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불의 혀같이 성령이 임한 날입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만날 때마다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 하라. 성령 받으라.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평안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 없는 세상에서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받는 길밖에 없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승천 후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받기 위해서입니다. 열흘이 지났을 무렵 약속대로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안에 성령충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20장 19-23절의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성령을 받는 날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첫째로 열려진 마음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위에 임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이 열려져야 합니다. 닫힌 마음에는 성령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어떤 예술제에 아름다운 집 설계도가 출품되었답니다. 집의 내부구조나 집의 방향, 후원의 뜰과 화단 조경까지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공간처리도 거의 완벽한 전원주택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발견된 것이 있었는데 문에 문고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완성품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한 심사위원이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이 설계도는 완성품입니다. 이 설계도는 사람의 마음의 집을 설계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문에는 고리가 밖으로 달려있지 않고 안으로 달려 있습니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 그 얘기를 들은 모든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열려진 마음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 영의 문이 닫혀 있으면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강림절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의 영이 내안에 들어오십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오시기를 원하시지만 문을 단단히 닫아두고 있으니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1.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2.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3.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아멘(찬325장)
우리는 가끔 “여호와 하나님이 혹시 나를 잊으셨나 나를 외면하시는건가 내 안에 계시지 않으니 신앙생활이 발전이 없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성령님을 받고 활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는 도대체 그런 체험이 없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가” 이런 의심이 내 신앙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문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여러분 안에 임하실 것입니다.
제가 아는 미국 목사님은 목회를 20여년 이상 하는데도 담담한 신앙밖에는 없었답니다. 남들은 성령의 체험을 뜨겁게 했다는데 자기는 아무런 체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목회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무릎 꿇고 외쳤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도 성령 받고 싶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소서! 성령님이여, 내안에 오시옵소서!” 밤새도록 부르짖었답니다. 새벽이 오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목회를 단념하기로 했습니다. 일어서려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왜 성령님을 체험하려 하느냐” “사랑하려구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면서 가슴에 이상한 기운이 들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내가 너를 매우 사랑하노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고꾸라져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 외쳤답니다.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그때부터 그분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날을 듯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처럼 마음이 열리면 성령님을 받습니다. 영의 문이 열리면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까닭은 성령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해결해 주십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외롭지도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평소에 이렇게 자주 말씀하던 예수님은 부활 후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겁내지 맙시다.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 주님의 영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키십니다. 홀로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신 이유는 우리를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기 보낸다는 말은 멀리 선교사로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일하시려는 곳으로 우리를 보내셔서 쓰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않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에 어떻게 쓰시려고 하십니까 성경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이 말씀을 읽다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친구들이 데려온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서기관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장면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막 2:6-8,10)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기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 20:23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도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은 “죄사함의 권세”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 이런 권세를 얻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들은 너무 자의적 해석들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 이 말씀은 선교차원에서 먼저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것을 받아드리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거부하는 자는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회개의 열매를 맺어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은 죄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끝내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세가 있으니 사도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가 복음을 듣지 못하여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사도들의 책임입니다. 선교에 대한 사도들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먼저 택함 받은 우리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선교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죄의 권능을 주셨다는 말은 죄의 원흉인 사단을 몰아낼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죄의 원흉입니다. 잭 에드거는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성령이 그 안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결단을 하게 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1,700여개의 점포에 음란의 죄를 짓게 하는 도색잡지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를 모두 거두어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점포에 지시를 내렸습니다. 물론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으나 그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300만 달러의 수입을 집어던진 것입니다. 사업의 큰 위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축복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 20,000여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합니다. 세븐 일레븐(7 Eleven)이 바로 그 회사입니다. 지금도 7 Eleven에서는 도색잡지를 팔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잭 에드거의 마음에 자리 잡은 죄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옵니다. 질병을 가져옵니다. 실패를 가져옵니다. 절망을 가져옵니다.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넘어지게 합니다. 실컷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멸망의 늪에 처박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본성이요 목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은 성도들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질병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성령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고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병든 자를 고치셔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소중하게 그를 사용하시도록 인도하십니다.
대도 조세형과 탈옥범 신창원을 변호해서 유명해진 엄상익 변호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54년 평택에서 태어나서 경기 중, 고등학교와 고대 법대를 거쳐 변호사가 된 사람입니다. 안기부 정책연구원에서 근무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에 핸들을 잡은 손의 감각이 이상했습니다. 두주간이 지나자 발가락까지 마비되었습니다. 전신의 말초신경이 파괴되는 특이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때 산다는 것이 너무 허망함을 느꼈답니다.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밤늦은 시각까지 병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아내를 보면서 엄변호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같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을 믿게 해주세요. 제가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절 죽게 하시면 여호와 하나님 손해십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은 오랜 투병 끝에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발가락부터 마비가 풀리더니 온전한 몸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사를 여호와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계획하고 진행합니다.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돈 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변호해줍니다. 삶의 소중함을 안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합시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엽시다. 열려진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모합시다. 성령을 받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히 쓰시려고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 충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20장 19-23절의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성령을 받는 날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첫째로 열려진 마음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위에 임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이 열려져야 합니다. 닫힌 마음에는 성령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어떤 예술제에 아름다운 집 설계도가 출품되었답니다. 집의 내부구조나 집의 방향, 후원의 뜰과 화단 조경까지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공간처리도 거의 완벽한 전원주택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발견된 것이 있었는데 문에 문고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완성품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한 심사위원이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이 설계도는 완성품입니다. 이 설계도는 사람의 마음의 집을 설계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문에는 고리가 밖으로 달려있지 않고 안으로 달려 있습니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 그 얘기를 들은 모든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열려진 마음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 영의 문이 닫혀 있으면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강림절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의 영이 내안에 들어오십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오시기를 원하시지만 문을 단단히 닫아두고 있으니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1.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2.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3.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아멘(찬325장)
우리는 가끔 “여호와 하나님이 혹시 나를 잊으셨나 나를 외면하시는건가 내 안에 계시지 않으니 신앙생활이 발전이 없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성령님을 받고 활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는 도대체 그런 체험이 없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가” 이런 의심이 내 신앙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문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여러분 안에 임하실 것입니다.
제가 아는 미국 목사님은 목회를 20여년 이상 하는데도 담담한 신앙밖에는 없었답니다. 남들은 성령의 체험을 뜨겁게 했다는데 자기는 아무런 체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목회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무릎 꿇고 외쳤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도 성령 받고 싶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소서! 성령님이여, 내안에 오시옵소서!” 밤새도록 부르짖었답니다. 새벽이 오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목회를 단념하기로 했습니다. 일어서려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왜 성령님을 체험하려 하느냐” “사랑하려구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면서 가슴에 이상한 기운이 들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내가 너를 매우 사랑하노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고꾸라져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 외쳤답니다.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그때부터 그분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날개를 펼치며 하늘을 날을 듯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처럼 마음이 열리면 성령님을 받습니다. 영의 문이 열리면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까닭은 성령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해결해 주십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외롭지도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평소에 이렇게 자주 말씀하던 예수님은 부활 후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겁내지 맙시다. 우리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 주님의 영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키십니다. 홀로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신 이유는 우리를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기 보낸다는 말은 멀리 선교사로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일하시려는 곳으로 우리를 보내셔서 쓰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않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에 어떻게 쓰시려고 하십니까 성경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이 말씀을 읽다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친구들이 데려온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서기관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장면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막 2:6-8,10)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기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 20:23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도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은 “죄사함의 권세”를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 이런 권세를 얻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들은 너무 자의적 해석들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 이 말씀은 선교차원에서 먼저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것을 받아드리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거부하는 자는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회개의 열매를 맺어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은 죄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끝내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세가 있으니 사도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가 복음을 듣지 못하여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사도들의 책임입니다. 선교에 대한 사도들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먼저 택함 받은 우리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선교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죄의 권능을 주셨다는 말은 죄의 원흉인 사단을 몰아낼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죄의 원흉입니다. 잭 에드거는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성령이 그 안에 들어오셔서 놀라운 결단을 하게 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1,700여개의 점포에 음란의 죄를 짓게 하는 도색잡지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를 모두 거두어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점포에 지시를 내렸습니다. 물론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으나 그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300만 달러의 수입을 집어던진 것입니다. 사업의 큰 위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축복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 20,000여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합니다. 세븐 일레븐(7 Eleven)이 바로 그 회사입니다. 지금도 7 Eleven에서는 도색잡지를 팔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잭 에드거의 마음에 자리 잡은 죄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옵니다. 질병을 가져옵니다. 실패를 가져옵니다. 절망을 가져옵니다.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넘어지게 합니다. 실컷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멸망의 늪에 처박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본성이요 목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은 성도들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질병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성령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고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병든 자를 고치셔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소중하게 그를 사용하시도록 인도하십니다.
대도 조세형과 탈옥범 신창원을 변호해서 유명해진 엄상익 변호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54년 평택에서 태어나서 경기 중, 고등학교와 고대 법대를 거쳐 변호사가 된 사람입니다. 안기부 정책연구원에서 근무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에 핸들을 잡은 손의 감각이 이상했습니다. 두주간이 지나자 발가락까지 마비되었습니다. 전신의 말초신경이 파괴되는 특이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때 산다는 것이 너무 허망함을 느꼈답니다.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밤늦은 시각까지 병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아내를 보면서 엄변호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같이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을 믿게 해주세요. 제가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절 죽게 하시면 여호와 하나님 손해십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은 오랜 투병 끝에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발가락부터 마비가 풀리더니 온전한 몸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사를 여호와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계획하고 진행합니다.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돈 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변호해줍니다. 삶의 소중함을 안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합시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엽시다. 열려진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모합시다. 성령을 받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히 쓰시려고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 충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