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 받고 싶습니까?
본문
기독교의 생명체는 성령입니다. 교회의 생명체도 성령입니다. 기독교가 살아있는 종교라 함은 성령이 살아있다는 말이요, 성령충만하지 못한 기독교는 이미 죽은 종교에 불과합니다. 교회도 성령이 계실 때만 교회요, 성령이 거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곧 성령이요, 교회도 곧 성령입니다. 교회가 탄생된 것도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비롯되었습니다.
성령(The Holy Spirit)은 ‘거룩한 영’이라는 말인데 히브리어로는 ‘루아흐’(ruach), 희랍어로는 ‘프뉴마’(pneuma)라 부릅니다. 구약의 루아흐는 ‘바람, 영, 숨, 호흡’이란 뜻을 갖고 있어서 성령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 여호와 하나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숨”으로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신약의 ‘프뉴마’는 루아흐가 갖는 “바람, 숨, 영” 외에 神 자체의 존재 또는 현현(顯現)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삼위일체의 성령이 갖는 의미는 대충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모습이 너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헷갈리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성령이 불길 같이 임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빛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불로 오시고, 어떤 때는 작은 불꽃으로 오신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천둥번개를 몰고 온다고 했고, 어떤 때는 이슬비 같은 성령으로 오신다 했습니다. 새싹을 움돋게 하는 봄비처럼 성령께서 오신다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까 어떤 때는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신다 했고, 어떤 때는 강물같이 넘치는 은혜의 神으로 오신다 하였습니다. 성령은 도대체 실체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의 영(the Spirit)이십니까 내게 찾아오시는 성령은 어떤 모습의 성령이십니까
지금 교회는 성령강림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떤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더니 식사를 대접하는 집사님이 자기는 성령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흥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싶어도 성령 받을까봐 겁이나서 부흥회에 나오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을 보면 기절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 대거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하지를 않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혀를 날름거리며 쏟아내는 방언하는 모습을 보면 무서움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 받으면 자기도 모르는 죄를 토해낸다는데 몰래 지은 죄까지 튀어나오면 창피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회개도 가려가며 해야지 아무 것이나 사람들 앞에서 하면 큰일 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 사람들은 성령 받기가 두렵고 무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성령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 성령님은 그렇게 창피를 주어서 망신시키고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살 수 없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성령님은 언제나 기분 좋게 사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신바람 나는 삶의 길로 안내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멋진 설교를 여러분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며 성경 읽다가 받은 영감인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맞춤형으로 오신다는 설교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지고 적합한 표현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성령님을 “맞춤형 성령님”으로 표현한 사람은 저 혼자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은 60억 인구의 각 사람에게 꼭 맞는 형태로 찾아오시니 겁낼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영인지 아십니까
첫째로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경이 성령님을 묘사할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둘기처럼 성령님은 지혜롭다는 표현입니다. 예로부터 비둘기는 동물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새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혜의 성령을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구약에 타나난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ruach)은 거룩한 분별력과 지혜를 주시는 영으로 묘사된 적이 많습니다. ‘지혜’란 히브리어로 ‘호크마’()라 부르는데 ‘알다’라는 포괄적 의미 하에서 근본적으로 악을 행치 않으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나오는 명철과 사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지혜라 일컬었습니다. 성령은 바로 이 지혜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분별하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神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그렇기 때문에, 보혜사가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는 “돕는자, 상담자”라는 말이니 어머니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요한복음 15:26-27에서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보혜사”(comforter)는 ‘위로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손 잡아주시며 위로와 평안, 그리고 희망과 축복의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악을 멀리하며 죄에 오염되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불길 같이 임하신다고 했는데 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불길은 태워 없앨 뿐만 아니라, 용광로처럼 정제시켜서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불길같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다는 사도행전의 말씀이 늘 성령의 상징성을 보여 줍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2-3)
“급하고 강한 바람”이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듯한 성령의 강림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의미는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 이 성령 강림은 나약하고 자신 없었던 제자들을 복음의 용사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겁에 질려 있던 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아가 자신 있게 부활의 예수님과 복음을 전할 때 하루에 3,000명 이상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댔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5-17)
불길 같은 성령은 때로는 단비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단비(이슬비 또는 봄비)는 메마른 광야를 생명의 땅으로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체들을 다시 살려내는 힘이 있습니다. 황무지를 변화시켜 아름다운 에덴의 동산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단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단비는 고갈된 영혼에게 위안과 평안, 그리고 생명의 풍성함을 줍니다. 성령이 단비처럼 우리에게 임하면 메마른 심령, 말라버린 심령에 새생명을 불어 넣어 풍성한 생명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회개시킬 때도 우리 각자에게 맞는 회개를 시킵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를 부끄럽게 하거나 얼굴을 들 수 없도록 망신 주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은 지혜롭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보혜사 되신 성령님은 위로자요, 상담자로 찾아오셔서 복되고 평강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불길 같은 성령님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도록 바꾸어 놓으십니다.
멋쟁이 한국여인이 큰 꿈을 안고 백인 남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외모를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잘생긴 청년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1년도 안되어 이 남자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고, 거칠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숨어있던 이 두 발톱이 불쌍한 한국여인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계속되어지는 폭력과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가정경제의 피폐로 착한 한국여인의 인내에 한계가 왔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었고 잘못된 운명에 대한 불평과 원망과 저주가 이 여인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날 밤 철야기도회에 억지로 참석하였다가 기도의 열기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사력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분이 눈물로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찬송을 합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저를 찾아온 그녀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면 세상은 그대로 있고 그녀의 마음이 바뀐 듯 했는데 그녀는 세상이 바뀌었답니다. 한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고, 1년쯤 되었을 때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세상이 바뀌어갔습니다. 남편도 바뀌어 갔고, 그녀의 직장도 바뀌어 갔고, 그녀의 속회도 바뀌어 갔습니다. 묘한 세상입니다.
성령 받으면 이렇게 세상이 바뀝니다. 아니 자신이 바뀌어질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가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시카고의 디와이트 무디가 그러했고, 빌리 그래함이 그랬습니다. 영국의 존 웨슬리가 그랬고, 스펄젼이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익두가 그러했고, 손양원이 그러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니 그들의 세상이 바뀌어 갔습니다.
어떤 성령을 받아야 되느냐구요
아무 성령님이면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내게 언제나 맞춤형으로 오시니 어떤 성령을 받아야 하느냐는 염려는 버려도 좋습니다. 나와 맞지 않는 성령을 받아서 부끄럽게 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느냐구요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평안을 누립니다. 지금까지 나를 짓눌렀던 모든 근심, 걱정, 불안, 염려 다 사라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성령을 받으면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인생, 병든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 때문에 거지의 인생을 살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풍성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더 큰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인생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더 큰 세상을 살게 합니다. ‘출세 한다’는 말을 세속적인 의미로만 생각하면 과거급제라든지 정부각료에 임명된다든지 권세를 잡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출세”는 더 큰 세상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죄악된 세속의 세계만 보지 않고 하늘을 포함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받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도 잘 믿고,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도 잘 감당하는 사람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명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이행되어지는 과정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 14장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 24장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있으면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는 성령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듯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간구하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늘 성령충만 했으면 더 할 소원이 없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인생의 열매를 얻습니다. 인생을 다 산 후에 결산해보니 아무런 열매 없는 쭉정이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제일 부끄러운 일은 열매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인생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됩니다.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어질 뿐 아니라 한번 사는 우리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들어 줍니다. 자랑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성령(The Holy Spirit)은 ‘거룩한 영’이라는 말인데 히브리어로는 ‘루아흐’(ruach), 희랍어로는 ‘프뉴마’(pneuma)라 부릅니다. 구약의 루아흐는 ‘바람, 영, 숨, 호흡’이란 뜻을 갖고 있어서 성령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 여호와 하나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숨”으로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신약의 ‘프뉴마’는 루아흐가 갖는 “바람, 숨, 영” 외에 神 자체의 존재 또는 현현(顯現)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삼위일체의 성령이 갖는 의미는 대충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모습이 너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헷갈리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성령이 불길 같이 임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빛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불로 오시고, 어떤 때는 작은 불꽃으로 오신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천둥번개를 몰고 온다고 했고, 어떤 때는 이슬비 같은 성령으로 오신다 했습니다. 새싹을 움돋게 하는 봄비처럼 성령께서 오신다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까 어떤 때는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신다 했고, 어떤 때는 강물같이 넘치는 은혜의 神으로 오신다 하였습니다. 성령은 도대체 실체가 무엇이며 어떤 성격의 영(the Spirit)이십니까 내게 찾아오시는 성령은 어떤 모습의 성령이십니까
지금 교회는 성령강림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떤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더니 식사를 대접하는 집사님이 자기는 성령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흥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싶어도 성령 받을까봐 겁이나서 부흥회에 나오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을 보면 기절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 대거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하지를 않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혀를 날름거리며 쏟아내는 방언하는 모습을 보면 무서움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 받으면 자기도 모르는 죄를 토해낸다는데 몰래 지은 죄까지 튀어나오면 창피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회개도 가려가며 해야지 아무 것이나 사람들 앞에서 하면 큰일 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 사람들은 성령 받기가 두렵고 무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우는 성령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 성령님은 그렇게 창피를 주어서 망신시키고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살 수 없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성령님은 언제나 기분 좋게 사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신바람 나는 삶의 길로 안내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멋진 설교를 여러분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며 성경 읽다가 받은 영감인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맞춤형으로 오신다는 설교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지고 적합한 표현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성령님을 “맞춤형 성령님”으로 표현한 사람은 저 혼자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은 60억 인구의 각 사람에게 꼭 맞는 형태로 찾아오시니 겁낼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영인지 아십니까
첫째로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경이 성령님을 묘사할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둘기처럼 성령님은 지혜롭다는 표현입니다. 예로부터 비둘기는 동물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새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혜의 성령을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구약에 타나난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ruach)은 거룩한 분별력과 지혜를 주시는 영으로 묘사된 적이 많습니다. ‘지혜’란 히브리어로 ‘호크마’()라 부르는데 ‘알다’라는 포괄적 의미 하에서 근본적으로 악을 행치 않으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함에서 나오는 명철과 사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지혜라 일컬었습니다. 성령은 바로 이 지혜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분별하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神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그렇기 때문에, 보혜사가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는 “돕는자, 상담자”라는 말이니 어머니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요한복음 15:26-27에서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보혜사”(comforter)는 ‘위로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손 잡아주시며 위로와 평안, 그리고 희망과 축복의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악을 멀리하며 죄에 오염되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불길 같이 임하신다고 했는데 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불길은 태워 없앨 뿐만 아니라, 용광로처럼 정제시켜서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불길같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다는 사도행전의 말씀이 늘 성령의 상징성을 보여 줍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2-3)
“급하고 강한 바람”이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듯한 성령의 강림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의미는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 이 성령 강림은 나약하고 자신 없었던 제자들을 복음의 용사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겁에 질려 있던 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아가 자신 있게 부활의 예수님과 복음을 전할 때 하루에 3,000명 이상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댔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5-17)
불길 같은 성령은 때로는 단비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단비(이슬비 또는 봄비)는 메마른 광야를 생명의 땅으로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체들을 다시 살려내는 힘이 있습니다. 황무지를 변화시켜 아름다운 에덴의 동산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단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단비는 고갈된 영혼에게 위안과 평안, 그리고 생명의 풍성함을 줍니다. 성령이 단비처럼 우리에게 임하면 메마른 심령, 말라버린 심령에 새생명을 불어 넣어 풍성한 생명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회개시킬 때도 우리 각자에게 맞는 회개를 시킵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를 부끄럽게 하거나 얼굴을 들 수 없도록 망신 주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은 지혜롭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보혜사 되신 성령님은 위로자요, 상담자로 찾아오셔서 복되고 평강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불길 같은 성령님은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도록 바꾸어 놓으십니다.
멋쟁이 한국여인이 큰 꿈을 안고 백인 남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외모를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잘생긴 청년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1년도 안되어 이 남자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고, 거칠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숨어있던 이 두 발톱이 불쌍한 한국여인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계속되어지는 폭력과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가정경제의 피폐로 착한 한국여인의 인내에 한계가 왔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었고 잘못된 운명에 대한 불평과 원망과 저주가 이 여인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날 밤 철야기도회에 억지로 참석하였다가 기도의 열기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사력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분이 눈물로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찬송을 합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저를 찾아온 그녀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면 세상은 그대로 있고 그녀의 마음이 바뀐 듯 했는데 그녀는 세상이 바뀌었답니다. 한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고, 1년쯤 되었을 때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세상이 바뀌어갔습니다. 남편도 바뀌어 갔고, 그녀의 직장도 바뀌어 갔고, 그녀의 속회도 바뀌어 갔습니다. 묘한 세상입니다.
성령 받으면 이렇게 세상이 바뀝니다. 아니 자신이 바뀌어질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가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시카고의 디와이트 무디가 그러했고, 빌리 그래함이 그랬습니다. 영국의 존 웨슬리가 그랬고, 스펄젼이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익두가 그러했고, 손양원이 그러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니 그들의 세상이 바뀌어 갔습니다.
어떤 성령을 받아야 되느냐구요
아무 성령님이면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내게 언제나 맞춤형으로 오시니 어떤 성령을 받아야 하느냐는 염려는 버려도 좋습니다. 나와 맞지 않는 성령을 받아서 부끄럽게 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느냐구요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평안을 누립니다. 지금까지 나를 짓눌렀던 모든 근심, 걱정, 불안, 염려 다 사라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성령을 받으면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인생, 병든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 때문에 거지의 인생을 살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풍성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더 큰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인생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더 큰 세상을 살게 합니다. ‘출세 한다’는 말을 세속적인 의미로만 생각하면 과거급제라든지 정부각료에 임명된다든지 권세를 잡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출세”는 더 큰 세상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죄악된 세속의 세계만 보지 않고 하늘을 포함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받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도 잘 믿고,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도 잘 감당하는 사람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명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이행되어지는 과정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 14장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 24장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있으면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는 성령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듯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간구하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늘 성령충만 했으면 더 할 소원이 없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인생의 열매를 얻습니다. 인생을 다 산 후에 결산해보니 아무런 열매 없는 쭉정이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제일 부끄러운 일은 열매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인생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됩니다.
성령을 받읍시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어질 뿐 아니라 한번 사는 우리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들어 줍니다. 자랑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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