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예수의 흔적, 나는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
본문
예수의 흔적, 나는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갈6:17-18)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2017년 1월 1일, 송구영신예배 시작한지가 엊그젠가 같은데, 벌서 2017년 한 해를 보내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오늘은 1년 52 주일 중 마지막 주일이며, 2017년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2017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2017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2018년 새로운 역사가 우리 앞에 다가 올 것입니다. 이제 몇 시간이라도 2017년을 제대로 마무리 못한 사람은 잘 정리해서 새해를 맞이하기 바랍니다.
저도 2017년 마지막 날이며, 주일이기 때문에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의미있는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예수의 흔적, 나는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
<본 문>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6장까지 있으며, 17과 18절은 6장의 마지막 절이기 때문에 당연히 결론에 해당됩니다.
: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절은 마지막 인사이기 때문에 실상은 17절이 갈라디아서 6장의 결론이며, 또한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7절과 18절은 각각 다른 문장으로서, 독립적인 문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7절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요소입니다.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괴롭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괴로움인지는 몰라도 그 동안 수많은 괴로움을 당해 왔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후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당할 괴로움이 더 남아 있는 듯싶습니다.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취지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하는 호소입니다. 권면의 성격보다는 호수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호소문은 권면보다 더 강한 요구성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만 우리 공부할 때는 학생들이 ‘웅변’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학생웅변대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입상만 하면 말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중국에도 옛날에는 이런 웅변 문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옛날에 웅변했던 연사(演士)들이 갑자기 생각나서 옛 모습을 추억하며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연사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당위성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다가 끝 부분에서, “오른손으로 힘 컷 주먹을 쥐고 높이 들면서(제스처), 나 000연사는 ~~~ 여러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라고 관중들에게 최대한 큰 목소리로 유도하면 그때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을 해 줍니다. 호소력이 강할수록 박수 소리는 크고 오래 갑니다.
여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마치 어린 연사들이 호소했던 것처럼 그런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면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의 호소문에는 당시 바울의 깊은 고뇌가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불러 제자 훈련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도권의 대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네가 예수께 언제 사도로 임명받았느냐. 12사도 명단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어디 있느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도 바울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사도 훈련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몇 번 나오는 사도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바울은 사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면서 선택된 사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도가 된 바울에게 육신적인 관점으로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면, 바울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당당하게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갈라디아 지역에서 특히 사도권의 대한 도전이 더욱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갈라디아서 1:1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권의 대한 변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바울의 사도권의 대한 도전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바울은 1장 1절부터 자기변호로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공생애 부름을 받고, 제자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 훈련도 받지 않은 예수님께 받는 당당한 사도(제자)입니다(행9장).
그리고 서신 마지막에서는 ‘이후에는 괴롭게 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괴롭게’라는 말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단순히 육체적인 괴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괴로움은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괴로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도권의 도전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으로 오는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받은 폭력도 바울에게 있어서 적잖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괴로움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잘못된 복음, 즉 율법주의에 미혹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에게 유혹받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영적인 괴로움도 있었습니다. (1:6-10)
바울의 서신에는 교리적인 성격을 띤 서신들이 있습니다. 로마서가 제 1의 교리 서신서 라면 갈라디아서는 제 2의 교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교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는 그 만큼 교리적인 것이 필요로 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잘못된 복음이 갈라디아 지역을 엄습하고 있으니 영적인 지도자로서 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괴로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을 보내면서 “너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복만 받아야 하되, 10배, 20배 받을 것”이라고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1:8, 12, 2:3, 9, 3:11-12, 4:5 등 거듭 강조)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과 핍박’은 앞으로 다가올 것을 예측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복음을 전하면서 꺾었던 체험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늘에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복덩어리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과 ‘고난’은 지폐 앞뒤 면과 같은 원리이며, 기차 레일과 같기도 합니다.
돈 100원 짜리가 앞면은 진짜인데 뒷면은 가짜라면 화폐의 가치가 전혀 없는 ‘위조지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설명, 위조지폐)
복음을 자신 있게 당당하게 전해야 하겠는데 고난이 있는 복음은 전하지 않겠다는 말은 100원 짜리 앞면은 진짜인데 뒷면은 가짜와 같은 것입니다. 화폐가 양면이 진짜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듯이 ‘복음’과 ‘고난’도 함께 했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기차 레일은 어떻습니까? 기차 레일은 항상 동일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레일이 일정한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이탈을 하면 기차는 탈선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길은 기꺼이 가겠다고 하면서, 고난의 길은 굳이 가지 않는다면 마치 레일이 변형되어 대형 사고가 난 것과 같습니다. 기차의 대형사고,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난을 싫어하는 복음은 기차 탈선 사고와 같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다른 사역자들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과 ‘고난’은 결코 각각 별개의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같이 가야 할 길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17절 두 번째 요소입니다. 바울은 다음으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흔적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흔적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한 후에 뒤에 남겨진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밥을 먹은 다음에는 어떤 흔적을 남길까요. 뻔한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흔적은 어린 아이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남깁니다. 어떤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며, 어떤 사람은 남긴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애씁니다.
흔적은 이 만큼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남겼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도둑이 집에 들어와 물건들을 훔쳐갔습니다. 주인이 공안(公安, 경찰)에 신고하면 공안들이 즉각 출동하여 집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왜 경찰들이 집안을 샅샅이 뒤집니까? 흔적, 곧 증거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공안은 도둑이 범죄에 사용한 도구를 주로 찾지만 여의치 않으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눈에 보이는 흔적을 찾지만, 지문과 같은 보이지 않는 흔적을 돋보기로 찾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카락 한 개를 가지고도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첨단 과학 수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몸에 남긴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이며, 어떤 흔적이 남아 있기에 이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흔적’에 대해 당시 언어적 의미와 사회적 문화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흔적’은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적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로 ‘흔적’에 해당되는 ‘스티그마타’라는 말은 주인이 자기 소유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소나 양에게 불도장인 화인(火印)을 찍어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불도장으로 찍어야 확실한 흔적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소유권을 불도장으로 확실하게 표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화인으로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하기 위해 성령으로 인치십니다.
도적이 머리카락을 남기고 갔지만 바람에 날아 가버리면 확실한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문을 남기고 갔다면 그것은 확실한 흔적(증거가)이 됩니다. 그래서 범인은 지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장갑을 끼고 범죄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안은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은 지문이라도 찾으려고 돋보기를 사용하며 애를 씁니다. 그런데 불도장인 화인은 지문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수많은 정신적 고난과 핍박의 흔적 그리고 몸에 실제로 남아 있는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구체적인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몸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흔적들은 어떤 것들일까? 바울은 자기 몸에 남아 있는 예수의 흔적들에 대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습니다. (고후 11:22-29)
22-25절) 육체적 흔적입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이런 흔적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받았던 고난과 핍박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충돌로 받은 고난과 핍박을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26-27절)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 흔적입니다. “옥게 갇힌 일, 강도의 위험, 추위에 굶고 목마름, 헐벗음” 등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29)절을 영적으로 받은 흔적입니다. 교회를 위한 염려, 마음으로 애타는 것은 육체적인 고난이라기보다는 심령의 고난, 영적으로 싸운 고난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적인 흔적, 영적인 흔적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육적인 고난과 영적인 고난은 고린도서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분인 갈라디아서에서도 육적이며 영적인 핍박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며, 이 흔적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남긴 예수의 흔적은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바울의 전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예수의 흔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흔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예수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아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2017년 한 해 동안 남긴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8절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통례(通例)적인 인사입니다. 여기 ‘은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속사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구원은 각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삼중적인 이름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속의 은혜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제하면서, 사람의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2:8, 9)
<결 론>
사람은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어떤 형태라도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흔적에 따라 평가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 흔적은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며, 나쁜 흔적은 나쁜 결과로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나쁜 흔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안이 나쁜 흔적을 찾는 것을 뉴스를 통해 항상 봐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흔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물론 나쁜 흔적보다 좋은 흔적이 우리 눈에는 더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보일 정도가 아니라 일일이 모두 기록해 놓습니다. 확실한 흔적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지만 물질 때문에 스승인 예수를 파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빌라도/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세 번이나 확인했으나 정치적 명예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흔적을 남기므로, 사도신경을 할 때마다 빌라도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물질과 명예 때문에 이런 흔적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율법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교, 오늘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유대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유대교의 대한 ‘충성의 흔적’은 남아 있겠지만 ‘예수의 흔적’은 아마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바울의 두 흔적의 역사를 가름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 유대교의 대한 충성의 흔적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다는 교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 등등 이런 유대교의 흔적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잘못된 유대주의적인 교리를 가감하게 버렸고, 그리고 율법의 울타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서 예수의 복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위대한 흔적은 아닐지라도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야 합니다. 젊은 청년(제자)들은 앞으로 그렇게 하겠지만, 성도님들 중에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이제 남기지 못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친구, 자식, 후손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간곡히 말하며 전도하는 것도 흔적입니다. 전도는 결코 작은 흔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젊은 사람들이 전도한 것은 큰 흔적이고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한 전도는 작은 흔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흔적은 시공간, 세월(나이를)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서도 남길 수 있는 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2017년에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흔적’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이웃)에서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흔적을 남깁니다.
여러분은 2017년 한 해 동안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혹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았습니까?
혹은 자기가 남긴 흔적을 팍팍 지우려고 애쓰지는 않았습니까?
혹은 1년 동안 흔적과 상관없는 무감각하게 살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이 네 가지 중에 어디에 해당됩니까?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흔적,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울처럼 보일만한 예수의 흔적은 아니라도 나만이 보일 수 있는 흔적은 있습니까?
여러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의 흔적은 고난과 핍박에만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순종)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몸에 남겨진 예수의 흔적은 고난에 참여하여 얻은 거룩한 증표이기도 합니다.
바울에 있어서 고난과 핍박은 소극적인 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은 적극적인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남긴 예수의 흔적은 바울이 남긴 흔적이지 결코 내가 남긴 흔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 2017년 한 해 동안 예수의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이 물음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면서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017년이 우리의 날만이 아니기 때문에 2017년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오늘 예수의 흔적에 대해 말씀을 들었으므로 2018년에는 예수의 흔적을 꼭 남기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오늘 설교의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 2017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2018년 새해를 기쁨으로 맞이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2018년첫 시간을 송구영신예배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저녁 7시에 다시 교회레 모입니다. 저녁 시간의 일정은 식사와 친교 시간을 갖는 다음에 2017년 보내는 기도와 0시에 새해를 맞이하는 영신(迎新)예배로 끝마칩니다.
“여러분 영혼과 삶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흔적과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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