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과 말씀
본문
모든 크리스천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생각해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살아오시면서 기도를 하셨는지 잘 모르겠군요. 어떤 분은 지난주일 예배 후에 제게 "목사님, 이제 저는 복식호흡 하면서 살래요" 하시더라구요. 사실, 저는 기도를 열심히 하시라는 의미에서 복식호흡 이야기도 드린 것인데, "나는 이제 기도 열심히 할래요"하시지 않고, "복식호흡 열심히 할래요" 하시니까 제가 전해야 할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불교에 나오는 말이 있지요. "저기 둥근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하는 말입니다. 복식호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기도하는 삶입니다.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다음 내용으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이와 함께 말씀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지향하는 방향과 말씀이 지향하는 바가 서로 갖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말씀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하늘의 생명력을 풍성히 주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목적이라고 일컫는 말씀입니다. 특히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이렇게 말씀에는 믿음을 갖게 하고자 성격과 성도로서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적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답게 충만한 가운데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말씀의 증언적 성격 : 말씀은 믿음을 가져다준다.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성령의 목적이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게 하는데 있음을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 목적하는 바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더러 교회 나오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씁니다. 이 말씀은 롬 10:17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이런 점에서 말씀은 곧 믿음을 가져다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말씀은 그 목적하는 바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가운데 사는 모습과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성격을 간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또 주일 예배 시 들으시는 설교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들으십니까
흔히,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알아듣는 방식을 "해석"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해석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이단이라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들 멋대로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신학교 동창 중에 지금은 미국 장로교의 교단 신학교 중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이 친구 교수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제가 물었습니다. "요즘, 신약 신학계의 성경 해석 방향은 어떠냐"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향과 관심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성경 해석을 방법은 어떤 것인지 물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 친구가 대답하기를, "요즘은 듣는 사람들의 해석(Listeners' Interpretation)에 대한 방법론이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성경을 듣는 사람들에 따라 같은 내용이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해석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는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 또 설교를 어떻게 해야 잘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설교를 할 때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학교에서 그 방법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이나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하는 사람에게서 듣는 사람에게로 말씀의 방향과 관심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가르치고 잘 전달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바르게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미국의 어느 카톨릭 신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마이크 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신부가 앞에서 강론하는 것을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은 마이크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저 뒤에까지 다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데 신앙 생활하는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옛날 성도들이 지금 성도들보다 더 착실하게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바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듣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듣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어제 사랑구역을 끝으로 9월 달 구역 예배를 모두 마쳤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구역 예배를 통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서 씨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고, 그 말씀으로서의 씨앗이 어디에 뿌려지는가에 따라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뿌려진 밭 곧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관심을 가지려 조차 안 하는 길가와 같은 밭이나, 주변의 영향에 쉽게 좌우되는 돌짝 밭과 같은 마음 밭이나, 자기의 욕심에 쉽게 흔들리는 가시덤불 밭과 같은 마음 밭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보다 듣는 자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규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목적하는 바는 가르치려고 하는 즉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히면 된다라고 생각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인 모습이 곧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성격은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이러한 교육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언의 성격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증언을 들으면 거기에는 이 증거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방향으로 나가지, 이 증거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모습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를 믿으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그 증거를 믿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바로 이러한 증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이렇게 설교를 듣거나 할 때에 이러한 말씀의 증언적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는 그 결과가 반드시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배가 갈 때, 그 물결이 좌우로 나누어지듯이 말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심지어는 돌을 들어 치려한다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하게 된다든지, 끌고 가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한 경우이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경우는 가르침에 놀라고,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이 이렇게 증거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증인들의 증거를 듣고 믿는 사람과 그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믿지 못하든지 하는 모습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지향하는 성격이 이렇게 증인으로서의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나,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에는 반드시 "내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관점에서 말씀을 받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현대 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적인 의미에서 그냥 듣고 이해하려는 데에서 멈추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알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2. 말씀의 생명적 성격 : 말씀은 신앙인의 양식이다.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흔히 "기도가 신앙인의 호흡이라면, 말씀은 신앙인의 양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씀이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만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생명력을 가져다주기 위함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접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교회사에서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론적인 내용을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모습을 말씀드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동방의 작은 나라였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성장하였고 부흥하는 귀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귀한 교회사적 역사가 나타난 데에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있었습니다만,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초기의 일입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우리 한국 민족에게 전파된 것은 조선시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압록강 건너 만주지방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존 로스(John Ross)라는 스코트랜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주 땅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당시 외국의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이들이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되겠다는 계획을 짰습니다. 그러던 차에 인삼 장수들 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이름은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다고 합니다. 로스 목사는 이들에게 영어와 서양 과학기술을 가르쳐주는 대신 이들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기로 약속하고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있던 이들은 서양 사람인 로스 목사가 기독교 선교사인 줄 알고 처음에는 꺼렸지만 로스 목사가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같이 생활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3년 동안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로스 목사는 약속대로 이들에게 기독교를 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네 청년은 로스 목사의 모습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876년에 이 네 청년은 로스 목사와 같이 있던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자마자 처음으로 하게된 일이 다름 아닌 성경 번역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무를 일일이 깎아서 활자를 만들어 성경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지 6년 후인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만주의 심양 지방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성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로스 목사를 비롯한 이들은 인쇄가 완료된 성경을 손에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눈물과 함께 올렸습니다. 그 이듬해 1883년 이 중의 한 사람인 이성하가 이 성경을 조선 땅으로 들여오려고 장사꾼 차림으로 입국하려고 하였습니다. 압록강변까지 쉽게 왔으나 그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 주인에게 복음서가 발각되어 일부는 불에 태워지고 나머지는 압록강 물에 내던져지는 불상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스 목사는 탄식과 함께 한국 교회를 향한 유명한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며, 불에 탄 성경도 한국 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게 된 모습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이번에는 백홍준이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 때는 종이가 아주 귀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낡은 종이도 사고 팔곤 하였습니다. 백홍준은 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노끈처럼 돌돌 말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노끈과 낡은 종이를 한 데 봇짐에 넣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고향인 의주로 가서는 이 노끈을 다시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리미로 다려서 다시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이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경이 믿는 자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힘과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한국 교회는 이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상 보기 드문 교회 성장과 부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생명으로서의 말씀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믿는 자의 모습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세를 연습해야 합니다. 말씀이 가져다주는 증언적 성격을 간직함으로 믿음에 더욱 충만한 모습, 그리고 생명적 성격이 가져다주는 풍성한 생명력이 기도와 함께 간직될 때에 성령의 충만한 생활로 더불어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간직하게 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다음 내용으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이와 함께 말씀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지향하는 방향과 말씀이 지향하는 바가 서로 갖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말씀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하늘의 생명력을 풍성히 주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목적이라고 일컫는 말씀입니다. 특히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이렇게 말씀에는 믿음을 갖게 하고자 성격과 성도로서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적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답게 충만한 가운데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말씀의 증언적 성격 : 말씀은 믿음을 가져다준다.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성령의 목적이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게 하는데 있음을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 목적하는 바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더러 교회 나오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많이 씁니다. 이 말씀은 롬 10:17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이런 점에서 말씀은 곧 믿음을 가져다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말씀은 그 목적하는 바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가운데 사는 모습과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성격을 간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또 주일 예배 시 들으시는 설교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들으십니까
흔히,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알아듣는 방식을 "해석"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해석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이단이라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들 멋대로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신학교 동창 중에 지금은 미국 장로교의 교단 신학교 중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이 친구 교수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제가 물었습니다. "요즘, 신약 신학계의 성경 해석 방향은 어떠냐"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향과 관심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성경 해석을 방법은 어떤 것인지 물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 친구가 대답하기를, "요즘은 듣는 사람들의 해석(Listeners' Interpretation)에 대한 방법론이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성경을 듣는 사람들에 따라 같은 내용이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해석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는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 또 설교를 어떻게 해야 잘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설교를 할 때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학교에서 그 방법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이나 설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하는 사람에게서 듣는 사람에게로 말씀의 방향과 관심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가르치고 잘 전달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바르게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미국의 어느 카톨릭 신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마이크 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신부가 앞에서 강론하는 것을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은 마이크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저 뒤에까지 다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데 신앙 생활하는 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옛날 성도들이 지금 성도들보다 더 착실하게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바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듣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듣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어제 사랑구역을 끝으로 9월 달 구역 예배를 모두 마쳤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구역 예배를 통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서 씨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고, 그 말씀으로서의 씨앗이 어디에 뿌려지는가에 따라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뿌려진 밭 곧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관심을 가지려 조차 안 하는 길가와 같은 밭이나, 주변의 영향에 쉽게 좌우되는 돌짝 밭과 같은 마음 밭이나, 자기의 욕심에 쉽게 흔들리는 가시덤불 밭과 같은 마음 밭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보다 듣는 자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규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목적하는 바는 가르치려고 하는 즉 교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히면 된다라고 생각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인 모습이 곧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성격은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이러한 교육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언의 성격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증언을 들으면 거기에는 이 증거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방향으로 나가지, 이 증거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모습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를 믿으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그 증거를 믿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은 바로 이러한 증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이렇게 설교를 듣거나 할 때에 이러한 말씀의 증언적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는 그 결과가 반드시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배가 갈 때, 그 물결이 좌우로 나누어지듯이 말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심지어는 돌을 들어 치려한다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하게 된다든지, 끌고 가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한 경우이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경우는 가르침에 놀라고,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격이 이렇게 증거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증인들의 증거를 듣고 믿는 사람과 그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믿지 못하든지 하는 모습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지향하는 성격이 이렇게 증인으로서의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나,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에는 반드시 "내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관점에서 말씀을 받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현대 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적인 의미에서 그냥 듣고 이해하려는 데에서 멈추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알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2. 말씀의 생명적 성격 : 말씀은 신앙인의 양식이다.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흔히 "기도가 신앙인의 호흡이라면, 말씀은 신앙인의 양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씀이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만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생명력을 가져다주기 위함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접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교회사에서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론적인 내용을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모습을 말씀드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동방의 작은 나라였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성장하였고 부흥하는 귀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귀한 교회사적 역사가 나타난 데에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있었습니다만,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초기의 일입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우리 한국 민족에게 전파된 것은 조선시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압록강 건너 만주지방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존 로스(John Ross)라는 스코트랜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주 땅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당시 외국의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이들이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되겠다는 계획을 짰습니다. 그러던 차에 인삼 장수들 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이름은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다고 합니다. 로스 목사는 이들에게 영어와 서양 과학기술을 가르쳐주는 대신 이들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기로 약속하고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있던 이들은 서양 사람인 로스 목사가 기독교 선교사인 줄 알고 처음에는 꺼렸지만 로스 목사가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같이 생활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3년 동안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로스 목사는 약속대로 이들에게 기독교를 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네 청년은 로스 목사의 모습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876년에 이 네 청년은 로스 목사와 같이 있던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자마자 처음으로 하게된 일이 다름 아닌 성경 번역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무를 일일이 깎아서 활자를 만들어 성경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지 6년 후인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만주의 심양 지방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성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로스 목사를 비롯한 이들은 인쇄가 완료된 성경을 손에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눈물과 함께 올렸습니다. 그 이듬해 1883년 이 중의 한 사람인 이성하가 이 성경을 조선 땅으로 들여오려고 장사꾼 차림으로 입국하려고 하였습니다. 압록강변까지 쉽게 왔으나 그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 주인에게 복음서가 발각되어 일부는 불에 태워지고 나머지는 압록강 물에 내던져지는 불상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스 목사는 탄식과 함께 한국 교회를 향한 유명한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며, 불에 탄 성경도 한국 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게 된 모습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이번에는 백홍준이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 때는 종이가 아주 귀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낡은 종이도 사고 팔곤 하였습니다. 백홍준은 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노끈처럼 돌돌 말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노끈과 낡은 종이를 한 데 봇짐에 넣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고향인 의주로 가서는 이 노끈을 다시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리미로 다려서 다시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이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경이 믿는 자에게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힘과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한국 교회는 이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상 보기 드문 교회 성장과 부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생명으로서의 말씀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믿는 자의 모습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세를 연습해야 합니다. 말씀이 가져다주는 증언적 성격을 간직함으로 믿음에 더욱 충만한 모습, 그리고 생명적 성격이 가져다주는 풍성한 생명력이 기도와 함께 간직될 때에 성령의 충만한 생활로 더불어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간직하게 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