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에 관한 성경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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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에 관한 성경적 연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대기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브라함 개인의 순종과 믿음의 위대성을 강조하여 신자들에게 모범의 대상으로 설명되었을 뿐, 그의 일생에 나타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관하여는 철두철미하게 외면 당하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창세기와 신약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일생에 감추어진 성경의 비밀에 관하여 자세히 고찰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여 보겠습니다.
1.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람이 순종을 잘 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주를 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통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1:31절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보면,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온 집안 가속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란에서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 데라는 갈대아에서 우상 신상을 만들며 이방 신을 섬기던 자이었으나(수 24:2), 온 집안 식구들을 다 데리고 아무 연고자도 없는 머나먼 이방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결심이 서기까지는, 아들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비보다 먼저 죽은 사건도 있었고(창 11:28), 그의 마음에 큰 변화가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異常)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창 15:1)와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창 16:12)라는 기록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아브람은 비몽사몽간이던지, 깊이 잠든 상태이었음을 알 수가 있고, 그 때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답지 않게 심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하여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데라와 아브람에게 현몽하여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를 명하셨고,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하란에서 데라를 데리고 가시자, 아브람은 여지없이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2. 은혜 언약의 계승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가나안으로의 이주가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6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장래 기업으로 받을 약속의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간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도성을 약속하시고, 그 곳으로 섭리하심으로 인도해 가시는 놀라운 장면인 것입니다. 처음 이 약속(은혜 언약)의 축복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는 3가지 축복을 해주십니다. 이는 아담에게 국민, 국토, 국권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하늘 나라'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 은혜 언약은 셋과 노아에게 전수되어 아브라함에게까지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3:15)라는 약속이 바로 아담에게 하신 약속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언약의 계승은 약속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루어져 그 약속 성취의 완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역사는 곧 메시야의 그림자요, 모형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불신앙과 믿음의 성숙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전 일생을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도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함의 처음 믿음은 아주 유치하고, 의심이 많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계속 여러 가지 표적과 사건으로 믿음을 키워 주셔서 마침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에게까지 이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로, 가나안에 기근이 있자, 애굽으로 피신한 아브라함은 애굽왕 앞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거짓말을 하면서,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창 12:13)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합니다.
후에 그랄 왕 앞에서도 역시 같은 거짓말을 하면서, 아예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부터 누이라고 속이자는 계획을 했었다는 고백을 합니다.(창 20:13)
둘째로, 하나님께 상속자 문제로 의논을 할 때도 아브라함은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미모의 사래를 아내로 맞아들일 때부터 자식이 없었습니다.(창 11:30, 12:11) 후에 헤브론에 정착한 뒤로,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2-3)라는 심한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90세된 사라와 100세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는 사래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나은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 달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창 17:18)
셋째로, 노년에 그는 아내 사라가 죽자, 그두라라는 후처를 들이고 있습니다. 후에 이 자손들이 동방 동국(東國)의 백성이 됩니다.(창 25:1-6)
4. 신앙의 연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많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크신 능력으로 끝까지 지키고 보살펴 주셔서, 그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도록 섭리해 가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어 주시고(15:7), 애굽왕 앞에서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게 하여 주시고(12:10-13:2),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셨습니다.(14)
그리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점점 더 성장하여졌던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기름진 땅을 양보하기도 하고(13:9), 다섯 나라 왕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서 전리품에 손 하나도 대지 않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14:23)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바로 이렇게 은혜로 허락하여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롬 4:1-3,17-25)
5. 가나안땅 유업의 증거와 약속의 자손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은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라고 하며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는 증거로 확답을 하여 주십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큰 제물들은 반씩 쪼개었으나 작은 제물들을 쪼개지 않은 불순종을 하였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여년동안 종살이를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정말 이러하다면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유업의 증거로서 아브라함에게는 타는 횃불의 증거를, 자손에게는 400여 년 간의 이방에서의 종살이 후 되돌아오는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라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의 땅임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하늘의 별만큼 자손이 번창케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의 폐경기 노부부에게 결국 그 말씀하신 대로 외아들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창 21: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하게 생각되어 웃는 노부부에게 하나님 자신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는 신실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자손을 많이 주시지 않고 오직 이삭 하나만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르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바로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 모두 아니 성경 전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요 5:39)
6. 이삭과 이스마엘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벌이는 날, 사라의 몸종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희롱하다가 광야로 두 모자가 쫓겨나는 사건이 나옵니다.(창 21:8-21)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갈 5:23-24)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5:29)
즉, 이스마엘은 율법을 쫓는 행위 언약의 비유이며,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은혜 언약의 비유인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율법주의 유대교가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던 사도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던 사건을 비유하여,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29-30)라는 강경한 어조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복음적으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고 있는 것도 의미하고 있습니다.(갈 5:17)
그러나 이 두 소욕은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관계로서, 결국 성령의 소욕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게 되어 최후의 승리를 하게 되는 보장이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엡 4:13)
7. 모리아산의 제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입니다.(창 22:2)
지금까지 대부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을 잘 하였고, 그 아들 역시 아버지의 말에 순종을 잘하는 효자다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먼저 지형적으로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 서편에 있는 산으로, 지금의 갈보리 (골고다) 언덕과 같은 산맥인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똑같은 장소에서, 2000년 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라는 말씀에서 보면, 아브라함 자신의 믿음은 이삭이 반드시 약속의 자손이므로 비록 제물로 바치더라도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리실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부활의 신앙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헤브론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3일의 여정 동안에 이삭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죽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나이까'라는 이삭의 물음에 `내 아들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까지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22:7-8) 결국 하나님께서는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수양을 준비하셨고, 그 수양은 이삭 대신에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마음 속에서 이미 죽임을 당했던 이삭을 3일만에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칼 앞에서 가만히 있는 이삭의 모습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비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사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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