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성전의 이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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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성전의 이단문제
기독교 대한 감리회는 존 웨슬리 선생의 정신을 따라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를 내세우면서 교파 지향적이기보다는 교회일치에 앞장선 교회이다. 감리회는 입회조건으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동의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한 생활을 요구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의 품격과 행위가 참된 경건과 부합되기만 하면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자유를 옳게 인정한다.”[<교리와 장정> 55조]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역사적으로 다른 교단에 비해 교리적 차원의 이단 문제를 일차적 과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경우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며 그 폐해 또한 심각한 수준이라 하겠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의 대표 이만희 씨는 과천에 신천지 장막성전을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인 ‘무료성경신학원’을 앞세워 왜곡된 성경 해석을 통해 기성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기성교회를 파괴하는 이단사이비 단체를 이끄는 자로 판명되었다. 그의 신관은 매우 위험하고 신성 모독적이다.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성령 보혜사임을 믿게 한다. 그의 성경관은 편협하고 왜곡되었으며, 구원관은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그의 교회관은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선교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에 암암리에 침투하여 점조직으로 접근하여 신자들을 미혹하고 심지어 교회를 해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그의 종말관은 신도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심어줌으로써 가정과 사회를 떠나 신천지장막성전에만 머무르게 함으로써 가정을 파괴하고 반사회적 존재로 원만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열광주의자로 만든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신학정책 및 이단대책위원회는 이만희 씨의 잘못된 주장을 밝혀 그의 주장이 2,000년 동안 교회를 주관하고 신앙을 인도했던 전통적인 가르침과 전혀 다른 이단임을 천명하고 교회의 피해사례를 열거함으로써,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일반 신도들은 물론 기성교회가 혼란에 휩싸이고 심지어 파괴되는 불상사를 예방하고, 기성교회 특히 기독교대한 감리회가 이러한 이단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여 이를 모든 교회에 알려 권면하고자 한다.
신천지 이만희 씨의 주장과 그 잘못은 아래와 같다:
1. 신관: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관과 그 하나님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일하고 결정적으로 나타나셨다는 삼위일체 신관을 바른 가르침으로 믿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만희는 예수께서 보낸 보혜사 성령이 곧 자신이라고 암시하고 때로는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 신관을 훼손하고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이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한 이단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이만희는 자신을 예수께서 보낸 성령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자신을 또 다른 예수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낸 성령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보다 자신을 우위에 놓는다. 자신이 완성된 성령이라는 것이다. 종래의 이단이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과 일치시켰다면 이만희는 성령을 자신과 일치시킴으로써 이단의 정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외에 특정한 한 인간을 통해 나타나셨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이것은 한 인간을 신격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는 것이며, 결국 인간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2. 성경관:
⑴ 요한 계시록의 편식: 이만희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균형있게 다루지 않고 요한 계시록을 편식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차별한다. 그동안 이만희의 저서로 나온 대여섯 권의 요한 계시록 강해와 해설서가 있는 데 반해 다른 성경 해설서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요한계시록만 집중적으로 파고드는지 잘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신학자들(루터, 칼빈, 웨슬리)과 목회자들은 성경을 골고루 해석하고 강해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완성의 사역, 곧 새 창조의 사역이 성경 전체를 균형 있게 다룰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⑵ 말세에 선택받은 자들만의 구원: 이만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및 완성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계시록을 강해하고 자신의 해석에 근거한 말세론과 심판을 통한 특정한 자의 선택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원한 멸망을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자들에게 불안과 심리적 공포를 불어넣고 자신의 장막성전에 성도들을 붙박아 놓는다. 복음은 용서(받아들임)와 희망의 소식이지 불안과 공포의 소식이 아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태초의 이중예정론을 비판하고 이 가르침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①예정론은 모든 설교를 소용없는 것으로 만든다. ②예정론은 성화를 파멸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③예정론은 기독교 신앙이 주는 위안, 기쁨, 행복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다. ④예정론은 선행에 대한 열심을 깨뜨린다. ⑤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무효하게 한다. ⑥예정론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온 인류가 구원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딤전2:4, 마11:28) 예정론은 하나님을 악마보다 더 잔혹하고 위선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결론적으로 웨슬리는 이중예정론에 대하여 말하길, “나는 이것을 믿기보다 차라리 터키인이 될 것이고 이신론자가 될 것이며, 아닌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전능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차라리 덜 불합리하다.” 이만희는 종말의 이중예정을 주장하는 것인 바, 칼빈주의자에게 가했던 비판을 동일하게 받을 것이다.
⑶ ‘실상 계시’의 문제점: 이만희는 계시록이 ‘환상 계시’라면 자신이 속히 이루어질 ‘실상 계시’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해석을 인간이 점령하고 독점하려는 인간의 교만과 자만, 곧 원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성경 해석의 기본 명제에 의하면, “성경은 바로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 이 명제는 성경은 해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 이로써 성경 해석에 대한 교회의 전권이 성경 앞에서 부인되었다. 교회가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풀이한다. 이로써 또한 교회의 해석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적 주석이나 합리주의적 주석의 권위도 부인된다. 성경 해석의 유일한 주체는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뿐이다. 따라서 이만희가 성경의 ‘실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계시의 실상’을 보여주겠다는 이만희의 주장은 ‘교만 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의 실상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에 의하여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만희는 성경 해석 또한 알레고리 해석으로 제한시킬 뿐만 아니라, 알레고리가 지시하는 대상은 이만희와 증거장막 성전이라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레고리 해석은 그 타당성이 의심받고 끝내 폐기된 지 오래됐으나,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해석 방법으로 작용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할 경우라도 알레고리가 지향하는 중심 대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이만희의 알레고리 해석은 자신과 증거장막성전을 지시한다는 데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3. 구원관: 그리스도교 교회는 처음부터 2,000여 년 동안 줄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는 구원론을 가르쳐 왔다. 여기에는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속 사역으로만 가능하며 성령의 임재를 통해 일어나는 믿음에 의해 구원이 확증된다는 신생(중생)의 체험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만희는 자신이 오늘날 성령으로 온 지상사명자, 곧 약속한 목자로서, 자신으로부터 듣고, 보고, 믿고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암시한다. 이는 결국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격하시키고 더 나아가 부인하는 것이며 그 자리에 자신을 은밀히 대치하는 방법으로 교인들을 현혹한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중세 후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던 카톨릭의 공로신앙보다 더 위험한 개인숭배이며 개인의 우상화 작업이다.
이만희는 또한 특정한 자(생명책에 녹명된 이름)의 구원만을 주장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보편성을 부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웨슬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범위에서 보편적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부터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획득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죽음이다. 특별 구속 사상은 웨슬리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이만희는 또한 신천지의 도래와 함께 기독교의 세계뿐 아니라 예수님의 세계도 끝이 난다고 주장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없는 증거장막 성전과 그 성도만을 하나님 나라와 백성으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만희는 구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결국 부인한다.
4. 교회관: 이만희의 신천지가 기성 교회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은 그의 교회관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또한 참된 교회의 표징으로 단일성(하나됨),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una, apostolica, sancta, catholica ecclesia)을 가르쳐 왔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도상(途上)의 실존이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세상을 위한 존재’이다. 이런 역사적 교회가 담당한 사명은 막중하다. 교회는 예배(말씀선포와 성례전)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친교하고 교육하고 선교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만희는 우선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성전’이라는 말로 대치한다. 그는 자신이 세운 증거장막성전 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임을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전통적인 교회와 현존하는 기성 교회를 부인하고 자신이 세운 ‘장막’을 선전한다. 그의 장막 선전은 반(反)교회적이다. 이만희는 “하나님께서는 이천 년간 존속한 기독교 세계를 끝장내시고 7장과 같이 영적 새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새로운 제사장이 될 십사만 사천 명을 먼저 인치신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대관은 진보적인 것 같으나 자신이 세운 교회를 선전하고 절대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구약은 유치원 시대이고 예수는 중학교 과정을 배우는 시대이며 계시록은 대학을 마치는 시대로서, 예수의 초림 복음 시대는 끝났고 지금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이른바 ‘장막성전’의 사명도 분명치 않다.
5. 선교관: 신천지의 전도 방법은 매우 잘못됐다. 그들은 기성 교회에 위장으로 등록하여 교인들을 잘 대해줌으로써 미혹하고 결국 교회를 파탄으로 몰고 가 담임자를 몰아내고 교회를 접수한다. 그들의 전도 대상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기성 성도이며, 전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도를 자신의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전도방법은 이른 봄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뙤약볕을 맞으며 밭을 매고 거름 주고 잡초를 뽑는 노력 없이 추수한 알곡을 창고에서 도둑질하여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행태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와 같은 이런 전도방법 때문에 피해를 입은 기존 교회의 수가 점증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찍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는 1995년 신천지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만희는 기성 교회뿐만 아니라 기성 신학교를 비판하고 부인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장막성전에서 가르치는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오직 그것만을 배워야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위 탈산업시대에 신학대학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신학대학은 교회에서 목회할 사역자를 육성하는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성과도 교류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해야 하기 때문에 높고 깊은 지성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신학대학은 목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영성(靈性)과 지성(知性)을 동등하게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 신학대학을 요한계시록만 세뇌하듯 집중 교육하는 신천지의 산하 교육기관인 ‘무료성경신학원’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균형과 조화를 잃은 몸과 영혼은 오래가지 못하며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이치는 자명하다.
6. 종말관: 그리스도교 교회의 종말론은 ‘죽음’과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희망론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 창조론이다. 그러나 이만희의 신천지는 이러한 가르침을 균형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편중되게 나타난다. 우선 이만희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의’의 최후의 승리와 영생으로 믿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은 재림의 시기와 심판, 선택받은 자의 구원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멸망만을 말하는 조잡한 말세론에 불과하다. “초림 예수님 때 육적 이스라엘이 끝나고 영적 이스라엘이 창조되었듯 세상 끝인 오늘날은 영적 이스라엘이 종말을 맞고 새 이스라엘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새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새 이스라엘이 암시하는 것은 자신의 장막성전이다. “하나님 보좌가 임하는 이 땅의 장막은 바로 만국이 주께 경배 드리러 가야 할 증거장막 성전이다.” 그는 계시록이 ‘환상 계시’라면 자신이 속히 이루어질 ‘실상 계시’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시의 주체는 초지일관 하나님이다. 자신이 계시자가 되어 계시의 실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고 독신적(瀆神的)이다.
7. 신천지 이단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길:
⑴ 기성교회의 성경 교육 강화: 이번 이만희 씨의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경우, 그 파급력이 크고 지속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무료성경신학원을 통한 유혹적인 성경교육에 있다고 판단된다. 기성교회에서 성경교육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단들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기성 교회들은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고 오래된 성도들에게도 영향력 있는 성경교육을 계발해야 한다. 또한 기성 교회는 지속적이면서도 건전하고, 흥미있고 재미있는 성경교육에 더욱 힘을 써야 한다. 한국교회 신도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바, 교회에서는 이 애정이 올바르게 표출되고 형성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써 교육해야 한다.
⑵ 기성교회의 교리교육 강화: 그동안 개신교회에서 성경교육은 상당히 행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리 교육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리는 교회가 가르친 신앙의 요체이며 뼈대로서 빠른 기간 안에 신앙의 본질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뼈대가 갖추어짐으로써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감리교회는 성경교육뿐만 아니라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과 <감리회 신앙고백> 및 <사도신경> 교육 등의 교리교육을 통해 성경과 기독교 신앙 전통에 부합하고 다변화하는 시대적, 민족적 사명에 소홀함이 없는 신앙을 양육해야 한다.
⑶ 종말론과 요한 계시록 교육의 강화: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도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발생한 경우가 많다. 잘못된 종말론(시한부 종말론, 열광주의 등)은 신자의 인생과 교회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기성 교회가 종말론을 이러한 열광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이유는 현실 교회가 개 교회의 성장과 부흥, 그리고 현재의 안정에만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 희망에 관한 메시지이며,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나라와 우주적 완성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요 꿈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적 비전이 기록된 요한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묵시문학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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