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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이 오시면

본문

그 동안 우리는 요15장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제자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지나 시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이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우리는 빛의 자녀요 세상은 어두움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두움이 빛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까지는 15장에 계속해서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박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당시의 분위기를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당장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과 9시간 후에는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혼돈과 암흑의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누가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순입니다. 의로운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시는 등 어디를 보아도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를 지시므로 암흑과 권세의 승리를 보는 것 같아, 만약 십자가 후에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의도, 진리도 소망도 없는 깜깜한 세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과 부조리, 비합리와 어두움, 그리고 혼돈이 목전에 닿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고 미혹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핍박이 가해지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만이 아니라 부활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목 베임을 당하여 세상적으로 볼 때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일들을 예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출회당하리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1-2절 상반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적인 독특한 공동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당입니다. 이들은 이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 집만 모여도 반드시 회당을 짓고 명부를 만들어 공동체를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로 말하면 등록 교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만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이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하면 그 순간부터는 이방인이 되어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이렇게 될 때는 돌로 쳐죽여도 살인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출교를 당하면 이웃과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스데반과 같이 돌로 쳐죽여도 무방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요9장에 보면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된 소경이 부모가 출교 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출교 당하게 되고 핍박을 받고 어렵게 순교하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출교를 할 때, 그들의 생각입니다.
2절 하반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저들의 생각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그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을 때도 율법을 빙자해서 죽였습니다. 왜 이렇게 큰 실수를 하게 되었을까요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가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에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고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핍박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은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스럽게 섬긴다고 생각했으나 영적으로 무지뭉매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교회에서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혼돈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실족하게 되기도 합니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부적으로 핍박과, 내적으로 신앙의 혼돈이 있을 대 어떻게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 성령 충만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번 봅시다.
3년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듣고 큰 이적을 경험했어도 환난과 시험이 오니까 주님을 부인하며 다 도망갔습니다. 어디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지 않으면 별수 없이 환난과 시험이 올 때 배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바른 신앙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고 참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1.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14:26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가끔 나이 많으신 성도들 중에서 좋은 설교 말씀을 듣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데 다 잊어버릴 것 같아 미리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성령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도와주십니다. 기억나게 한다는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나 보고 깨닫고 감격한 일들이 일단 잊어버렸다가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 문을 열어서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지혜를 주어 깨닫게도 하고, 순종하게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잠자는 것같이 가만히 있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미 듣고 본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핍박을 견디며 사랑하게 하여 말씀의 효과가 드러나며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이론으로 생각하면 보다 쉽게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자를 심었는데, 심었다고 다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여건에서 일정한 때가 되어야만 싹이 납니다.
잔디씨 중에는 동면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냉장고에 적절한 온도에 맞추어 유지했다가 뿌리면 싹이 납니다.
씨앗을 뿌려도 적당한 여건이 되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졌습니다. 뿌려졌다고 다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씀들이 싹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듣고 배워서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말씀들이 생각나게 해서 열매를 맺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16:7절에 ..........................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우시지 않을 것이요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이전 시대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눅1:1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고 41절에서는 엘리사벳이, 67절에서는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눅2:25절에 보면 시므온에게도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성령이 일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께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역사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후에는 성령이 오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계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예수 믿게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고, 환난과 시험을 이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여 믿음으로 살게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셨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지만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역사 하십니다. 각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계실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성령과 우리 성도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성령을 알지도 못한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롬8: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환난에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8-11절)
 셋째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했습니다.
책망하신다는 말씀은 판정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정하신다는 것입니다.
1) 죄에 대하여 판정
9절에........................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무엇이 바른 것인지 판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율법이지만 죄를 심판하는 것, 즉 판정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율법의 대명사는 고발자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우리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성령 받은 사람은 죄를 고발당합니다.
이것을 좀더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당연히 죽일 자를 죽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찌할꼬"하면서 통회했는데 이때 회개한 사람은 3천명,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한 사람들은 로마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3천명의 성도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성령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줍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세상이 죄로 가득 찬 것과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의에 대한 판정
10절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이 "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신 것이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의를 이루신 최후 계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법률의의를 자랑하고, 세상 사람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만 여기 주님께서는 전연 새로운 의의 표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인류에게 의로와 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의로워 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이요 멸망 받을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셨으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의이며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되어 모든 사람이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에 가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3) 심판에 대한 판정
11절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았고 제사장들은 여기에 동조했습니다. 관원들도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의 심판은 그 위에 있습니다. 빌라도가 결코 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은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빌라도가 아무리 판정을 했어도 그것으로 의와 불의가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참 심판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인을 죄인이라고 판정했다는 것은 판정한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재판하는 순간을 성령으로 보면, 재판장인 빌라도가 죄인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이 피고요 빌라도가 재판장이며 원고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자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이 재판장이시고 빌라도가 오히려 피고로서 지금 재판 받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의 임금들을 심판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십니다. 성령이 심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항상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과 함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하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도 하시고 알게도 하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핍박 중이든, 환난 중이든, 혼미한 중이든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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