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잘 배우고 커가는 7가지 법칙
본문
1. 법칙, 가르침과 배움의 전 과정을 이해하라
배움은 여러 단계로 나눠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다. 어떤 단계와 요소들이 배움에 들어 있는지 잘 이해해야 더 잘 배울 수 있다. 일리노이 대학을 세웠으며 미국의 공교육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교육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밀턴 그레고리(John Milton Gregory, 1822-1898)는 가르침과 배움에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 했다. 가르치는 과목 혹은 기술, 혹은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배울 의욕이 있는 학습자가 있어야 한다. 교사와 학습자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여 가르칠 학습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학습자의 지성을 자극하고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의 말과 생각으로 배운 바를 정리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모든 가르침과 배움에는 복습과 평가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위의 과정과 요소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효과적인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면에 강하고 어떤 면에 약한 학습자인지 스스로 점수 매겨보는 것으로 좋은 학습자가 될 준비를 갖추자. (예를 들어,‘ 내게는 좋은 교사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배운 내용을 내 생각과 말로 정리할 수 있는가’등등.)
2법칙, 배우려고 하지 말고 빠지려고 하라
교사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이끌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학생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배우는 사람(학생)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요소가 있다. 다름 아니라‘관심’과‘집중’이다. 학생은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사람을 말한다. 집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수동적 집중, 의지적 집중, 몰입적 집중이다. 수동적인 집중력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집중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무거운 물건이 떨어질 때 나는 굉음, 어린아이의 큰 울음소리 등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의지적인 집중은 이와 반대이다.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루는 집중이다. 다른 것들을 하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결단에서 나온다. 잘 배우는 사람이 되려면 적극적인 집중력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어떤 때는 지나친 집중력이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때는 언제인가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몰입하는 경우이다. 배우려는 내용에 ‘쏙’ 빠지는 것이다.
3법칙, 외우려고 하지 말고 즐기려고 하라.
지식은 물건을 건네받듯이 전수되지 않는다. 생각(교훈, 권면 등등)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 자신이 궁리하고 고민해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되짚어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적용, 실천해보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스스로 고민하는 학습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지성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생각이나 정보를 저장해 놓는 창고가 아니다. 지성은 적절한 동기가 주어질 때에만 깨어나는 힘이다.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소음이 우리에게 적절한 동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각이 반응해도 지성이 개입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성은 그러면 언제 깨어나는가 교사가 야단을 쳐도, 공부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심이 가는 대목에서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한다. 그렇다. 관심은 지성을 여는 열쇠이다. 관심의 자극을 먹고서야 우리의 지성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심이 늘면, 집중력이 늘고, 집중력이 늘면 훌륭한 학습자가 되는 것이다. 관심의 끄나풀을 잡아라! 배움의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
4법칙, 무관심과 산만함을 적절하게 해결하라
집중을 막는 두 방해물이 있으니 무관심과 산만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패.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는 법. 무관심과 산만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무관심은 배워야 할 내용과 주제가 충분히 끌리지 않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이 있을 때도 집중하기 어렵다. 몸이 극도로 피곤하거나 아파도 집중할 수 없다. 산만함은 집중의 반대가 아니라, 흩어진 집중, 초점이 없는 집중이라 할 수 있다. 배우려는 의욕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의욕이 있지만 모아져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통제되지 않은 강한 학습 의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좌불안석’으로 이름 난 어린이가 뛰어난 학습 능력을 지닌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조건 자책하거나 억지로 학습 시간을 늘리려고 하지 말고, 몸의 상태를 스스로 살피고 적절히 쉬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 ‘나는 집중력이 없어서……’‘산만하니까…....’하고 포기하지 말고, 의욕 과잉이라고 문제를 정의해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교사에게 주는 충고. 배우려는 의지가 별로 없는 학습자들(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예비군훈련장이나 민방위교육장을 떠올리면 된다. 아빠엄마 손에 거의 억지로 끌려 교회에 나온 십대 청소년도 여기에 해당)을 가르치는 교사일수록 눈맞춤을 잘하고 제스처를 화려하게 써야 한다. 학습자들은 교사의 응시와 높이 올린 손을 주목한다니까.
5법칙, 자기 생각과 말로 요약하고 적용하라.
교사가 자기 아는 바를 학습자들 앞에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을 교육이라 하지 않는다. 진정한 배움은 선생의 말을 고대로 암기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학습은 교사의 몫이 아니라 학습자의 몫이다. 우리는 어떤 때, 어떻게 더 많은 배움을 얻게 되는가 암기와 흉내가 가장 낮은 단계의 학습임을 기억하라. 생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암기보다 나은 단계이다. 교사가 전하려는 의미를 왜곡 없이 자기 말로 정확하게 옮겨낼 수 있으면 큰 발전이다. 학습자 스스로가 배운 내용의 증거를 찾으려 한다면 대단한 진보이다(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이랬다. 행17:11).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배운 지식을 사용하고 적용할 수 있으면 최상이다. 암기-이해-요약-증거수집-적용. 이런 과정이 다 일어나기 전에는 진정으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제자반에서 성경암송을 잘 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과연 그러한지 고민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는 경지에로 까지 나아가자.
6법칙,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해보라
예를 들어 성경개관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자. 성경지리를 배우는 시간이다. 목사님이 아무리 열심히 성경시대 팔레스틴의 지정학적 위치, 기후, 특산물, 주변국가, 지리적인 특성, 강수량 등등을 설명해도 배우는 시간 잠깐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기 생활과 관계가 적은 정보는 빨리 잊어버리는 우리 머리의 구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과목을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쉽게 정복된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거기에 답을 해보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팔레스틴에 닿으려면 어떤 행로를 잡는 게 가장 경제적인 여행일까”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시골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을까” “회당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여 얻은 지식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큐티에서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 주시는 교훈을 묵상, 삶에 진실하게 적용하는 모델이나, 귀납법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때 본문을 향해 많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문제를 만들고 답할 때 얻을 수 있는 학습효과를 감안한 것이다.
7법칙, 과제를 하고 시험을 치러라.
모든 학습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과제와 시험이다. 그러나 과제와 시험이 없으면 세 가지를 할 수없다. 모르는 점을 확실하게 보충할 수 없다. 배운 지식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배운 지식을 내게 편한 대로 쓸 수 없다. 그래서 시험을 무시한다. 시험의 목적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응시한다. 시험을 치러야 할 때를 놓쳐 무엇을 배웠는지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시험에 임한다. 벼락치기 단순 암기로 생기 없이 시험을 준비한다. 이런 학습자는 제대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 역시 제자훈련의 마지막에 시험을 두셨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복 과정이 바로 그것(요 22:15-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는 제자도에 대해 결정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잘 배운 사람은 시험도 잘 치른다는 점을 명심하자.
배움은 여러 단계로 나눠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다. 어떤 단계와 요소들이 배움에 들어 있는지 잘 이해해야 더 잘 배울 수 있다. 일리노이 대학을 세웠으며 미국의 공교육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교육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밀턴 그레고리(John Milton Gregory, 1822-1898)는 가르침과 배움에 아래와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 했다. 가르치는 과목 혹은 기술, 혹은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배울 의욕이 있는 학습자가 있어야 한다. 교사와 학습자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여 가르칠 학습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학습자의 지성을 자극하고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의 말과 생각으로 배운 바를 정리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모든 가르침과 배움에는 복습과 평가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위의 과정과 요소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효과적인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면에 강하고 어떤 면에 약한 학습자인지 스스로 점수 매겨보는 것으로 좋은 학습자가 될 준비를 갖추자. (예를 들어,‘ 내게는 좋은 교사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배운 내용을 내 생각과 말로 정리할 수 있는가’등등.)
2법칙, 배우려고 하지 말고 빠지려고 하라
교사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이끌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학생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배우는 사람(학생)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요소가 있다. 다름 아니라‘관심’과‘집중’이다. 학생은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사람을 말한다. 집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수동적 집중, 의지적 집중, 몰입적 집중이다. 수동적인 집중력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집중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무거운 물건이 떨어질 때 나는 굉음, 어린아이의 큰 울음소리 등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의지적인 집중은 이와 반대이다.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루는 집중이다. 다른 것들을 하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결단에서 나온다. 잘 배우는 사람이 되려면 적극적인 집중력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어떤 때는 지나친 집중력이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때는 언제인가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몰입하는 경우이다. 배우려는 내용에 ‘쏙’ 빠지는 것이다.
3법칙, 외우려고 하지 말고 즐기려고 하라.
지식은 물건을 건네받듯이 전수되지 않는다. 생각(교훈, 권면 등등)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 자신이 궁리하고 고민해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되짚어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적용, 실천해보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스스로 고민하는 학습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지성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생각이나 정보를 저장해 놓는 창고가 아니다. 지성은 적절한 동기가 주어질 때에만 깨어나는 힘이다.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소음이 우리에게 적절한 동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각이 반응해도 지성이 개입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성은 그러면 언제 깨어나는가 교사가 야단을 쳐도, 공부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심이 가는 대목에서는 눈을 반짝이며 집중한다. 그렇다. 관심은 지성을 여는 열쇠이다. 관심의 자극을 먹고서야 우리의 지성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심이 늘면, 집중력이 늘고, 집중력이 늘면 훌륭한 학습자가 되는 것이다. 관심의 끄나풀을 잡아라! 배움의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
4법칙, 무관심과 산만함을 적절하게 해결하라
집중을 막는 두 방해물이 있으니 무관심과 산만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패.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는 법. 무관심과 산만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무관심은 배워야 할 내용과 주제가 충분히 끌리지 않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이 있을 때도 집중하기 어렵다. 몸이 극도로 피곤하거나 아파도 집중할 수 없다. 산만함은 집중의 반대가 아니라, 흩어진 집중, 초점이 없는 집중이라 할 수 있다. 배우려는 의욕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의욕이 있지만 모아져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통제되지 않은 강한 학습 의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좌불안석’으로 이름 난 어린이가 뛰어난 학습 능력을 지닌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조건 자책하거나 억지로 학습 시간을 늘리려고 하지 말고, 몸의 상태를 스스로 살피고 적절히 쉬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 ‘나는 집중력이 없어서……’‘산만하니까…....’하고 포기하지 말고, 의욕 과잉이라고 문제를 정의해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교사에게 주는 충고. 배우려는 의지가 별로 없는 학습자들(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예비군훈련장이나 민방위교육장을 떠올리면 된다. 아빠엄마 손에 거의 억지로 끌려 교회에 나온 십대 청소년도 여기에 해당)을 가르치는 교사일수록 눈맞춤을 잘하고 제스처를 화려하게 써야 한다. 학습자들은 교사의 응시와 높이 올린 손을 주목한다니까.
5법칙, 자기 생각과 말로 요약하고 적용하라.
교사가 자기 아는 바를 학습자들 앞에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을 교육이라 하지 않는다. 진정한 배움은 선생의 말을 고대로 암기하거나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학습은 교사의 몫이 아니라 학습자의 몫이다. 우리는 어떤 때, 어떻게 더 많은 배움을 얻게 되는가 암기와 흉내가 가장 낮은 단계의 학습임을 기억하라. 생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암기보다 나은 단계이다. 교사가 전하려는 의미를 왜곡 없이 자기 말로 정확하게 옮겨낼 수 있으면 큰 발전이다. 학습자 스스로가 배운 내용의 증거를 찾으려 한다면 대단한 진보이다(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이랬다. 행17:11).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배운 지식을 사용하고 적용할 수 있으면 최상이다. 암기-이해-요약-증거수집-적용. 이런 과정이 다 일어나기 전에는 진정으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제자반에서 성경암송을 잘 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과연 그러한지 고민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는 경지에로 까지 나아가자.
6법칙,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해보라
예를 들어 성경개관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자. 성경지리를 배우는 시간이다. 목사님이 아무리 열심히 성경시대 팔레스틴의 지정학적 위치, 기후, 특산물, 주변국가, 지리적인 특성, 강수량 등등을 설명해도 배우는 시간 잠깐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기 생활과 관계가 적은 정보는 빨리 잊어버리는 우리 머리의 구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과목을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쉽게 정복된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거기에 답을 해보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팔레스틴에 닿으려면 어떤 행로를 잡는 게 가장 경제적인 여행일까”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시골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을까” “회당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여 얻은 지식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큐티에서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 주시는 교훈을 묵상, 삶에 진실하게 적용하는 모델이나, 귀납법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때 본문을 향해 많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문제를 만들고 답할 때 얻을 수 있는 학습효과를 감안한 것이다.
7법칙, 과제를 하고 시험을 치러라.
모든 학습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과제와 시험이다. 그러나 과제와 시험이 없으면 세 가지를 할 수없다. 모르는 점을 확실하게 보충할 수 없다. 배운 지식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배운 지식을 내게 편한 대로 쓸 수 없다. 그래서 시험을 무시한다. 시험의 목적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응시한다. 시험을 치러야 할 때를 놓쳐 무엇을 배웠는지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시험에 임한다. 벼락치기 단순 암기로 생기 없이 시험을 준비한다. 이런 학습자는 제대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 역시 제자훈련의 마지막에 시험을 두셨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복 과정이 바로 그것(요 22:15-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는 제자도에 대해 결정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잘 배운 사람은 시험도 잘 치른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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