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그리스도와 진리의 성령
본문
정상적인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코 둘로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입니다.
자녀가 두 분 중 한 분에게 말하면 결국 두 분이 다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어머니가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말하면 결국 아버지가 알게 됩니다. 또 필요한 돈을 줄 때에도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나 어머니가 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이 다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무엇을 얻을 때 "이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로부터 받을 것인가"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과 성령님 두 분 중에서 어느 분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분은 따로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로는 두 분이 다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마치 다른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런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는 믿는데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머리와 방법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하여 기도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 하나만 붙들고 삽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 이런 신앙인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성령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체험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이미 마스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영적인 비밀을 알기 원하고 남들이 전혀 체험하지 못한 어떤 영적인 경험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진부하고, 교회생활 역시 너무나 시시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평범한 성경적인 진리는 너무나도 가소롭습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배워야 하고 무엇인가 특별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런 두 가지 경함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분리시켜서 어느 한 분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매 순간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이나 자기 의지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난 새로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늘 습관적으로 기계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에 역동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계적이고 타산적이고 핑계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얻기 위하여 더욱 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성령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더욱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13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를 것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이 지금은 그 말씀을 감당치 못하므로 다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3)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시지만 듣는 자들이 감당치 못해서 다 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감당한다"는 말은 "소화해내다, 견뎌내다, 받아들여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란 음식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도 감당되지 않는다면 쓸데가 없습니다. 적당히 먹고 소화를 해야 음식도 몸에 영양이 되는 것입니다. 약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양약이라도 감당치 못하면 약에 취해서 오히려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감당치 못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진리를 전하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는가 하면 낙심하게도 됩니다.
히5:12-14절...................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감당하게 하고, 핍박을 감당하게 하여, 내게 주어진 사건을 내게 향한 말씀으로 소화하게 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한 젊은 여인이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모처럼 마음먹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시어머니가 자기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전부 일러 받친 것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오자 마자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 잘못을 목사님에게 일러 바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해를 하거나 반항을 한다면 전혀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하실 말이 많지만 지금은 제자들이 감당치 못하므로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모르는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진리"라는 것은 완성된 진리를 말합니다. 보다 풍성하고 보다 완전한 진리는 앞으로 오실 성령, 그 분이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진리를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게로 인도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전하고 나서 팔짱만 기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도록,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즉 그 진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도록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하라, 겸손하라는 말씀이 선포되면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열심히 강권적으로 창조적으로 역사 하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여기에 "인도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양치는 목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양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합니다. 처음에 양들이 가지 않으려 하면 달래기도 하고 끌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지 않으면 때리며 강권적으로 번쩍 들어서 옮기기도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신다 함은 우리의 감정도 지식도 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인도되지 않을 대에는 잡아끌어서라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가 길고 지팡이 끝이 구부러진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지 않으면 목을 걸어서 잡아 당기겠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도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더 풍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성령을 기다려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배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배운 이런 것은 기초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또 교회 안에서 믿는 자들을 어떻게 양육하시며,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라는 것입니다.
13절 끝 부분을 보시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라는 것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이런 지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매순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욱 더 성령의 깨우침과 성령의 능력 주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기다려야만 했고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의 상태가 이러했다면,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도 없고 본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우리들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신앙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의지할 필요 없이 우리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성령의 힘주심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나도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신앙이 거의 말라빠진 지푸라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상하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외에는 그 이상의 것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국의 자격증을 따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만약 천국 가는 티켓을 딴 것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지금 바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 왜 이 세상에서 뒤엉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을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일 매일 이 세상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면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타락으로 파괴된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괴된 이 세상의 재건(회복)을 위하여 여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상을 버리고 속히 요단강을 건너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가 막힌 새로운 건축가로 사용하시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은 죄 때문에 완전히 재건(회복)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창조를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믿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교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매일 매일 폐허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건축가의 자세로 일하게 될 것인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이제부터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사느냐 하는데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처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를 위한 것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더 깨닫기 위하여 성경을 살피지 않으며, 왜 더 능력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진리와 능력이 있고, 우리는 성령이 오신 지금 것을 깨달아야 하며 그 능력을 받아서 역동성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역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동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 자신의 신앙에 안주해서 성령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패역한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자라기를 거부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나이를 먹고 학년을 올라가면 더 어려운 공부를 배워야 하니까, 아예 우리는 자라기를 거부하고 매일 어린아이와 같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편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하는 그 짓만 되풀이해서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부모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도대체 저 아이를 어디에 쓰겠느냐"라고 깊이 탄식할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오늘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능력에 대한 갈급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무지하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폐허 같은 이 세상에 줄이라도 하나 바르게 그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분의 힘 주심이 없으면 우리는 매일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쓰려져 있으니까 아예 쓰러져 있는 것을 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신앙의 불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참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이 바른 삶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다시 말해서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12:49절에서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체험으로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이미 진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체면이든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서 지니치게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에 말하기를 14절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 하시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줄 알지만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우기 그가 죽었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어떤 지위와 위치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십니다(행5:32, 고전2:9-12).
15절에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셔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하늘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채우심을 얻어 풍성함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습관적이고 힘없는 신앙은 병든 신앙이고 미숙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삽니다.
이것은 신앙의 초보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대체 파괴된 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알게도 하고, 믿게도 하고, 받아들이게도 하고, 순종하게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믿음의 수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주십시오라고 달라고 기도를 하다가, 조금 나아지면 알게 해주시고 가르쳐 주십사고 기도하고, 조금 더 나아지면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선하신 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제부터는 청구서만 제출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사고 하는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성령충만한 성도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진리를 만나고 진리 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불구자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참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이 바른 삶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두 분 중 한 분에게 말하면 결국 두 분이 다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어머니가 알게 되고 어머니에게 말하면 결국 아버지가 알게 됩니다. 또 필요한 돈을 줄 때에도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나 어머니가 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이 다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무엇을 얻을 때 "이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로부터 받을 것인가"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과 성령님 두 분 중에서 어느 분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분은 따로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로는 두 분이 다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마치 다른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런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는 믿는데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머리와 방법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하여 기도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 하나만 붙들고 삽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 이런 신앙인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성령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체험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이미 마스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영적인 비밀을 알기 원하고 남들이 전혀 체험하지 못한 어떤 영적인 경험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진부하고, 교회생활 역시 너무나 시시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평범한 성경적인 진리는 너무나도 가소롭습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배워야 하고 무엇인가 특별한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런 두 가지 경함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분리시켜서 어느 한 분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매 순간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이나 자기 의지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난 새로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늘 습관적으로 기계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에 역동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계적이고 타산적이고 핑계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얻기 위하여 더욱 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성령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더욱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13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를 것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이 지금은 그 말씀을 감당치 못하므로 다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3)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시지만 듣는 자들이 감당치 못해서 다 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감당한다"는 말은 "소화해내다, 견뎌내다, 받아들여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란 음식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도 감당되지 않는다면 쓸데가 없습니다. 적당히 먹고 소화를 해야 음식도 몸에 영양이 되는 것입니다. 약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양약이라도 감당치 못하면 약에 취해서 오히려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감당치 못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진리를 전하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는가 하면 낙심하게도 됩니다.
히5:12-14절...................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감당하게 하고, 핍박을 감당하게 하여, 내게 주어진 사건을 내게 향한 말씀으로 소화하게 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한 젊은 여인이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모처럼 마음먹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시어머니가 자기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전부 일러 받친 것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오자 마자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 잘못을 목사님에게 일러 바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해를 하거나 반항을 한다면 전혀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하실 말이 많지만 지금은 제자들이 감당치 못하므로 말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모르는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진리"라는 것은 완성된 진리를 말합니다. 보다 풍성하고 보다 완전한 진리는 앞으로 오실 성령, 그 분이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진리를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게로 인도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전하고 나서 팔짱만 기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도록,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즉 그 진리에게로 올 수밖에 없도록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하라, 겸손하라는 말씀이 선포되면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열심히 강권적으로 창조적으로 역사 하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여기에 "인도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양치는 목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양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합니다. 처음에 양들이 가지 않으려 하면 달래기도 하고 끌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지 않으면 때리며 강권적으로 번쩍 들어서 옮기기도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신다 함은 우리의 감정도 지식도 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인도되지 않을 대에는 잡아끌어서라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가 길고 지팡이 끝이 구부러진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지 않으면 목을 걸어서 잡아 당기겠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도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더 풍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성령을 기다려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배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배운 이런 것은 기초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또 교회 안에서 믿는 자들을 어떻게 양육하시며,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라는 것입니다.
13절 끝 부분을 보시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라는 것은 모두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이런 지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매순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욱 더 성령의 깨우침과 성령의 능력 주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기다려야만 했고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의 상태가 이러했다면,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도 없고 본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우리들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신앙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의지할 필요 없이 우리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성령의 힘주심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나도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신앙이 거의 말라빠진 지푸라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상하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외에는 그 이상의 것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국의 자격증을 따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만약 천국 가는 티켓을 딴 것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지금 바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 왜 이 세상에서 뒤엉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을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일 매일 이 세상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면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타락으로 파괴된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괴된 이 세상의 재건(회복)을 위하여 여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상을 버리고 속히 요단강을 건너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가 막힌 새로운 건축가로 사용하시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은 죄 때문에 완전히 재건(회복)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창조를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믿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교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매일 매일 폐허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건축가의 자세로 일하게 될 것인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이제부터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사느냐 하는데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처럼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를 위한 것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더 깨닫기 위하여 성경을 살피지 않으며, 왜 더 능력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진리와 능력이 있고, 우리는 성령이 오신 지금 것을 깨달아야 하며 그 능력을 받아서 역동성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역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동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 자신의 신앙에 안주해서 성령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패역한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자라기를 거부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나이를 먹고 학년을 올라가면 더 어려운 공부를 배워야 하니까, 아예 우리는 자라기를 거부하고 매일 어린아이와 같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편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하는 그 짓만 되풀이해서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부모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도대체 저 아이를 어디에 쓰겠느냐"라고 깊이 탄식할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오늘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능력에 대한 갈급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무지하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폐허 같은 이 세상에 줄이라도 하나 바르게 그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분의 힘 주심이 없으면 우리는 매일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쓰려져 있으니까 아예 쓰러져 있는 것을 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신앙의 불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참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이 바른 삶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다시 말해서 성령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12:49절에서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체험으로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이미 진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체면이든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서 지니치게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에 말하기를 14절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 하시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은 줄 알지만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우기 그가 죽었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어떤 지위와 위치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십니다(행5:32, 고전2:9-12).
15절에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셔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하늘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채우심을 얻어 풍성함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습관적이고 힘없는 신앙은 병든 신앙이고 미숙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삽니다.
이것은 신앙의 초보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대체 파괴된 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알게도 하고, 믿게도 하고, 받아들이게도 하고, 순종하게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믿음의 수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주십시오라고 달라고 기도를 하다가, 조금 나아지면 알게 해주시고 가르쳐 주십사고 기도하고, 조금 더 나아지면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선하신 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제부터는 청구서만 제출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사고 하는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성령충만한 성도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진리를 만나고 진리 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불구자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참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이 바른 삶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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