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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시인, 다윗(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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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겨운 장마와 짜증나는 무더위도 어언 덧 선선한 바람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벌써 가을이 온 듯, 서늘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발아래 밀어놓았던 얇은 이불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계절이 바뀌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창조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게 되고, 삼라만상의 놀라운 변화 앞에서 새삼 겸허해지게 됩니다. 특히 가을이 오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산과 들로 놀러갈 계획을 세우게 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책을 가까이 하며 사색을 즐기곤 합니다. 특히 맑은 하늘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우러러보게 만들고, 그래서 시인이 되게 만듭니다.


제가 현풍에 내려와서 여러 가지 감사하게 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요즈음에는 뭉게 구름이 피어오르는 맑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수도권에서 살던 때에도 종종 하늘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 하늘은 어지러운 빌딩과 흉물스런 온갖 장애물에 가려진 누더기와 같은 하늘이요, 그것도 온갖 매연으로 오염된 하늘일 따름이었습니다. 요즘처럼 확 트인 맑은 하늘을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참으로 도시 생활은 문명의 편리와 경제적 이익 등을 얻는 대신에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잃어버린 생활이요, 그래서 각박한 생존경쟁에 치여서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생활입니다. 그 반면에 농촌생활은 다소 불편하고 가난할지는 모르지만, 자연의 신기한 조화를 느끼고 생명의 풋풋한 기운을 느낄 수 있기에 정신적으로 더 풍요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제가 왜 갑자기 이런 고상한 말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시죠? 물론 자연환경이 뛰어난 현풍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초가을의 흥취에 흠뻑 빠진 탓도 있겠지만, 설교 준비를 하던 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한 주간 동안 그에 관한 말씀을 읽다가, 저는 무슨 주제로 설교를 준비해야 할지 많은 고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하기에는 너무나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다윗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지난 주일에 설교했던 내용대로 요나단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모습입니까? 아마도 대개는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온 대로, 작은 체구로 거대한 골리앗 장군을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렸던 용맹한 소년의 모습이겠지요! 어떤 분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동안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종을 죽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울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다윗의 아름다운 마음도 떠올리시겠죠! 또 어떤 분은 아마도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사지로 내몰아 죽게 하였지만, 나단 선지자의 고발을 받은 후에는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진심으로 참회한 그의 모습도 떠올리시겠죠! 실로 다윗은 죄도 용감히 짓지만, 회개도 용감히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문에 쫓겨났다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 다윗의 뜨거운 부성애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디 이런 모습뿐이겠습니까? 다윗은 백전백승을 거둔, 전략에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전사였습니다. 그는 블레셋을 위시하여 모압, 암몬, 에돔 왕국을 모조리 점령하였고, 시리아와 아람까지 공략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대하고 부강한 통일국가를 세웠습니다. 실로 다윗은 자기 민족에게 고도의 영광을 안겨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 인물로 생각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사람들은 다윗의 시대를 매우 그리워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맨손으로 쓰러뜨린 담대한 신앙, 끝까지 의리를 지킨 아름다운 우정, 진정으로 뉘우칠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 원수의 목숨을 보존하는 아름다운 마음씨, 자애로운 부성애, 뛰어난 전략, 탁월한 지도력, 이런 저런 모습들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고 중요하겠습니다만, 오늘 저는 다른 모습의 다윗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윗은 전쟁과 정치에만 능한 사람이 아니라 시를 짓고 비파를 뜯고 노래하고 춤을 출 줄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가장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의 주옥과 같은 시들은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감화를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어떤 업적보다도 그가 남긴 수많은 시편들은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시편 23편은 수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에 불렀던 승전가(삼하 22장)를 보면, 여러 가지 칭호가 나옵니다.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 나의 등불 등이 나옵니다. 참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다채롭게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기도하거나 찬양을 드릴 때, 어떤 칭호를 부르십니까? 나의 아버지, 나의 주님,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힘, 나의 길, 나의 친구 등이 있겠지요. 혹시 나의 회장, 나의 애인, 나의 어머니, 나의 복권, 나의 보험, 나의 선생, 나의 든든한 빽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좌우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친숙한 표현들을 찾아서 사용해야 합니다.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지껄인다면,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감격도 없는 공허한 말이 되고 맙니다.


한번도 양을 쳐보지 못한 여러분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다가온 하나님의 모습은 다윗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모습과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잠시 눈을 감고 시인의 마음이 되어, "여호와는 나의 .... 이니"라고 조용히 속삭여 보십시오. 만약 적당한 단어가 즉각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그 만큼 형식적이거나 메마른 신앙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어떤 단어가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 단어가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그런 말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군대에 간 젊은이나 외지에 오래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는 어머니, 고향 혹은 조국과 같은 말은 정말 눈시울을 적시는 이름입니다. 여러분의 눈시울을 적시는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어서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양들에게 필수적인 양식입니다. 여러분에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참으로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잠시도 살 수 없는 그런 것, 즉 생명의 음식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일에 한 두 번 먹는 인스턴트와 청량 음료 정도는 아니십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한 다윗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다. 그는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낙담할 수도 있었고, 그래서 의의 길이 아니라 불의의 길, 아니 아무런 길을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의 영혼은 늘 소생되었고, 올바른 길을 걸어갔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정말 하나님 때문에 소생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세상의 재물이나 성공, 명예보다 더 신선한 청량제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불의한 세상 한복판에서 여전히 올바른 길을 걷고 있습니까? 혹시 다윗처럼 실패하고 범죄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뉘우치며 살고 있습니까?


 이어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양을 칠 때, 전쟁을 칠 때, 통치할 때, 다윗은 많은 원수들을 만났으며, 그야말로 죽을 수도 있는 경지, 즉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실제로 하나님의 위로와 동행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양을 칠 때에는 언제나 두 개의 막대기가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양을 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야수와 싸우는 막대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그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두 팔로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두 팔, 두 도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고통의 골짜기에 빠질 때, 여러분을 건져주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두 팔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팔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이어서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원수에게 고통을 당할 때에 직접 보복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은 단호히 물리쳤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은 늘 관대히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승리를 가져다주실 분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 앞에서 언젠가 명예를 회복할 줄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비록 여러분의 생애 중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불행한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일평생 함께 할 줄로 믿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당신의 양을 훈련하실지언정, 혹은 한 손으로 때리실지언정 결코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거두실 분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셈입니다. 사랑은 때로 기다리고 참고 때리기는 할지언정, 결코 방치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당신의 양을 신실히 돌보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여러분도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만물 속에 거하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따로 거하실 집을 마련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만물 속에서, 특히 생명이 숨쉬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연을 멀리 떠나려고 한다면, 그 즉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현대인의 공허감과 질병은 대개 하나님의 집인 자연을 멀리한 결과입니다. 자연 외에도 인간의 공동체, 즉 가정과 교회도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작은 천국입니다. 교회에 가까이 할수록 가정도 천국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교회를 멀리할수록 가정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집, 교회를 가까이 하십시오. 아니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머물러 계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시의 결론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양이요, 천국 백성입니다. 그리고 시는 종이 위에 잉크로만 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몸으로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인 인생을 거쳐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와 인도를 받고, 그리고 원수에게도 넉넉한 사랑을 베풀 줄을 알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의 몸부림, 우리의 수고도 그 자체로서 곧 아름다운 시 한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믿고 산다면, 우리도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되는 셈입니다. 몸을 종이로 삼아, 기도를 잉크로 삼아, 우리도 다윗처럼 멋진 신앙의 시 한편을 남겨 보십시다. 우리 자손들이 두고두고 애송하는 멋진 시를 한번 써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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