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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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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가장 큰 水源으로 강 이름의 어원이 된 도시

요단강의 수원


1830년대 미국에서 온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이스라엘 전국을 직접 답사하면서 성서의 땅 위치를 비교했고 수많은 성서 속의 도시들을 밝혀낸 바 있다. 그중 헬몬산 언저리 폭포 옆에 있었던 아랍어로 텔 엘-카디(Tel el-Qadi)라 불리는 유적지를 조사하면서 이곳을 단 자손이 이동하여 살게 된 레셈(수 19:47) 혹은 라이스 땅(삿 18:1)이라고 주장했다. 텔 엘-카디란 ‘심판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히브리어 ‘단’도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창 49:16) 유적지 이름의 어원이 유사하다는 데 기인했으며 더불어 유적지 옆의 폭포가 요단강의 수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2840m)에서 시작하여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사해까지 흘러내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건넌 강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가 경계선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요단강은 히브리어로는 야르덴(yarden) 강이다. 이 이름은 ‘내려오다’라는 히브리어 ‘야라드’와 ‘단’이라는 이름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단 샘에서부터 내려오다’라는 뜻이다. 요단강의 수원은 모두 3개의 샘들(단, 헐먼, 스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단 유적지의 샘이 가장 큰 수원지이다. 학자들은 단 유적지 즉 텔 엘-카디가 성서의 단이라 불렸고 요단강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땅 레셈/라이스

단 샘에서 나오는 물이 주변 지역을 비옥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연결되는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던 이곳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음도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덕분에 이 지역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 부를 누렸고(삿 18:7)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살고 있었다(삿 18:27). 이 땅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단 자손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는 레셈 혹은 라이스라 불렸고 이 이름은 이미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문서에도 이름이 남겨져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아브람)의 시대에도 등장하는 단이라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엘라, 엘람, 고임의 왕들이 조카 롯이 거주하고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을 공격하고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가자 아브라함(아브람)은 이들과 대항해 싸웠다. 그는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318명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단까지 쫓아가 쳐부수고 다메섹가지 쫓아갔다(창 14:1∼14).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단 자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수 19:40∼46) 즉 지중해변 블레셋 사람들과의 경계에 위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은 기업의 땅을 구하러 떠나야 했고(삿18:1) 북쪽으로 올라가 여호수아서에는 레셈으로, 사사기에서는 라이스라 불렸던 성의 사람들과 싸워 점령하고 거기 거주하여 그들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 부르고 그들의 경계를 확장했다(수 19:47; 삿 18장).

사사기에서는 이 전쟁의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 자손은 그들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게 했다. 북쪽으로 가던 정탐꾼들은 중간에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라 부르는 이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미가가 은을 부어 만든 드라빔과 함께 레위인 출신의 어린 제사장을 눈여겨보았다. 정탐꾼들이 본 라셈/라이스는 샘이 있어 비옥하고 부유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돈과도 거리가 멀었고 북쪽은 헬몬산으로 막혀 있어 고립되어 있기에 아람 같은 다른 나라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삿 18:27∼28) 그들이 차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단 자손은 칼날로 그들을 치고 그 성읍을 불살라 이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불렀다(삿 18:29). 그런데 이 전쟁 과정에서 성서는 후대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와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정탐꾼들이 보았던 미가의 집에 세워진 드라빔과 제사장을 단 자손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자손은 그들의 전쟁 여정에 이 드라빔과 제사장을 취하는 것도 포함하였다. 미가가 다시 빼앗으려고 했지만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그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삿 18:25).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을 단 자손의 제사장으로 삼았다(삿 18:30∼31).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단과 벧엘에 두었다. 아마도 여로보암은 벧엘에는 야곱의 돌베개가 세워진 곳이라는 그리고 단은 한때 제사장과 신상이 있었다는 종교적 전통에 의해 이 두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성문

단의 발굴은 히브루 유니언 대학교의 아브라함 비란 교수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현재도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적지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주전 45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동안 버려졌던 흔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발견된 놀라운 발견은 주전 1800년게 세워진 레셈/라이스의 도시 성문이다. 성문은 같은 시대 므깃도, 세겜, 게셀 같은 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되는 전형적인 ‘시리아’ 형식의 성문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가장 잘 보존된 형태이다. 건축 당시의 7m 높이가 거의 다 보존되었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도시 주민들은 도시 전체의 경계선 바닥에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1.7㎞의 거대한 땅을 덮어 마치 언덕처럼 쌓아 올렸다.

이때 동원된 노동자들은 3년 동안 1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은 이 언덕 위에 세워졌고 성문 전체는 각각 아취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세 쌍의 기둥들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덕의 경사면에 놓여져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첫 번째 성문을 지나가야 한다. 두 번째 성문에는 방들이 있어 사각형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성문을 통과하면 거리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아치 형태로 이루어진 성문은 햇빛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 올려 세워졌으며 표면은 흰색으로 회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50년 정도 사용된 후 성문은 흙으로 다시 덮여 버려졌고 덕분에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성문이 사용된 연대가 아브라함의 시대와 유사해 성문은 ‘아브라함 성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텔 단의 고고학적 결과물을 통해 안타까운 것은 주전 12∼11세기께 단 자손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전 10∼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된 흔적은 상당히 풍부하다.
 
이스라엘 북방 요충… 여로보암이 성지로 선택 우상 세워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

사사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경계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한다(삿 20:1). 다윗은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는 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인구조사를 실시했고(삼하 24:2) 솔로몬의 통치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평안히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4:25).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을 때도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0:5). 브엘세바가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의 땅이라면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중요한 정치적 입지를 가진 도시였다. 구약성서시대에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을 경계하는 요새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단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경계지역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접전지역이었다.

이러한 단의 정치적 성격은 고고학 유적지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되었던 아브라함 성문 외에도 단에는 주전 9∼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이 도시를 요새화하기 위해 세운 성문이 발견되었다. 이 성문은 진흙벽돌을 쌓아 세운 아브라함의 성문과는 달리 돌로 건축되었다. 단의 성문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도시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성문 입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졌고 바닥은 돌로 포장된 도로였다. 거대한 성문은 뜰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다른 사각형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7개의 탑과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구조물에 도착하게 된다. 이 구조물을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뜰이 나오고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본 성문을 만날 수 있다. 성문을 지나면 넓은 도로를 지나 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단의 성문 구조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구조물은 두 성문 사이 뜰에 놓여 있는 단상이었다. 뜰의 북서쪽에서 발견된 단상은 돌을 직각으로 잘 다듬어 쌓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성서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성문에 올라가 회합을 주도한 이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자리라고 주장했다. 이 단상을 둘러싸고 각 코너에는 시리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꽃잎 모양으로 조각된 둥근 기둥 받침이 발견되었고 이는 앞서 주장한 의견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마도 단상의 네 귀퉁이의 받침 위에는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단상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자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지붕을 받치는 구조였을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는 성문에 앉아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는 성문 위가 아닌 성문과 접해 있는 이러한 구조물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보아스도 성문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룻 4:1). 또 이스라엘의 왕들은 성문에 있는 이러한 구조물에 앉아 백성을 만났다. 다윗은 성문에 앉아 있었고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해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함으로 모든 백성이 왕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모인다(삼하 19:8). 때로 이곳에서는 재판이 이루어졌다. 아모스서 5장 12절에서는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스가랴 8장 16절에서는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라고 말하고 있다.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에는 때로 산당들도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유다 각 성읍의 성문에 산당들이 있어 헐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단의 성문에서는 5개의 평평한 돌들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마치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긴 탁자 형태의 돌이 있어 이 돌들이 우상을 상징하는 주상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이 없었던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삼았다가 부느엘로 수도를 이전했다. 아마도 왕국 초기 그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입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드리기 위해 자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올라가 마음이 바뀌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죽이고 나라를 돌려줄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아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고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신이라고 말했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을 성지로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두 도시가 국가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단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며 벧엘은 남쪽 경계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은 미가 집에 있던 레위지파 출신의 제사장과 드라빔이 있던 장소이며 벧엘은 야곱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았던 장소로 베고 잤던 돌을 세워 하나님의 집 즉 벧엘이라 명명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놓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가나안 땅에서 신상들은 대부분 각각 상징하는 동물상 위에 올려졌고 여로보암은 금송아지가 가나안 최고의 신의 상징이었기에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은 우상을 섬기지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이 일이 죄가 되어 단은 저주받은 장소 일 수밖에 없었다(암 8:14). 심지어 단의 성소 구역은 주전 2세기에도 여전히 주변지역을 위한 신전들로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실제로 텔 단에서는 주전 10세기 후반 여로보암 시대에 세워졌다가 주전 9세기 아합의 시대에 증축되어 제사가 행해진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성소구역은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신전 자체는 이미 사라졌지만 신전이 서 있었던 19×19m의 단상과 높이 3m에 크기는 5×6m로 추정되는 거대한 돌제단이 있었던 제사구역 그리고 제사용 도구를 두거나 정결례를 행하거나 신전의 행정을 담당했던 사무실 격의 여러 방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건물 전체는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행정건물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베니게 즉 두로와 시돈의 건축양식이 두드러졌다. 정교하게 모나게 다듬은 돌로 지어진 건물은 지진에도 버틸 수 있는 벽돌쌓기 방식으로 쌓아졌다. 비록 제단 전체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50㎝ 높이의 돌을 깎아 만든 뿔은 이스라엘의 흔한 뿔 달린 제단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제단은 잘 다듬은 돌을 사용했고 높이도 3m나 되어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출 20:25)는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어 단의 종교적 부패 역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은 주전 732년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단의 비옥한 땅은 주전 4세기까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 지역의 종교적 장소로 사용된 흔적은 있지만 주전 4세기까지 그다지 역사에 언급된 적이 없는 장소로 꽤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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