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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에 사로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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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몇 일 전 주일 전날에 식당에 내려갔다가 주일날의 식사를 준비하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내려가서 날씨가 추울 것 같아서 온풍기를 손질하는데 어느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저런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 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집사님이 말씀 하시기를 "우리 목사님이 마음이 안 놓여서 그러시지 뭐, 당신이 돌아보아야 마음이 편하신 거야" 제가 그이야기를 들으면서 개척교회 때의 상황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개척교회 때에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없거니와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고 재능이 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전문가가 필요하구나! 라는 결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내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성을 말씀을 하신 후에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성막의 모양은 출26-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지시하셨고 또한 성막 안에 있을 여러 가지 세워야 할 기구들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드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를 우리는 먼저 추적을 해야 하는데 성경의 출 29:45절의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본래 언약을 만드셨습니다. 그 언약은 십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그 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정확히 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나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땅이 아닙니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시내광야입니다.
그 장소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장소는 전갈과 들짐승으로 가득 찬 광야입니다. 그 장소는 아무런 자연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황량한 들판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고, 그들이 성막을 짓는데 하늘의 재료로 지으라고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통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성막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시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함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복이 아니라 화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실수를 하는 백성입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실수한 모양으로 선다는 것을 그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32~34까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3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모세가 시내산에서 늦게 내려오자 그 사이에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절을 하고 춤을 추면서 제례의식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어 집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양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실패담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성막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심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깐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면서 사람들을 내내 심판만 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감독하고 관리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아니면 실수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거듭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분명합니다.
원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거하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은 우레와 번개, 구름, 연기가 자욱한 곳, 불 가운데 계시며 산이 진동하는 곳이었습니다. (출19: 16-18).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함, 그리고 전능하신 권위가 있으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위대하시며 권능이 많으신 분이 성막 안에 계시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백성 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는 아닌 것 같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분명히 책망의 잣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치 못하면 여지없이 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장막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역에 지으라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거하실 수 있는 특별한 보호 장치는 성막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집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집이 필요하였던 것은 그 집이 갖는 의미입니다. 그 집이 갖는 기능 때문입니다. 이 집은 속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그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죄들이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 흘림으로 그들의 죄가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어서 덮는 것처럼 천막으로 그들의 죄를 덮는 성막을 여호와 하나님은 요청을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포기하시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떤 로마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이 병이 들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치료하여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기를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에 이 백부장이 말하기를 깜짝 놀래면서 사절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이 자기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이 자기의 집에 온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의 집에 오신다는 것은 자기는 죽음을 만나는 것처럼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역 속에 속해 있을 때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분 앞 에 서면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그분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안에 오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은혜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막을 짓는 중요한 동기는 이스라엘의 죄를 가리우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장막을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여호와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우리의 죄가 가리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시편기자는 말을 합니다. "그 죄의 사하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위하여 그들 가까이 오신다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한다면, 그 성막을 짓는 일은 모두가 참여 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을 하여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을 할 때에 그들이 준비를 하였다가 해방을 맞이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룻밤사이에 결정되어진 것들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나 상식적인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밤에 그들은 평상의 모양으로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의 소유한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거하실 성소를 짓는 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거하실 집을 짓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출25:2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 지니라" 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가 거하실 집을 지으시면서 하늘의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났던 만나의 경험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주셔서 그것으로 성막을 만들게 하시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집을 만드셨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의 것을 가지고 그분이 거하실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접근입니다.
용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직접적인 관계로만 가능합니다. 나는 예수를 향하여 마음의 생각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은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우리 집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서 내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서 내가 예수를 만날 수 잇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집의 환경이 예수를 믿는 집이었기에 내가 자동적으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19장을 보면 주님을 만나는 삭개오의 사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당시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는 세리장 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체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동네에 예수라는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그를 한번은 보고 싶은 생각에 그의 체면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여 보십시오. 어른이 그것도 그 동네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있는, 어른이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보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의 접근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그를 향하여 죄가 사하여 졌음을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믿음으로 오늘도 우리의 죄가 주안에서 용서받고, 그 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우리들에게 맡기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면 더 완벽하게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여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함께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붙잡혀서 쓰여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면되어진 자들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초라합니다.
여러분 가끔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이런 부분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차안에다가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달아놓고 크게 틀면서 다닙니다. 쾅쾅거리며 다녀요. 그런데 보면 그들은 대개는 창문을 열어놓고 다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연구를 하였지요. 왜 그렇게 소리를 크게 틀고 다닐까 그리고 왜 창문을 열어놓고 틀고 있을까 자기 혼자 음악에 관심이 있으면 되지! 그런데 제가 연구 분석을 한 결과 이런결론이 나왔어요.
그것은 자기가 그런 좋은,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달아 놀았는데 누가 알아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를 좀 알아 달라구 창문을 열어놓고 그렇게 큰소리 나는 스피커를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라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재미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을 하여주는 복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재능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셔야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할 수가 있을까 오늘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특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데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브사렛과 오홀리압이라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거하실 성막을 만들어 가면서 적당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견고하게 아니, 가장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장소는 광야이기 때문에 이동식 장막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조립하여야 하고 또 수없이 풀어서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튼튼하여야 하며 정교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인 브사렛과 오홀리압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보면 참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가는 일들 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래도 그 모든 설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 장막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선택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술이나 능력이나 우리들의 문화나 우리들의 삶의 터전들을 무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나의 방법을 선택하라는 오홀리압이나 브사렛의 개인의 사사로운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이거나 사사로이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두가지중의 하나로 선택이 되어서 움직여지고 잇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을 앞세우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깐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잣대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이 잣대가 필요합니다. 이 잣대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잣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중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잣대를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납니다. 큰소리가 납니다. 아픈 소리가 납니다. 인간적인 혈기가 납니다. 인간적인 불평의 소리로 세워집니다.
그 불완전한 광야중이건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성막의 재료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를 하시는데 출35:4-19절을 보면 광야 중에 필요하지 않아서 그들로 하여금 전혀 준비하지 않았을 것 같은 것까지 요구를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할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아예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처음에는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같아도 결국은 그의 뜻에 맡기고 나아가면 여호와 하나님은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들을 하여가면서 중요한 것은 성령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에 붙잡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에 붙잡히십시오. 이해가 안되어도 이해가 가지 않아도 해석이 안되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에 붙잡혀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붙잡혀지는 성도가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상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써주시는 줄로 믿으시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한은 그분의 영역에서 우리를 다듬고 변화를 시켜서 그분의 의도대로 인도하심을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전적인 동의를 하였을 때에 출35:3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방법이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온전하게 만들어 나갔다는 사실을 인정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재주를 인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더욱 맡기는 생활로 우리를 부르신 일들을 만들어 나가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재능이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우리들의 습관과 모양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사용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붙잡혀져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쓰시려하는데 왜 자꾸 멀리 갑니까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은사가 없나봐, 나는 이런 일에는 흥미가 없어, 나는 교회 일을 하고 싶은데 배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아닙니다. 어떤 한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 쓰여지지 않기로 배제된 삶은 한사람도 없고 어떤 한 사람도 모두 다 할만한 능력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이제 다만 성령에 잡혀졌다면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에 따라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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