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사람, 나아만(왕하 5 :9-14)
본문
거룩한 주일을 맞아, 육신의 기쁨을 위해 들로 산으로 가지 않고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신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은 사람을 여러 가지 기준으로 나누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적으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고, 인종적으로는 백인종과 흑인종과 황인종으로 나누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과 아메리카인 등으로 나눕니다. 도덕적으로는 베이컨이라는 철학자가 사람을 거미와 개미와 벌로 나누었습니다. 거미는 남을 등치고 해쳐서 먹고사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고, 개미는 자기가 열심히 모은 먹이를 동료와 함께 나누어 먹는 이로운 사람을 말하고, 벌은 힘써 모은 꿀을 사람에게 제공하는 희생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으로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누어, 미적인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적인 사람은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하고,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을 준수하는 사람을 말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오늘 불행과 행복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먼저 일평생 행복하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물질적인 가난을 겪지 않고, 몸과 마음의 병도 나지 않고, 좋은 사람과 좋은 환경에서 무사태평하게 살다 간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타고난 행복 때문에 일평생 행복해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이런 사람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일평생 행복하게 산 사람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행복한 것은 그 자신이 남보다 노력을 더 많이 했거나 남보다 더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와 조상의 희생과 고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자신의 행복이 바로 조상과 부모의 값진 희생의 대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행복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손도 길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조상과 부모로부터 행복의 조건을 물려받았지만, 행복을 오히려 불행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잘 난 탓으로 행복해진 줄로 착각하고, 교만하고 방탕하게 산 사람입니다. 자신이 물려받은 행복을 후손과 이웃에게 나누고, 행복을 부지런히 가꾸고 잘 관리한다면, 그가 다시 불행해질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얻기는 어렵지만, 행복을 지키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행복 때문에 도리어 불행해진 사람도 많습니다. 만약 타고난 행복이 없었더라면,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조금씩 행복을 쌓아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타고난 행복에 취해서 흥청망청 살거나 행복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파산과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의 현명한 부모들은 자식을 교육하는 데는 최선을 다하지만, 자식들에게 가급적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을 합니다. 그래야 자식도 잘 되고, 사회도 잘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조상과 부모로부터 행복의 조건을 물려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불행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 때문에 더 불행해진 사람입니다. 타고난 복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노력도 하지 않아서 불행해진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입니다. 비록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행복의 조건을 물려받지 못했어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보람있고 행복하게 산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타고난 복이 없다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점점 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을 가족과 이웃, 국가가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고, "나라님도 가난한 사람을 다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난 불행을 한탄하면서, 불행을 딛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이웃들에게까지 불행을 가져다주는 못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사람만은 되지 맙시다.
일평생 행복한 사람은 우리가 부러워하거나 존중할 만한 사람은 되어도, 우리가 칭찬하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가장 칭찬하고 존경하고 싶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불행을 딛고 행복을 쟁취한 사람입니다. 불행을 이기고 결국 행복을 일구어낸 입지적인 사람은 자신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들도 행복하게 만들며, 불행한 사람들에게 살아갈 용기와 지혜를 주고, 그래서 세인의 칭찬과 갈채를 받습니다. 요즘에 방영되는 드라마 '영웅시대' 혹은 '신화창조의 비밀'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들은 종종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오늘 저는 바로 이런 사람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약 900년 전에 시리아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이거나 참모총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라면, 그는 상당히 출세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문 5장 1절은 그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왕이 매우 아끼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큰 용사'라고 합니다. 즉 그는 '강한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행복이 타고난 것인지, 그의 노력의 대가인지는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일수록 가문과 전통의 혜택을 많이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타고난 복이 많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타고난 복으로만 가지고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왕에게 아낌을 받고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피눈물이 나는 노력을 기울였을 겁니다. 여하튼 그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으로 바뀌고 맙니다. 즉 그는 옛날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부정한 것으로 여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문둥병은 고치기 어려운 병인데다가, 더욱이 문둥병자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습니다. 문둥병은 육체적인 병에 더하여, 사회적인 고립과 차별과 외로움이 더한 병입니다. 더욱이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문둥병자는 운명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더 이상 불행하다고 할 수 없이 지독히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아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왜 문둥병자가 되었는지 성경은 밝혀주지 않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그가 잘 불결하게 살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청결하게 살았더라도, 누구나 돌림병은 걸리기가 쉽습니다. 추측하자면, 그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자주 집을 떠나 야산과 들에서 군사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불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전쟁터는 썩은 음식과 동물과 사람의 썩은 시체가 뒹굴고 있었을 것이고, 손발을 씻기도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그는 아마다 직업 때문에 문둥병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좌우간 그는 갑자기 행복한 처지에서 불행한 처지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갑자기 불행해지면, 늘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불행에 대한 내성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자살합니다. 편하게 살던 부잣집 아들이 군대에 가서 고생을 못 참아 자살을 하거나,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망하면 일가족이 자살을 결심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좌우간 존귀하고 명예롭고 힘세던 나아만 장군은 갑자기 가장 더럽고 불쌍하고 불운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그래도 그는 정신적인 훈련이 잘 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세상을 도피하거나 남을 괴롭혔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니, 그는 참으로 꿋꿋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결책은 생각보다 쉬운 것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을 때에 집으로 끌고 온 하녀가 "이스라엘에 있는 예언자를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귀뜸을 해 주었습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 그대도 나아만은 비천한 계집종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이스라엘에 건너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나아만이 병을 고칠 수 있었는지?" 그 첫 단서를 볼 수 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일 뿐만 아니라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는 온 가족과 부하를 시켜서 온갖 약을 구해오거나 용하다고 소문난 의사를 찾아보라고 명령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집의 여종의 말을 믿고 순순히 따랐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음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극도로 심약해질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매우 완고하고 교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에 걸린 처지에서조차 위세와 명예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람의 자존심은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나아만이 위풍당당하게 엘리사의 집에 당도하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약소국가의 이름도 없는 종교 지도자 엘리사가 당연히 자신을 귀빈으로 생각하여 융숭하게 맞이해 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사는 얼굴을 내보이기는커녕 아랫사람을 시켜, 다음과 같은 말만 전달하였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라. 그러면 살이 깨끗해 질 것이다"(5:10). 이런 대접에 나아만은 불쾌하여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병을 고치러 도움을 받으러 온 약자의 신분임을 잊어버리고, 강대국 시리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장관을 푸대접한다고 심히 불쾌하였습니다. "나를 정중히 맞이해 주고,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내 상처에 직접 안수하여 병을 고쳐주어야 하지 않는가? 더욱이 우리 나라의 크고 맑은 강을 놔두고 왜 작고 더러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인가?"하고 불평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나아만은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둔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여종의 조언을 받았던 그는 이제 지혜로운 부하의 조언을 받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 한 일을 하라고 해도 못 하실 까닭이 있습니까? 몸을 씻으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까짓 일을 못하실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나아만은 마음을 돌이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내던 나아만의 인간적인 모습과, 그래도 병을 낫기 위해서는 평소에 호령하던 부하의 말을 듣는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연민과 존경심을 동시에 갖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불행하더라도,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저도 어려움을 당해보니, 스스로 겸손해질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평범하게 느껴지던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던지요!
요단강 물이 시리아의 여러 강들과 달리 그 어떤 특별한 효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좌우간 옛날부터 물은 정화와 치료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세례는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더욱이 요단강은 불신앙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단강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쳤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아만은 자기가 믿지도 않던 이방인의 신의 이름으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새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가 병에 걸렸을 때, 적국이고 약소국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찾아가도록 조언을 해 준 사람은 작은 계집종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이의 말에 어린이처럼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국 병에서 나았을 때, 그의 피부도 어린 소년처럼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순수한 순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상징합니다.
누구나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평소에 행복한 사람도 갑자기 불행해질 수 있고, 평소에 불행하던 사람도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더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왜 나만 이런 불행을 당하는가? 왜 나는 갈수록 불행해지기만 하는가?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며,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등등 온갖 의심을 품으며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결국 믿음과 교회에서 떠나 다른 힘들과 다른 신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오직 불행일 따름이지,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으로 통하는 문일 수가 있습니다.
불행에 빠지지 않고 불행에 저항했던 나아만은 결국 하나님의 종에게 순종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신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었지만, 이제 후로는 그의 가치관과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5:15). "이제부터는 주님 외에 다른 신들에게는 번제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5:17). 나아만은 육체적으로만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대했던 것과 하나님이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도 바로 육신의 치유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보다 불행을 주실 때, 행복보다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더욱 새로워지고, 우리가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고통에는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고통의 문 앞에는 더 큰 행복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통과 불행을 대하는 방식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행이 오면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고통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불행이 없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일이 별로 없는데도 불행이 닥쳐오면, 이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과 이웃을 더욱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겨져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할 때,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되기를 그칩니다. 불행은 단지 해결될 뿐만 아니라, 더 큰 행복의 열매를 키우는 겨자씨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가 어지럽고 경제적으로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도와 파산과 이별과 이혼과 강도와 도적이 횡행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은밀히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을 바치고, 종과 같은 전적인 순종을 바칩니다. 그리한다면, 우리도 나아만처럼 이전에는 불행하였으나, 앞으로는 행복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웃과 후손에게까지 널리 미치는 복의 근원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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