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본문
4월 27일(월)에 우리교회에서 저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용인의 포곡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은 결혼한지 15년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교인수가 400여명정도 되면 중형교회인데 자녀가 없으니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고민을 언젠가 털어놓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합심해서 기도를 했는데 그 다음달 모임에서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임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에게서 1년안에 자녀가 생기지 않는다면 일단 불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한번쯤은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15년동안 아이가 없었다면 의사들은 포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것도 첫아이를 놓고 뒤이어서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인들이 뒤 늦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출산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그녀의 나이 90세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늙었고, 사라의 몸에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한동안 늦동이를 보는 집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여자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 아이를 다시 가집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걱정부터 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출산하다가 잘못되지 않을까" 그러나 말많은 사람들은 뒤돌아서서 '주책이야 주책! 저 나이에 무슨 애기람'하면서 비웃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비록 자식을 원해서 아이를 가졌지만 정작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라에게도 이 두가지 모두 적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라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주위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자식이 없다지만 그래도 90세에 아이라니 남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라면 '사라 나이 90세인데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아이를 낳다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뭏튼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90세의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였던 엘리사벳도 본래 수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늙으막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던 세례요한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에는 종종 나이가 많아서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인들이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위대하시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임신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할머니의 얘기가 아니라 아예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인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동정녀 탄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한국신화를 보니까 신화속에 가지 각색의 탄생설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석탈해(昔脫解)라는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왜국 동북 1천리에 있는 다파나(多婆那)라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나라의 왕비가 임신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불길한 일이라 여기고 알을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나무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웠습니다. 처음에는 금관국에 도착했으나 사람들이 수상한 상자라고 집어 올리지 않았고 다음에 진한의 아진(阿珍) 나루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해변에 살던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상자가 물에 떠올 때, 까치가 따라와서 까치 작(鵲)의 한 쪽을 따서 성을 '석'(昔)으로 하고 상자를 풀어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역시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하루는 양산(楊山) 기슭의 우물이 있는 한 숲속에서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알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알에서 아이가 태어나 왕이 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표주박 모양이라해서 박씨(朴氏)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고대신화에 재미있는 각종의 탄생설화가 있는데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와같은 신화나 혹은 전해내려오는 설화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동정녀 탄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들에 의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일이 있을 것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일, 다시말씀드려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두고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는지요 혹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사람은 당연히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물위를 걸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아무리 마술을 부려보아도 10명도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천명을 먹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잠시 기절한 사람을 깨어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은지 4일이 지나서 그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죽은자를 절대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신학자의 말대로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신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일 수 없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지만 그도 워터루 전쟁에서 영국의 웰링턴장군에 의해 대패를 하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당했습니다. 분명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알지 못할 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가끔 엉뚱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도 차라리 신화에 나오는 박혁거세나 석탈해처럼 알에서 태어났다고 할 것이지 굳이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동정녀 탄생이냐'고 말입니다.
양복을 사면 양복주머니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양복과 똑같은 약간의 천조각과 그 양복에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단추들입니다, 비닐포장지안에 넣어서 양복주머니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주머니에 들어있으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옷이 모양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양복회사에서는 그것을 넣어둡니까 혹 단추가 떨어지면 똑같은 단추를 달라는 것이고, 혹 옷이 조금이라도 헤어지면 필요한 부분만큼 같은 천을 이용해서 그 부분을 고치라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옷이 헤어졌다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헤어진 곳에 양철판을 붙이는 사람이 있나요 흰단추가 없는데 그곳에 검은단추를 다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헤어진 곳은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천으로 고쳐야 제격입니다, 떨어져서 잃어버린 단추도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단추를 사용하는 것이 제격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사람의 몸을 빌려서 오게 하신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신기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땅에 오게 하실 수 있지만 이땅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동일한 방법으로 태어나시면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도 아담의 계보에서 태어나는 자손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을 빌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지만 육신의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갇혀 계시는 유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관념을 뛰어넘으시는 분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미리 결혼할 사람을 정해놓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부모님들 사이에서도 미리 정혼을 해두었다가 자녀들이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켰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마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그렇게 해서 신랑 얼굴도 모른채 결혼하신 분이 혹 있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님들 사이에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적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파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이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 정혼의 과정을 거치고나면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여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이를 낳게 될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리아가 정혼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요셉을 한번도 가까이 한일이 없는데 임신해서 배가 불러온다면 그것은 간음을 행하였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일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니까" 하면서 별생각없이 지나갈는지 모르지만 사실 마리아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에서 간음한 여인은 모두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면에 있어서 죽음보다 마리아가 더 큰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 요셉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입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워 임신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여인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것은 여인으로서 어쩌면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것까지도 다 감내하면서 마리아는 순종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때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자신이 간음한 여인으로 오해받을 것과 그로인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이런 저런 걱정에 휩싸여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무슨 말입니까 요셉도 마리아가 간음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자신과 정혼하고 결혼할 날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했다니 얼마나 분노를 느꼈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여러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게 되기 때문에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고서 이일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중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만약 요셉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부터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종종 어떤 문제에 관해 속단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혼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기전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속단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의문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될텐데 그 아이는 마리아가 순결하지 못해서 가지게 된 아이가 아니라 내가 인류를 위해서 큰 계획을 가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케 한 아이니 염려하지 말아라'고 한번쯤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그렇게 요셉에게 말씀하셨더라면 요셉이 마리아를 오해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서로가 다 좋았을텐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실때에도 양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말씀해주셨더라면 사흘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한번쯤은 생각을 해봄직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얘기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온전한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0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이 그 일에 관해 생각할 때에 나타나셔서 요셉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정확한 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 여러분이 기도하고 오랫동안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다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혹 그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응답하실 때가 언제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서두르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고기를 굽는데 아이가 달라고 막 때를 씁니다, 그렇다고 덜 구운 상태에서 그 고기를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가장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 아이에게 줍니다, 덜 익은 것은 먹으면 아이는 배탈이 나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가 보채더라도 다 구워질때까지는 주지 않는 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가장 정확한때에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라고 여기신 그때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이 '예수'이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알고도 지은죄 모르고도 지은죄'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얼마나 죄의 종류가 많았으면 자기가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조차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죄라해도, 죄의 원인이 수만가지라해도, 그 해결책은 오직 한가지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분이시며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혹 여러분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문이십니다. 그분이 비록 인간의 몸을 빌어서 이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에게서 1년안에 자녀가 생기지 않는다면 일단 불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한번쯤은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15년동안 아이가 없었다면 의사들은 포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것도 첫아이를 놓고 뒤이어서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인들이 뒤 늦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출산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그녀의 나이 90세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늙었고, 사라의 몸에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한동안 늦동이를 보는 집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여자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 아이를 다시 가집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걱정부터 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출산하다가 잘못되지 않을까" 그러나 말많은 사람들은 뒤돌아서서 '주책이야 주책! 저 나이에 무슨 애기람'하면서 비웃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비록 자식을 원해서 아이를 가졌지만 정작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라에게도 이 두가지 모두 적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라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주위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자식이 없다지만 그래도 90세에 아이라니 남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라면 '사라 나이 90세인데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아이를 낳다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뭏튼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90세의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였던 엘리사벳도 본래 수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늙으막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던 세례요한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에는 종종 나이가 많아서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인들이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위대하시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임신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할머니의 얘기가 아니라 아예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인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동정녀 탄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한국신화를 보니까 신화속에 가지 각색의 탄생설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석탈해(昔脫解)라는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왜국 동북 1천리에 있는 다파나(多婆那)라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나라의 왕비가 임신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불길한 일이라 여기고 알을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나무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웠습니다. 처음에는 금관국에 도착했으나 사람들이 수상한 상자라고 집어 올리지 않았고 다음에 진한의 아진(阿珍) 나루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해변에 살던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상자가 물에 떠올 때, 까치가 따라와서 까치 작(鵲)의 한 쪽을 따서 성을 '석'(昔)으로 하고 상자를 풀어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역시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하루는 양산(楊山) 기슭의 우물이 있는 한 숲속에서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알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알에서 아이가 태어나 왕이 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표주박 모양이라해서 박씨(朴氏)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고대신화에 재미있는 각종의 탄생설화가 있는데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와같은 신화나 혹은 전해내려오는 설화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동정녀 탄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들에 의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일이 있을 것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일, 다시말씀드려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두고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는지요 혹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사람은 당연히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물위를 걸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아무리 마술을 부려보아도 10명도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천명을 먹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잠시 기절한 사람을 깨어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은지 4일이 지나서 그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죽은자를 절대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신학자의 말대로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신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일 수 없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지만 그도 워터루 전쟁에서 영국의 웰링턴장군에 의해 대패를 하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당했습니다. 분명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알지 못할 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가끔 엉뚱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도 차라리 신화에 나오는 박혁거세나 석탈해처럼 알에서 태어났다고 할 것이지 굳이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동정녀 탄생이냐'고 말입니다.
양복을 사면 양복주머니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양복과 똑같은 약간의 천조각과 그 양복에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단추들입니다, 비닐포장지안에 넣어서 양복주머니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주머니에 들어있으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옷이 모양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양복회사에서는 그것을 넣어둡니까 혹 단추가 떨어지면 똑같은 단추를 달라는 것이고, 혹 옷이 조금이라도 헤어지면 필요한 부분만큼 같은 천을 이용해서 그 부분을 고치라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옷이 헤어졌다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헤어진 곳에 양철판을 붙이는 사람이 있나요 흰단추가 없는데 그곳에 검은단추를 다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헤어진 곳은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천으로 고쳐야 제격입니다, 떨어져서 잃어버린 단추도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단추를 사용하는 것이 제격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사람의 몸을 빌려서 오게 하신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신기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땅에 오게 하실 수 있지만 이땅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동일한 방법으로 태어나시면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도 아담의 계보에서 태어나는 자손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을 빌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지만 육신의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갇혀 계시는 유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관념을 뛰어넘으시는 분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미리 결혼할 사람을 정해놓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부모님들 사이에서도 미리 정혼을 해두었다가 자녀들이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켰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마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그렇게 해서 신랑 얼굴도 모른채 결혼하신 분이 혹 있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님들 사이에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적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파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이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 정혼의 과정을 거치고나면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여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이를 낳게 될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리아가 정혼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요셉을 한번도 가까이 한일이 없는데 임신해서 배가 불러온다면 그것은 간음을 행하였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일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니까" 하면서 별생각없이 지나갈는지 모르지만 사실 마리아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에서 간음한 여인은 모두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면에 있어서 죽음보다 마리아가 더 큰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 요셉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입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워 임신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여인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것은 여인으로서 어쩌면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것까지도 다 감내하면서 마리아는 순종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때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자신이 간음한 여인으로 오해받을 것과 그로인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이런 저런 걱정에 휩싸여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무슨 말입니까 요셉도 마리아가 간음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자신과 정혼하고 결혼할 날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했다니 얼마나 분노를 느꼈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여러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게 되기 때문에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고서 이일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중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만약 요셉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부터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종종 어떤 문제에 관해 속단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혼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기전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속단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의문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될텐데 그 아이는 마리아가 순결하지 못해서 가지게 된 아이가 아니라 내가 인류를 위해서 큰 계획을 가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케 한 아이니 염려하지 말아라'고 한번쯤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그렇게 요셉에게 말씀하셨더라면 요셉이 마리아를 오해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서로가 다 좋았을텐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실때에도 양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말씀해주셨더라면 사흘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한번쯤은 생각을 해봄직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얘기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온전한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0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이 그 일에 관해 생각할 때에 나타나셔서 요셉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정확한 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 여러분이 기도하고 오랫동안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다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혹 그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응답하실 때가 언제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서두르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고기를 굽는데 아이가 달라고 막 때를 씁니다, 그렇다고 덜 구운 상태에서 그 고기를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가장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 아이에게 줍니다, 덜 익은 것은 먹으면 아이는 배탈이 나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가 보채더라도 다 구워질때까지는 주지 않는 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가장 정확한때에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라고 여기신 그때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이 '예수'이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알고도 지은죄 모르고도 지은죄'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얼마나 죄의 종류가 많았으면 자기가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조차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죄라해도, 죄의 원인이 수만가지라해도, 그 해결책은 오직 한가지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분이시며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혹 여러분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문이십니다. 그분이 비록 인간의 몸을 빌어서 이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