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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람, 요셉(창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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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 밤에 혹시 어떤 꿈을 꾸시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좋은 꿈이나 나쁜 꿈은 꾸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원래 꿈이 많은 존재입니다. 동물도 꿈을 꾸는지는 잘 몰라도, 아마도 사람만큼 그렇게 많은 꿈을 꾸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꿈을 꾼다는 사실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람이 하루에 6시간을 잔다고 하면, 처음 90분을 제외하고 꿈을 대개 세 번 정도 꾼다고 합니다. 잠자는 시간의 30-40% 가량의 시간 동안 꿈을 꾼다고 합니다. 기독교도 원래 꿈과 환상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야곱이나 요셉, 다니엘 등 꿈과 깊이 관련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실제로 꿈을 많이 꾸었으며,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은 꿈을 꿉니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정신적 손상을 복구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꿈을 꾸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실험을 하면, 사람들은 긴장과 불안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초조해지며, 가벼운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를 많이 겪게 된다고 합니다. 정상인은 잠자는 시간의 30% 정도 동안 꿈을 꾸지만, 정신병에 든 사람은 50% 정도 동안 꿈을 꾼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꿈이 정신적 손상의 복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꿈을 많이 꾼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꿈이 대개 허황한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들은 종종 개꿈을 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개꿈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황당하고 엉뚱한 꿈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엉뚱하기만 한 꿈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되는 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개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꿈에서 개에게 물리거나 개에 쫓기다가 기겁을 해서 일어나는 꿈이라면 모를까, 전적으로 허황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꿈은 없다고 합니다.


 대개 우리는 하루 동안 살았던 내용과 관련되는 꿈을 꿉니다. 대개는 낮 동안 경험했던 내용이 꿈에 다시 나타납니다. 하지만 꿈이 우리 의식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꿈은 우리의 무의식이 파악한 주관적인 현실을 표현합니다. 낮 동안 우리가 감추고 둘러대고 억눌렀던 내용이 다시 꿈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때로 꿈을 꿈 다음에 "내가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여하튼 꿈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정신 현상이 아닙니다. 꿈은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려는 무의식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꿈을 통해서 의식 세계보다 더 큰 세계, 더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세계에서 가르쳐주는 초월적인 안내를 받게 됩니다. 꿈은 예시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시적 기능이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 의식이 미래에 이룰 사실을 기대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떤 예비 실험이나 계획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무의식은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꿈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의식보다 훨씬 더 큰 정신의 세계의 인도를 받아 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사람이 꿈을 꿀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말씀을 듣게 하신다"(욥 33:15-16)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자주 나오지만,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꿈의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고 있었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형님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을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요셉에게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따지며, 그렇지 않아도 차별 대우를 받던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은 다시금 꿈을 꾸었고, 이제는 꿈 내용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하나의 별이 내게 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한단 말이냐?"라고 꾸짖으면서도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겨놓았지만, 형들은 다시금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일로 요셉은 형들이 시기를 사서 종으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경호대장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재산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보디발의 유혹을 물리친 대가로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 들어온 두 관리인의 꿈을 해몽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행운을 잡았고, 그 결과로 그는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속담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셉은 가뭄 때문에 기근에 처한 형들의 절을 받게 되었고, 자기를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하고 온 가족을 편히 모심으로써, 곡절과 사연이 많던 기구한 요셉의 일생은 결국 "해피 엔드"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포부나 욕망을 표현할 때에 "나는 꿈이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미국 흑인해방의 영웅 마틴 루터 킹은 "내가 꿈을 가지고 있노라"라고 말하는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미시시피 강가에서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함께 노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 때문에 그는 암살을 당했지만, 그의 꿈은 결국 오늘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꿈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꿈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꿈이 아니라 우리가 꾸는 꿈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꿈은 우리가 가지는 꿈이나 우리가 꾸는 꿈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꿈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이나 우리가 꾸는 꿈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만약 요셉의 꿈이 그가 가졌던 꿈이나 그가 꾸었던  꿈이라면, 온갖 역경 속에서 자기의 꿈을 개꿈으로 취급하고 성급히 버렸을 겁니다. 물론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 혁명과 진보는 대부분 인류가 꿈꾸거나 가졌던 원대한 꿈이 실현된 것이지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인류의 모든 꿈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꿈이 허망한 환상으로 끝난 경우도 허다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불로초,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산주의 혁명, 모든 인간이 부자가 되는 자본주의 이상, 전쟁이 없는 영원한 평화 등은 아직도 허망한 꿈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꿈은 역경 속에 오히려 빛을 발합니다. 아니 지혜로운 사공은 역풍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듯이, 이런 꿈은 오히려 역경을 선용합니다. 만약 "요셉이 건방지게 꿈을 형들에게 자랑삼아 늘어놓지 않았다면, 그런 지독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실수라면 실수이겠지요! 하지만 만약 이런 실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요셉이 무슨 방법으로 남의 나라의 총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고 현실과 적절히 타협했더라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랬더라면, 혹시 보디발 아내의 기둥서방이 되어서 잠시 편히 지낼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만,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는 일을 없었을 겁니다. 요셉에게는 옥살이도 오히려 꿈이 실현되는 기회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는 사람은 역경을 도리어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꿈을 품을 때, 그 꿈이 정말 이루어질 것인지, 그 꿈이 자신의 이기적인 야망의 발로는 아닌지를 구별하려면, 그가 역경을 얼마나 잘 이기는지, 아니 그가 역경을 얼마나 선용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정말 모진 고난 끝에 이룰 수 있었던 꿈이 하나님의 꿈이었다는 증거는, 그가 형들 앞에서 고백한 감동적인 말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요셉의 인격이 너무나 고매하여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결국 일이 좋게 끝났으니까, 지난 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약 그에게 꿈을 주셨고 성취해 주셨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연약한 인간이 그로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뭐 그리 성인군자(聖人君子)랍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혹시 실현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막연한 꿈을 꾸면서 일평생 노심초사하실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기에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꿈은 언젠가 때가 되면, 아니 잘 견디고 참으시면, 아니 늘 기도하시고 노력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런 꿈은 역경을 통해 더 빨리 실현됩니다. 이런 꿈은 결국 요셉의 경우처럼 나도 잘 되고 너도 잘 되며,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꿈이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꿈입니다. 어떤 꿈이 이런 꿈입니까?  모두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꿈, 모두가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의 꿈,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화목한 가정의 꿈,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의 꿈, 모두가 더불어 화평한 인류의 꿈입니다.   


그리고 밤에만 꿈을 꾸실 것이 아니라 밤낮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꿈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실 모든 삶은 바로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같이 짧은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원대한 꿈을 이루어 드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통해 모든 역경을 이길 뿐만 아니라, 역경을 도리어 감사의 조건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꿈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러분만의 성(城)입니다. 여러분은 그 성의 성주(城主)입니다. 요셉처럼 당당하게 꿈을 꾸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요셉처럼 온갖 난관을 꿰뚫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꿈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끝으로 찰스 앨렌의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실현되지 않은 많은 꿈을 꾸었네.

그것들이 여명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네.

그러나 아직도 충분한 양의 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네.

내가 계속하여 꿈을 꾸는 것을 원하도록 만드셨네.


응답되지 않는 많은 기도를 드렸네.

오랫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네.

그러나 내가 계속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의 기도에 응답이 왔다네.


나를 배신하고 떠나버린 많은 친구들이 있었네.

그들 때문에 나는 홀로 울었다네.

그러나 계속하여 신뢰할 수 있도록,

정말로 진실한 충분한 수의 친구들을 발견하였다네.


길가에 떨어진 많은 씨앗을 심었네.

그래서 새들이 모두 먹어 버렸다네.

그러나 내가 계속하여 심을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의 황금 다발이 내 손에 있다네.


실망과 고통의 컵을 쏟았네,

노래 없는 많은 날들을 보내었다네.

그러나 내가 계속하여 살아가기 원하도록,

인생의 장미에서 나오는 충분한 양의 즙을 마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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