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평강과 사명 그리고 성령
본문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희망이 안 보인다. 이민 가고 싶다. 이 말은 지난 주 20일 날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렸던 2001년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머리 글의 내용입니다. 이 신문은 지금 현재 우리사회를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라고 말하면서 그 증상으로 의존장애, 성형수술 집착, 집단히스테리, 도덕무력증을 들었고 치료가 시급한 중증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로 대전에 사는 40세의 한 주부가 반상회를 다녀오면서 반장으로부터 매춘제의를 받았던 것을 언급했습니다. 교사이면서 혼자 사는 이 여인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아파트의 반장으로부터 매춘제의를 받고 또 주변의 주부들이 모두 거들고 나오는 현실을 보면서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서 살고 있다며 치를 떨었다고 했습니다.
입시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을 모아두고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학원관계자들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모님들, 애를 제대로 된 대학에 보내려면 차를 팔아야 합니다. 아파트 평수를 줄여야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학원 강사들의 말에 주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차를 팔아야 되. 평수를 줄여야 되... "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역시 학교보다는 학원이 실제적이라고 공감을 표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런 세상을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살아갈 때 어떤 증상이 일어납니까 불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제 정신으로 살아간다 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반대로 살아갈 때 오히려 내가 비정상이 아닌가 이러다가 나만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이런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주님께 자신의 삶과 미래를 모두 다 맡긴 자를 우리는 예수 믿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주님께 맡긴 삶이 잘 흘러가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 미치면 같이 미치기도 하고 세상이 제 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하면 자신도 제 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정작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나의 인생은 그들에 비해 풀리지 않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갑자기 믿음이 작동되지 않으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문제입니다.
믿지 않으면 이런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맡기지 않은 사람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지 않고 실제로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아니 잘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이 가장 비참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도 한 때는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인생을 전부 예수님께 맡겼던 자들입니다.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자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지난 3년 간은 예수님이 그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능력을 행하시기도 하면서 그들의 결단과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순간순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잡혀가더니 저주 받은 자가 죽는 십자가에서 끔찍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한 순간에 그들의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현재와 미래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혀진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한 사람씩 슬그머니 모여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모인 것은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때가 안식 후 첫날 바로 주일 날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이기는 모이는데 워낙 처참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의 기억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여드는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여러분, 이런 제자들의 태도와 두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로서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또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에 단순한 호기심만 발동했다면 그는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은 정말 주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주님의 죽음으로 받은 그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충격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현격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숨어 있는 이 시각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 속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무슨 차이입니까 제자라는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과거에 막달라의 창녀였다는 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정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였으며 지금 현재 부활의 주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냐의 차이입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은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조금도 책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믿음이 없어... 왜 이렇게 두려워 해.... 내 제자들 맞아....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겼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친히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평강을 전하십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 빠진 자들을 책망치 않고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못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주님에 대한 믿음과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여 다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수 있도록 힘과 평강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겼기에 때로 두려워하고 때로 불안해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설령 돈은 주지 않고, 이 세상의 지위와 명예는 주지 않는다 해도 이것만은 꼭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강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 모여 예배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이런 주님의 평강이 전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다면 때때로 이런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작동하지 못할 정도로 이 세상의 기세가 등등할 때 믿는 자들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실성한 시대의 정신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던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 이후에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었던 것처럼 영혼의 침체를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주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맡겼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자들을 찾아오시고 위로하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그 평안이 다시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때처럼 육신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지는 않지만, 이 시간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하셔서 우리의 불안한 믿음이 다시 한번 소생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평안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믿음 위에 서 있는 분들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평안이 그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하여주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평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책이 보이지 않는 이 한국이란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평강을 주시면서 우리가 이 미친 듯한 사회 속에서 평강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함이 다 사라졌으니 되었다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시면서 그 평강을 가지고 의심과 불안함과 초조와 두려움으로 뒤덮혀 있는 이 세상에 평안이라는 선물을 우리를 통해 주시고자 합니다. 이것은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나 불안은 문제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보면 정말 불안하고 두려워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사람들로 제자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안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해서 주님께 나의 삶을 맡겼지만 믿음이 부족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치명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런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위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힘을 주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서 죄 가운데 살면서 정말 불안해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모르고 평안해 하는 것입니다. 태평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없을 때는 이런 불신자들의 치명적인 불행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문제가 급한데요.....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평강을 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면 그때는 갑자기 불신자들의 무서운 운명이 보입니다. 자신들의 무서운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가짜 평안으로 배불러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로라"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이 세상 사람들의 그 치명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고칠 수 있는 평강의 사람으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실성한 듯한 세상,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심각한 상태를 모르고 있는 세상, 정말 불안해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 기껏 이민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진짜 두려워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평강을 소유한 우리들이 그 평강을 전해주는 사람들로 주님은 우리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어려운 문제에서 건져주시고 위로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정신 가지고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걱정 없이 잘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그 평강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진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이 실성한 듯한 세상에서 뒤떨어질 것만 두려워하여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제 멋대로 굴러가도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사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특히 오늘 학습을 받으시고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들에게 이 사명이 감당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평강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냄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당신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 숨을 내 쉰다는 동사 'emphusao'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으로 신약에서는 여기 단 한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창2:7절과 겔37장에 같은 뜻으로 두 번 나타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할 때 불어넣으셨다는 단어와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에게 사방에서부터 생기가 불어와서 살게할 때 불어서란 단어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진흙을 생령으로 만든 그 숨결이요, 마른 뼈를 군대로 변화시키는 창조의 숨결이며, 전능하신 숨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의 사람에서 평강의 사람이 되며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평강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외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고백 중에 헛되다라는 히브리 동사 '하벨'도 숨결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성령의 숨결과는 전혀 다른 숨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이요 성령의 숨결이었습니다. 창조의 숨결이며 회복의 숨결이며 변화의 숨결이며 평강의 숨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고백한 '하벨'이라는 뜻의 숨결은 인간의 숨결입니다. 인간의 숨결은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주지육림속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는 숨결입니다. 이 '하벨'의 숨결만 가진 사람은 결코 평강의 삶을 살 수 없으며 평강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엠푸사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숨결을 받는 사람만이 이 실성한 듯한 세상 속에서 평강을 누리고 평강을 전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모두 숨을 쉬면서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내 뱉고 있는 숨결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내뱉는 즉시 흔적도 없이 허공속에 사라질 뿐입니다. 생명이란 곧 호흡이요 호흡이란 바로 숨결인진데, 우리의 인생이 지금 헛바람이 되어 매초마다 이리저리 허공속으로 헛되게 날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헛바람을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어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된 숨결로야 어찌 누구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가치 있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평강을 전하며 영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바람의 숨결만 내뱉는 인생이 어찌 불안을 극복할 수 있으며 두려움을 헤어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그 성령의 숨결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가 필요합니다.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다귀들을 군대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생명의 숨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 숨결에는 극복못할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숨결에는 사랑치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숨결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어떤 슬픔과 애통도 뛰어넘어 다시 일어서게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성령의 숨결을 날마다 내 뱉으시면서 평강의 사람들로 이 험악한 세상 사명 감당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입시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을 모아두고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학원관계자들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모님들, 애를 제대로 된 대학에 보내려면 차를 팔아야 합니다. 아파트 평수를 줄여야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학원 강사들의 말에 주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차를 팔아야 되. 평수를 줄여야 되... "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역시 학교보다는 학원이 실제적이라고 공감을 표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런 세상을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살아갈 때 어떤 증상이 일어납니까 불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제 정신으로 살아간다 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반대로 살아갈 때 오히려 내가 비정상이 아닌가 이러다가 나만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이런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주님께 자신의 삶과 미래를 모두 다 맡긴 자를 우리는 예수 믿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주님께 맡긴 삶이 잘 흘러가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 미치면 같이 미치기도 하고 세상이 제 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하면 자신도 제 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정작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나의 인생은 그들에 비해 풀리지 않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갑자기 믿음이 작동되지 않으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문제입니다.
믿지 않으면 이런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맡기지 않은 사람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지 않고 실제로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아니 잘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이 가장 비참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도 한 때는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인생을 전부 예수님께 맡겼던 자들입니다.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자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지난 3년 간은 예수님이 그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능력을 행하시기도 하면서 그들의 결단과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순간순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잡혀가더니 저주 받은 자가 죽는 십자가에서 끔찍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한 순간에 그들의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현재와 미래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혀진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한 사람씩 슬그머니 모여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모인 것은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때가 안식 후 첫날 바로 주일 날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이기는 모이는데 워낙 처참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의 기억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여드는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여러분, 이런 제자들의 태도와 두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로서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서도 충격을 받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또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에 단순한 호기심만 발동했다면 그는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은 정말 주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주님의 죽음으로 받은 그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충격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현격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숨어 있는 이 시각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 속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무슨 차이입니까 제자라는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과거에 막달라의 창녀였다는 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정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였으며 지금 현재 부활의 주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냐의 차이입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은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조금도 책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믿음이 없어... 왜 이렇게 두려워 해.... 내 제자들 맞아....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겼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친히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평강을 전하십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 빠진 자들을 책망치 않고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못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주님에 대한 믿음과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여 다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수 있도록 힘과 평강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겼기에 때로 두려워하고 때로 불안해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설령 돈은 주지 않고, 이 세상의 지위와 명예는 주지 않는다 해도 이것만은 꼭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강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 모여 예배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이런 주님의 평강이 전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다면 때때로 이런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작동하지 못할 정도로 이 세상의 기세가 등등할 때 믿는 자들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실성한 시대의 정신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던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 이후에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었던 것처럼 영혼의 침체를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주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맡겼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자들을 찾아오시고 위로하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그 평안이 다시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때처럼 육신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지는 않지만, 이 시간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하셔서 우리의 불안한 믿음이 다시 한번 소생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평안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믿음 위에 서 있는 분들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평안이 그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하여주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평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책이 보이지 않는 이 한국이란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평강을 주시면서 우리가 이 미친 듯한 사회 속에서 평강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함이 다 사라졌으니 되었다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시면서 그 평강을 가지고 의심과 불안함과 초조와 두려움으로 뒤덮혀 있는 이 세상에 평안이라는 선물을 우리를 통해 주시고자 합니다. 이것은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나 불안은 문제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보면 정말 불안하고 두려워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사람들로 제자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안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해서 주님께 나의 삶을 맡겼지만 믿음이 부족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치명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런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위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힘을 주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서 죄 가운데 살면서 정말 불안해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모르고 평안해 하는 것입니다. 태평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없을 때는 이런 불신자들의 치명적인 불행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문제가 급한데요.....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평강을 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면 그때는 갑자기 불신자들의 무서운 운명이 보입니다. 자신들의 무서운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가짜 평안으로 배불러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로라"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이 세상 사람들의 그 치명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고칠 수 있는 평강의 사람으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실성한 듯한 세상,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심각한 상태를 모르고 있는 세상, 정말 불안해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 기껏 이민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진짜 두려워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평강을 소유한 우리들이 그 평강을 전해주는 사람들로 주님은 우리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어려운 문제에서 건져주시고 위로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정신 가지고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걱정 없이 잘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그 평강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진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이 실성한 듯한 세상에서 뒤떨어질 것만 두려워하여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제 멋대로 굴러가도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사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특히 오늘 학습을 받으시고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들에게 이 사명이 감당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평강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냄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당신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 숨을 내 쉰다는 동사 'emphusao'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으로 신약에서는 여기 단 한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창2:7절과 겔37장에 같은 뜻으로 두 번 나타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할 때 불어넣으셨다는 단어와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에게 사방에서부터 생기가 불어와서 살게할 때 불어서란 단어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진흙을 생령으로 만든 그 숨결이요, 마른 뼈를 군대로 변화시키는 창조의 숨결이며, 전능하신 숨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의 사람에서 평강의 사람이 되며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평강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외치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고백 중에 헛되다라는 히브리 동사 '하벨'도 숨결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성령의 숨결과는 전혀 다른 숨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숨결이요 성령의 숨결이었습니다. 창조의 숨결이며 회복의 숨결이며 변화의 숨결이며 평강의 숨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고백한 '하벨'이라는 뜻의 숨결은 인간의 숨결입니다. 인간의 숨결은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주지육림속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는 숨결입니다. 이 '하벨'의 숨결만 가진 사람은 결코 평강의 삶을 살 수 없으며 평강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엠푸사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숨결을 받는 사람만이 이 실성한 듯한 세상 속에서 평강을 누리고 평강을 전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모두 숨을 쉬면서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내 뱉고 있는 숨결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내뱉는 즉시 흔적도 없이 허공속에 사라질 뿐입니다. 생명이란 곧 호흡이요 호흡이란 바로 숨결인진데, 우리의 인생이 지금 헛바람이 되어 매초마다 이리저리 허공속으로 헛되게 날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헛바람을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어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된 숨결로야 어찌 누구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가치 있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평강을 전하며 영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바람의 숨결만 내뱉는 인생이 어찌 불안을 극복할 수 있으며 두려움을 헤어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그 성령의 숨결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가 필요합니다.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다귀들을 군대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생명의 숨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 숨결에는 극복못할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숨결에는 사랑치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숨결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 숨결에는 어떤 슬픔과 애통도 뛰어넘어 다시 일어서게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성령의 숨결을 날마다 내 뱉으시면서 평강의 사람들로 이 험악한 세상 사명 감당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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