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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당신은 성령을 받았는가

본문

한 어린 소년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이태리 화가의/ 화랑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소년은 화가의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께서 대가의 붓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소년은 미술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가와 같은 화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부인은 붓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한 번 그려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자기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 소년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대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고는/ 대가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
그리스도인 여부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싶어도/ 우리 안에 예수의 정신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냐 비그리스도인이냐의 여부를/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을 보세요.
8:9 만일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질문입니다만/ 심각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한 젊은 신학생이 유학길에 올랐었답니다.
한 전도자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형제는 예수를 믿으세요”
신학생은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예, 우리 아버지가 어느 신학대학 총장입니다. ”
전도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형제가 신학대학 총장의 아들이라는 것과/ 예수 믿는 거와 무슨 상관이지요 나는 형제가 예수 믿느냐고 물었어요. ”
신학생은 그때 약간 심각해진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목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신학생입니다. ”
전도자가 답답한 심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형제의 직분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리스도인인지를 묻고 있어요. 형제는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여러분 중에 전도자로부터/ 전도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
“예수 믿으십니까”
아마 한 두번 정도는 있었을 겁니다.
저도 전도자로부터 전도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참 묘한 기분이 들면서도/ 조금은 언짢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명색이 목사인데/ 오죽 목사같지 않았으면/ 전도를 다 받겠느냐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무리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말투와 인품을 보니까/ 꼭 목사님 같습니다. ”
여러분은 전도를 받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그 때 어떤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아니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신앙에 있어/ 부모님과 여러분을 연계시키지 마세요.
부모님들 중에서는/ 우리 자식이 어느 교회 뭐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신앙에 있어/ 자식과 여러분을 연계시키지 마세요. 자식 신앙과 여러분 신앙은 다릅니다. 엄격히 따진다면/ 믿음과 직분도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자들 중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많지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거의 없는데/ 직분자가 된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또 교회 다닌 연수와 믿음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이 다수겠지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근거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럼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압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세요.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안에 성령이 없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기와 무관하면/ 주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주(主)라는 말의 원어 ‘퀴리오스’는/ 자기 나라의 황제에게 붙였습니다. 또한 자기 스승에게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말 대신에/ 주님이란 말을 사용한다고/ 그가 성령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자기 마음의 보좌에 모셨느냐/ 항상 예수님을 믿고 따라다녔느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을 보면 압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세요.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러분 안에 성령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역시도/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아버지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낳으셨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는/ 부자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부르짖느니라”의 원어 ‘크라조’의 본래적 의미는/ 까마귀처럼 소리지르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크게 부르다’ ‘크게 소리치다’ ‘크게 탄원하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크라조’가 사용된 곳을 찾아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을 보세요.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소경이 소리지른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속에 성령이 있는데/ 기도에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지 못하지만/ 기도에 대한 부담감은/ 늘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듯한 말입니다만/ 그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숨 쉽니다. 성령으로 숨쉬는 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사람이 곧 기도의 사람입니다.
 셋째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세요.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은/ 18절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하자는 대로 하라는 말이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철학자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통 10대에는 먹는 것에 의하여 움직이고/ 20대는 연인에 의하여 움직인다. 30대는 쾌락에 의하여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의하여 움직인다. 50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60대는 명예심에 의하여 움직인다. ”
그러면 성령이 있는 사람은요
성령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강제로 떠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성령 안에 거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날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평강 선언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의 상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9절 앞부분을 보세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난 후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꼭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들어오신 겁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제자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서신 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확인한 후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기뻐하다는 말 앞에/ 형용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심히” 기뻐했다던가/ “무척”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한 것에/ 강조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앞에서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제자들을 안심시키신 겁니다.
먼저 두려움에서 안심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게 최고의 두려움 아니겠습니까 언제 끌려가서 죽을지 모르니/ 얼마나 두렵겠어요 그래서 그들은 숨어 있습니다.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하며/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가/ 삼일에 살아난다고 했건만/ 왜 이러고 있느냐”며/ 호되게 꾸중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평강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자칫 흥분에서 안심시키신 겁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며 뛰쳐나갔을 때/ 핍박의 칼날이 다가올 때/ 곧 쫓겨 올 것을 아셨기에/ 흥분에서 안심시키신 겁니다. 전번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맞게 될까 봐/ 예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신 겁니다.
사명 선언
그러나 예수님은 평강 선언에 이어/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명을 선언하신 겁니다.
우리가 자칫 평강 차원에서 머물기 쉽습니다.
예수 믿은 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평강입니다.
507장 1절을 보세요.
1절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성령이 임한 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평강일 것입니다.
169장 2절을 보세요.
2절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고 평안을 누리는 선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중요하고/ 집안의 평화가 더 없이 중요하지만/ 그 평강은 제자로서 사명 감당을 위한/ 그 전단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50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2절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절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받음이라
후렴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요
4절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오실 그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님을 본받는 생활/ 즉 제자의 길과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 사명자로 나가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2절을 보세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 그냥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장 7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세요.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새로운 창조로 묘사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자연세계에 대한 책임을 가졌듯이(창1:27, 28)/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 28:16-20).
증인으로 살아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증인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성령 받는 것이/ 개인의 영적인 행복을 위한 체험이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성령을 체험하면/ 영적으로 행복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주신 본래적 목적은/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세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데/ 그 권능을 증인으로 사는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증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무슨 증인입니까
복음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전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자랑하게 됩니다. 자랑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리고/ 혓바늘이 돋을 것 같아 못견딥니다.
시골에서 어렵게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한 번 낙방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합격자 발표하던 날/ 목사님은 그 대학에 가보았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아들이 들어 있는게 아닙니까 너무 좋아하시던 목사님은/ 나오면서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
다음 사람을 보고/ 또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했다니까요. ”
아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길가는 사람들 하고/ 그 목사님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너무 좋아서/ 그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8-29절을 보세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는 과거가 부끄러운 여자입니다. 지금도 떳떳하지 못한 여자입니다. 남의 남자 빼앗아서 살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피해 다녔던/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랑하는 오천남부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복음이라고 믿으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복음이라고 믿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이라고 믿으세요
그런데 왜 자랑하지 않으세요
사마리아 여인과는 모든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분들이/ 왜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하세요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인의 삶으로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기쁨 예쁨 바쁨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3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3쁨’이 뭐겠어요
기쁨, 예쁨, 바쁨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멘 안 하시는 것 보니까/ 예수님을 믿고 슬펐던 분들이 있나 보네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에 기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기쁘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기쁘더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받고 보니/ 보이는 것마다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집에 가면/ 아내가 그렇게 예쁘게 보이고/ 자녀들이 너무 예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오면/ 목사님이 예쁘게 보이고/ 교회 식구들이 너무나 예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게 바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리 예배가 자주 돌아오던지/ 또 모임은 왜 그리고 많은지/ 그렇다고 전도를 빠질 수가 있나요 새벽기도도 하고 싶고요.
그러니 바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일을 포기하고/ 교회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세상일까지 잘해야 하니/ 결국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미루다 닥쳐서 부산을 떠는 것은/ 바쁜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기쁨과 예쁨과 바쁨이 생겨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가 약 1600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선교 예산이 130억원 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간 술 소비량은/ 약 2조 5천억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마셨을 거에요. 보지 않아도/ 선교헌금 할 돈은 아까워해도/ 술값 계산할 때는 카드를 척 내밀었을 거에요.
우리교회도 카드를 만들까 봐요.
우리교회 비전
우리 교회는 3대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100명의 사역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둘째 10곳의 미자립교회를 돕는 것입니다.
 셋째 1명의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수수합니다. 규모가 큰 교회에 비하면/ 비전이라고 이름붙이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이 비전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100명의 헌신된 사역자들이 폭발하여/ 오천 영혼의 십일조가 드려지게 되면/ 오천이 흔들릴 것입니다. 포항이 들썩거릴 것입니다. 10곳의 미자립교회는 100개로 늘어날 것입니다. 1명의 선교사는 10명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그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꿈에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그 꿈을 꾸며/ 그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꿈대로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해 기도하실 때/ 3대 비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연세 많으신 분들/ 이름하여 7080세대는/ 이렇게 기도하세요.
“내 생전에 3대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해주세요. ”
5060세대는 이렇게 기도하세요.
“3대 비전을 이루는데/ 나도 크게 쓰임 받게 해주세요. ”
3040세대는 이렇게 기도하세요.
“3대 비전을 넘어서/ 오천 영혼의 십일조를 드리는 주역이 되게 해주세요. ”
이 비전을 이루고 나서/ 주님 앞에 서면/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능력있게 살아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또 있습니다.
 둘째, 능력 있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전날 밤에/ 모든 제자들이 도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를 위시하여/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던 요한조차/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배우고 훈련받고/ 이적을 보고 체험했으나/ 그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무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능을 탓하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능력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그들과는 차별되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찬송가 507장에 보면/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해줍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가사를 눈여겨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험악합니다.
그런 세상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내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이기는 능력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성입니다.
‘왜 나는 세상과 싸워서 질까’
‘왜 나는 환경과 싸워서 질까’
‘왜 나는 자신과 싸워서 질까’
성령이 임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면/ 내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과 재충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능력
성령이 임하면 사랑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목회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식구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죽도록 충성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함으로 자원하여 봉사하게 됩니다.
목회자를 사랑함으로 기쁨으로 돕고자 합니다.
교회의 식구들을 사랑함으로 섬기며 나누고자 합니다.
원수조차 사랑함으로 축복하며 기도하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위로부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때만 가능하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실 때/ “받으라”의 원어 ‘라베테’는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심령에 모시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성령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성령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으며
성령 받아야 성령으로 좇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증인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고/ 또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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