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의 책망
본문
가장 큰 죄는 불신앙의 죄이다. 헬라아로 죄를 하말티아(hamartia)라고 하는데 빗나갔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것은 다 죄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할 때 그것이 죄가 된다. 우리가 사는 삶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다. 복잡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죄 때문이다. 파스칼은 "사람이란 동물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뜻있게 사는 실존적 존재"라고 했다. 뜻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문제의 해결이 있다.
의에 대하여 - 주님을 떠난 의(10절)
죄의 개념이 다양하듯이 의의 개념도 다양하다. 자기 의를 앞세우는 사람(롬 10:3)도 있고 율법의 의를 앞세우는 사람(갈 2:21)도 있으며 양심적인 의를 말하는 사람(행 23:1)도 있다. 이런 것들이 의이기는 하지만 참된 의는 아니다. 궁극적인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참된 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겐 정죄함이 없다(롬 8:1)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는 영원한 의이다.
심판에 대하여 - 세상 임금들(11절)
세상 임금에 대하여 심판하셨는데 이는 마귀를 가리킨다. 마귀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분리시키며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왜곡시켜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다. 심판의 대원칙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옥을 예비하신 것은 사람을 그곳에서 벌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마귀를 위해 만드셨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마귀를 따라 살고 마귀를 따라 죽기 때문이다.
롬 8:26에는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탄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또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책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석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다락방 강화입니다. 그중에서 14장은 위로의 말씀이며 15장은 교훈의 말씀이며 16장은 확증의 말씀입니다. 16장 확증의 말씀 중에 봉독한 부분은 성령의 확증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책망하시며 또 확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책망이란 말씀이 나타납니다만 이 낱말 에레그고(elegxo)는 책망한다는 뜻 외에 증거하고 확신시킨다. (요 8:46, 약 2:9)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은 양면적입니다. 한편 책망하고 한편 증거하며 확증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에는 한편은 우리 마음 속에 책망을 일으키시고 그러면서도 한편은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7절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자 예수께서 승천해 가시면 그다음 그가 성령을 땅위에 보내 주신다는 뜻입니다. 즉 성자와 성령은 교대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은 성부시대, 예수께서 땅위에 계시던 때는 성자시대, 오순절 이후는 성령시대라 크게 나누어 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부께서 앞서서 역사하셨고, 성자의 재세시대에는 성자께서 앞서서 역사하셨으며, 오순절 이후 지금은 성령께서 앞서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령시대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책망하시고, 확증시켜 주는 그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증시켜 주는 세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이 말씀을 한 조목씩 묵상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이라는 말씀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가령 효의 개념으로 비유한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데는 옷을 사 드린다거나 여러 가지 물질적인 선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들이 있는데 모든 물질적인 선물은 잘 해 드리면서도 자기 부모를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 하지 않고, 어머니라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남들 보기에는 효자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지극히 불효한 아들이라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순종하고 높입니다만 물질적인 선물을 해드리지 못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다른 모든 도덕적이며 양심적이며 율법적인 모든 것을 다 지킨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개념은 대단히 다양합니다. 가령 불교에서는 죄란 말 대신에 무명이라 합니다만 이는 깨닫지 못하는 것,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뇌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의 윤리의 도리를 어기면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넉사()자 아래 아닐비(非)자를 씁니다만 어떤 목사님이 이 죄(罪)란 글자를 해석하기를 "네가지 아닌 것이 죄이다. 그 네가지 아닌 것은 첫째 옳지 않는 것(不義), 둘째 법을 어기는 것(不法), 셋째 바르지 못한 것(不正), 넷째 순종하지 않는 것, 이 네가지라" 이렇게 해석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이 죄의 정확한 규정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일반 죄의 개념 가운데 첫째로 법적인 죄가 있습니다. 나라의 법을 어겼다거나 십계명을 어겼을 때 그것이 죄가 된다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둘째 윤리적인 죄가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 도덕을 어길 때에 죄라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셋째 양심적인 죄가 있습니다. 법에도 어긋나지 않고, 윤리에도 어긋나지 않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본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죄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 관계가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성경 헬라 말에 죄라는 낱말이 하말티아(hamartia)라는 것을 많이 들으신줄 압니다. 그리고 하말티아는 활쏘는 곳의 표적입니다. 한가운데 동그라미 표가 있고, 그 동그라미 표를 비껴났을 때 하말티아가 됩니다. 즉 하말티아는 비껴났다는 뜻입니다. 우로 비껴났든, 좌로 비껴났든, 힘이 부족해서 미쳐 가지를 못했든, 힘이 남아서 넘어 가버렸든 다 하말티아에 속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목표를 어길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그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것은 다 죄가 됩니다. 다시 말씀해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계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더더구나 요즈음 한국에는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계의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파스칼은 "사람은 동물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뜻있게 사는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본능적인 한도 하에서 살지만 인간은 그 한도를 넘어서 자유롭게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하이덱카는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놓여있는 죽음과 허무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바로 "죄"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계에 문제가 발생하고, 인간은 혼란과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죄는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서 죄가 발생하고 죄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누가 묻기를 "오늘날 미국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오니까"고 하였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부도덕 문제이다" 하였습니다. 영국의 글레드스톤이라는 유명한 수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믿기에 영국 역사에 가장 위대한 수상이었다고 믿습니다만 그분에게 누가 묻기를 "대영제국의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글레드스톤은 "대영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앙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대정치가들도 입을 모아 불신앙이 바로 모든 국가 사회 문제의 근본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10절 말씀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얼핏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말같이 보입니다. 의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죄의 개념이 다양하다고 말씀했습니다만 의의 개념 또한 대단히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를 앞세웁니다. (롬 10:3) 어떤 분은 율법의 의를 앞세웁니다. (갈 2:21) 또 사람에게는 양심적인 의가 있습니다. (행 23:1) 이 모든 것이 의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 율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 양심적으로 당당히 사는 것, 모두 의에 속합니다만 그러나 이 모든 의가 궁극적인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만이 참된 의가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정함이 없다(롬 8:1)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그 의가 진정한 의에 속하고, 궁극적인 의에 속하고, 영원한 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가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에 오시고, 일생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를 맡으셔서 해결해 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만민을 대속하시며,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생애, 그 생애가 우리 의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오시지 않으셨었던들,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아니했었던들, 성업을 마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아니하셨던들 우리는 의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생의 성업을 마치시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일생은 우리에게 의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문자에 옳을 의(義)자입니다. 이 글자를 자세히 보면 양양(羊) 밑에 나아(我)자가 들어가 있습니다만 양은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말씀했습니다. (요 1:29)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억지의 말이 되겠습니다만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신비로운 경지입니다. (갈 2:20)
루터는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나의 의이시오, 나는 당신의 죄로소이다" 한 바가 있습니다. 신비롭고 깊은 신앙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받으신 그 죄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셋째로,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여기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로 마귀를 가리킵니다. 성경 가운데 마귀에 대한 별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이라 하고, 마귀, 바알세불,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6:16) 등등 많은 별명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라는 것도 마귀의 별명에 속합니다.
유대인의 신학에서는 이 땅은 인간이 사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그 중간에 마귀가 역사하는 마귀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귀는 가운데 끼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부단히 분리시키고,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왜곡하며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를 제1세계, 마귀의 세계를 둘째 세계,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셋째 세계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바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고후 12:2), 즉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마귀는 공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중간에 끼어 인간에게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요, 또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임금입니다. 예수님도 왕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라 불리우고 우리의 영원하신 왕이 되십니다. 마귀도 왕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선으로 지배하셔서 영생으로 이끄시는 왕이십니다. 마귀는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여 멸망으로 이끄는 왕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 임금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심판은 이 마귀와 관련됩니다. 심판의 원칙적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마태 25:41에 지옥을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옥을 예비하신 것은 사람을 그곳에서 벌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마귀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마귀를 따라 가기 때문에, 즉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0:10 이하에 보면 심판의 순서가 나타납니다만 먼저 사탄을 불못에 던진다는 사탄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그후의 11절에 흰 보좌의 심판, 즉 모든 불신자의 심판이 따르고 있습니다. 심판은 첫째 원칙적으로 사탄을 대하는 것이고, 불못 지옥의 형벌도 원칙적으로 사탄을 위해서 예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에게는 회개의 가능이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받으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만 사탄의 세계는 전혀 회개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탄을 위하여 처음부터 그를 형벌한 지옥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펴볼 때에 악한 자가 결국은 보응을 받는 심판을 얼마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세의 크고 작은 모든 심판을 궁극적인 심판은 아닙니다. 장차 올 심판에 대한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현세의 종말에서 대심판이 있습니다. 그 대심판 때에 먼저 마귀가 심판을 받고, 그 외에 마귀를 따라간 모든 그의 사자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를 책망하시고, 확증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책망은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의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생을 바치시고 아버지께 가신 그 생애가 우리 의의 근거가 됨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의 원칙적인 상대인 것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당신의 영감을 내게 갑절이나 더하소서" 답을 하였습니다. (왕하 2:9) 어떤 성도가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명예도 권세도 재물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영감이시라"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1907년 우리 한국을 휩쓸었던 성령의 대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수로 말하면 현재에 비할 수 없이 극소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 신앙의 내용은 또 현대의 우리 교회와 비할 수 없이 순결하고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결의 원인은 성령의 역사였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같이 "주여 영감을 내게 배나 다하소서" 소원하고 기도하십시다. 주의 영감을 받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확증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에 대하여 - 주님을 떠난 의(10절)
죄의 개념이 다양하듯이 의의 개념도 다양하다. 자기 의를 앞세우는 사람(롬 10:3)도 있고 율법의 의를 앞세우는 사람(갈 2:21)도 있으며 양심적인 의를 말하는 사람(행 23:1)도 있다. 이런 것들이 의이기는 하지만 참된 의는 아니다. 궁극적인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참된 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겐 정죄함이 없다(롬 8:1)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는 영원한 의이다.
심판에 대하여 - 세상 임금들(11절)
세상 임금에 대하여 심판하셨는데 이는 마귀를 가리킨다. 마귀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분리시키며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왜곡시켜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다. 심판의 대원칙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옥을 예비하신 것은 사람을 그곳에서 벌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마귀를 위해 만드셨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마귀를 따라 살고 마귀를 따라 죽기 때문이다.
롬 8:26에는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탄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또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책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석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다락방 강화입니다. 그중에서 14장은 위로의 말씀이며 15장은 교훈의 말씀이며 16장은 확증의 말씀입니다. 16장 확증의 말씀 중에 봉독한 부분은 성령의 확증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책망하시며 또 확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책망이란 말씀이 나타납니다만 이 낱말 에레그고(elegxo)는 책망한다는 뜻 외에 증거하고 확신시킨다. (요 8:46, 약 2:9)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은 양면적입니다. 한편 책망하고 한편 증거하며 확증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에는 한편은 우리 마음 속에 책망을 일으키시고 그러면서도 한편은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7절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자 예수께서 승천해 가시면 그다음 그가 성령을 땅위에 보내 주신다는 뜻입니다. 즉 성자와 성령은 교대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은 성부시대, 예수께서 땅위에 계시던 때는 성자시대, 오순절 이후는 성령시대라 크게 나누어 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부께서 앞서서 역사하셨고, 성자의 재세시대에는 성자께서 앞서서 역사하셨으며, 오순절 이후 지금은 성령께서 앞서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령시대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책망하시고, 확증시켜 주는 그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증시켜 주는 세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이 말씀을 한 조목씩 묵상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이라는 말씀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가령 효의 개념으로 비유한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데는 옷을 사 드린다거나 여러 가지 물질적인 선물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들이 있는데 모든 물질적인 선물은 잘 해 드리면서도 자기 부모를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 하지 않고, 어머니라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남들 보기에는 효자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지극히 불효한 아들이라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순종하고 높입니다만 물질적인 선물을 해드리지 못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다른 모든 도덕적이며 양심적이며 율법적인 모든 것을 다 지킨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개념은 대단히 다양합니다. 가령 불교에서는 죄란 말 대신에 무명이라 합니다만 이는 깨닫지 못하는 것,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뇌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의 윤리의 도리를 어기면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넉사()자 아래 아닐비(非)자를 씁니다만 어떤 목사님이 이 죄(罪)란 글자를 해석하기를 "네가지 아닌 것이 죄이다. 그 네가지 아닌 것은 첫째 옳지 않는 것(不義), 둘째 법을 어기는 것(不法), 셋째 바르지 못한 것(不正), 넷째 순종하지 않는 것, 이 네가지라" 이렇게 해석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이 죄의 정확한 규정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일반 죄의 개념 가운데 첫째로 법적인 죄가 있습니다. 나라의 법을 어겼다거나 십계명을 어겼을 때 그것이 죄가 된다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둘째 윤리적인 죄가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 도덕을 어길 때에 죄라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셋째 양심적인 죄가 있습니다. 법에도 어긋나지 않고, 윤리에도 어긋나지 않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본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죄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 관계가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성경 헬라 말에 죄라는 낱말이 하말티아(hamartia)라는 것을 많이 들으신줄 압니다. 그리고 하말티아는 활쏘는 곳의 표적입니다. 한가운데 동그라미 표가 있고, 그 동그라미 표를 비껴났을 때 하말티아가 됩니다. 즉 하말티아는 비껴났다는 뜻입니다. 우로 비껴났든, 좌로 비껴났든, 힘이 부족해서 미쳐 가지를 못했든, 힘이 남아서 넘어 가버렸든 다 하말티아에 속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목표를 어길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그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것은 다 죄가 됩니다. 다시 말씀해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계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더더구나 요즈음 한국에는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계의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파스칼은 "사람은 동물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뜻있게 사는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본능적인 한도 하에서 살지만 인간은 그 한도를 넘어서 자유롭게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하이덱카는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놓여있는 죽음과 허무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바로 "죄"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계에 문제가 발생하고, 인간은 혼란과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죄는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서 죄가 발생하고 죄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누가 묻기를 "오늘날 미국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오니까"고 하였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부도덕 문제이다" 하였습니다. 영국의 글레드스톤이라는 유명한 수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믿기에 영국 역사에 가장 위대한 수상이었다고 믿습니다만 그분에게 누가 묻기를 "대영제국의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글레드스톤은 "대영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불신앙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대정치가들도 입을 모아 불신앙이 바로 모든 국가 사회 문제의 근본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10절 말씀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얼핏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말같이 보입니다. 의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죄의 개념이 다양하다고 말씀했습니다만 의의 개념 또한 대단히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를 앞세웁니다. (롬 10:3) 어떤 분은 율법의 의를 앞세웁니다. (갈 2:21) 또 사람에게는 양심적인 의가 있습니다. (행 23:1) 이 모든 것이 의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 율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 양심적으로 당당히 사는 것, 모두 의에 속합니다만 그러나 이 모든 의가 궁극적인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만이 참된 의가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정함이 없다(롬 8:1)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그 의가 진정한 의에 속하고, 궁극적인 의에 속하고, 영원한 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가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에 오시고, 일생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를 맡으셔서 해결해 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만민을 대속하시며,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생애, 그 생애가 우리 의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위에 오시지 않으셨었던들,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아니했었던들, 성업을 마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아니하셨던들 우리는 의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생의 성업을 마치시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일생은 우리에게 의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문자에 옳을 의(義)자입니다. 이 글자를 자세히 보면 양양(羊) 밑에 나아(我)자가 들어가 있습니다만 양은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말씀했습니다. (요 1:29)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억지의 말이 되겠습니다만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신비로운 경지입니다. (갈 2:20)
루터는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나의 의이시오, 나는 당신의 죄로소이다" 한 바가 있습니다. 신비롭고 깊은 신앙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받으신 그 죄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셋째로,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여기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로 마귀를 가리킵니다. 성경 가운데 마귀에 대한 별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이라 하고, 마귀, 바알세불,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6:16) 등등 많은 별명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라는 것도 마귀의 별명에 속합니다.
유대인의 신학에서는 이 땅은 인간이 사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그 중간에 마귀가 역사하는 마귀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귀는 가운데 끼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부단히 분리시키고,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왜곡하며 인간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를 제1세계, 마귀의 세계를 둘째 세계,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셋째 세계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바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고후 12:2), 즉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마귀는 공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중간에 끼어 인간에게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요, 또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임금입니다. 예수님도 왕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라 불리우고 우리의 영원하신 왕이 되십니다. 마귀도 왕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선으로 지배하셔서 영생으로 이끄시는 왕이십니다. 마귀는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여 멸망으로 이끄는 왕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 임금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심판은 이 마귀와 관련됩니다. 심판의 원칙적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마태 25:41에 지옥을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옥을 예비하신 것은 사람을 그곳에서 벌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마귀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마귀를 따라 가기 때문에, 즉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0:10 이하에 보면 심판의 순서가 나타납니다만 먼저 사탄을 불못에 던진다는 사탄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그후의 11절에 흰 보좌의 심판, 즉 모든 불신자의 심판이 따르고 있습니다. 심판은 첫째 원칙적으로 사탄을 대하는 것이고, 불못 지옥의 형벌도 원칙적으로 사탄을 위해서 예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에게는 회개의 가능이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받으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만 사탄의 세계는 전혀 회개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탄을 위하여 처음부터 그를 형벌한 지옥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펴볼 때에 악한 자가 결국은 보응을 받는 심판을 얼마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세의 크고 작은 모든 심판을 궁극적인 심판은 아닙니다. 장차 올 심판에 대한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현세의 종말에서 대심판이 있습니다. 그 대심판 때에 먼저 마귀가 심판을 받고, 그 외에 마귀를 따라간 모든 그의 사자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를 책망하시고, 확증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책망은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의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생을 바치시고 아버지께 가신 그 생애가 우리 의의 근거가 됨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의 원칙적인 상대인 것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당신의 영감을 내게 갑절이나 더하소서" 답을 하였습니다. (왕하 2:9) 어떤 성도가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명예도 권세도 재물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영감이시라"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1907년 우리 한국을 휩쓸었던 성령의 대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수로 말하면 현재에 비할 수 없이 극소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 신앙의 내용은 또 현대의 우리 교회와 비할 수 없이 순결하고 높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결의 원인은 성령의 역사였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같이 "주여 영감을 내게 배나 다하소서" 소원하고 기도하십시다. 주의 영감을 받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확증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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