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본문
힌두교는 다른 어떤 종교와 비교해 볼 때 배타적인 성격이 가장 약하며 관용적입니다. 그 이유는 힌두교가 "진실은 하나인데, 현인들이 이를 여러 가지로 부른다"하는 사상을 기초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대의 힌두교 개혁자인 라마크리슈나는 어느날 신비적인 체험 속에 들어갔는데 그때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의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국 진실은 하나이다'하는 힌두교의 사상을 몸소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모든 방면에서 그들이 택한 모든 길은 다 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세계는 하나'하는 구호와 함께 전 세계 모든 인류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으며, 예수를 믿음으로 타종교와 갈등이 있다면 그 신아을 포기하더라도 하나가 되어 사람을 사랑하는 평화와 사랑의 '새시대'(New Age)가 오도록 하자는 '새시대 운동주의자'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의 다원화를 인정하고, 타종교에 대한 선교 무용론을 주장하게끔 합니다.
힌두교에는 신들이 3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힌두교 예배 처소에는 셀 수 없는 여러 우상들과 신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신들 가운데 '브라만(Brahman)'을 최고의 신이요, 궁극적인 실체로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브라만'은 어떤 말로도 정의될 수 없는 비인격적이며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개성과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 보지 않고, 단지 브라만의 구체적이고 불완전한 화신으로 밖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거룩한 신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혹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수도 있지만, 이는 신에 대한 거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힌두교에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업보(카르마)'사상입니다. 이는 인과응보적인 법칙으로서 한 개인이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와 모습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전생에 행했던 모든 행도과 업적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으신 것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윤회(삼사라)'로써,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그것의 업보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전생의 업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계속 옮겨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혹시 자신들이 미래에 바퀴벌레나 쥐로 태어날까 두려워 합니다. 이런 사상 가운데 사는 모든 힌두교인들의 인생의 최대 목표는 이런 윤회와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해탈)을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장시간 묵상을 하고, 고행을 하거나, 요가를 열심히 하는 등 인간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힌두교는 모든 것에 관용적인 훌륭한 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인간을 운명의 노예로 만드는 가장 끔찍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힌두교는 인도에만 관심을 갖던 것을 버리고 북미의 작은 마을까지 깊숙히 침투해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가, 명상, 세계 평화운동, 환경 보호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 사회가 요가, 명상, 신비주의 등 힌두의 가르침에 대해 열려지고 있고, 현대인들이 절대적인 교리보다는 포용력있는 새로운 지식을 더 중시하고, 인간 문명의 재발견과 과거의 유산들을 보존하자는 움직임 등이 활발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힌두교 가정은 전 세계의 1/6이며 거의 10억을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헛된 힌두교 사상에 사로잡혀 운명적이고, 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사명이 지금 시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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