 있을까?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어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있었는데 이후부터 가톨릭의 성장이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가톨릭의 성장이 어떻게 두드러졌을까. 그 이유를 약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신학적인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닌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구문제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산아제한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산아제한을 하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한 3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굉장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미국에서도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파가 가톨릭인데 가톨릭교회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산아제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요. 가톨릭교회 가정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많아요. 부부가 있다고 하면 아이들이 4명 정도 있죠. 개신교 가정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2명이 넘는 집이 거의 없어요. 한 명밖에 없는 집도 있고. 그러니까 처음 아이들을 나았을 때는 별 차이가 없는데 한 세대가 넘으면 두 명밖에 안 낳은 가정은 그냥 두 명밖에 없는데, 네 명을 낳은 가정은 두 명이 네 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게 30년 사이에 두 배로 바뀌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의 출산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회교도들이 빨리 늘어나는 것과도 관련성이 많아요. 그러니까 출산율에 문제가 있어요. 가장 출산을 안 하는 종파가 개신교예요. 어쨌든 첫 번째 중요한 이유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출산율의 문제와 인구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가톨릭의 선교 정책과 관련이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포용주의적인 선교정책을 갖고 있어요. 우리 개신교회는 일반적으로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갖고 있는데 반해. 가톨릭의 선교정책은 한 30년 동안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래요. 이 포용적인 선교정책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예를 들면 우리의 한국의 가톨릭을 볼 때 바로 나타나는 것인데 제사 문제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제사를 허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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