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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첫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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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 13 남북 정상들이 만났던 날은 새천년을 맞는 첫 성령강림절 첫째 주간임을 상기할 때 이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되는 해에 기독교가 말하는 희년의 햇수인 50년에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남북 6. 15공동선언 제1주년과 2001년 성령강람절 첫째주간의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희년 정신의 중요성은 공동체성의 회복, 곧 일치에 있다. 한반도에 있어 공동체성의 회복과 일치는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한편 교회력의 새 천년 첫 성령강림절에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평화정착의 전기를 마련한 점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한 민족을 역사(役事)하심이라 생각하고 이것은 우연한 예사로움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부활절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오순절이라고 하고 이날은 교회에서 부활절 다음으로 중요한 축일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역사의 요인들은 성령의 역사처럼 교회 안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화해는 인간공동체 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역사를 교회안에서 그의 백성의 작용으로 행하시며 그리고 그 역사는 그가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것과 똑같은 것 즉 화해이다. 성령의 역사는 화해이며 교회의 역사도 화해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는 같으며 그리고 그것들이 같게 되는 것은 인간들에 의하여 이룩된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고찰할 때 우리는 인간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교류의 동력에 관심을 두게 되며 그 동력을 여호와 하나님의 화해 활동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김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제의하고 화해의 사도로서 먼저 찾아가고 민족화합, 상호불가침, 교류협력의 3대 남북 기본합의서 원칙을 재확인하는 등 북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열렬한 환영과 북한 인민들의 눈물과 신들린 환영인파는 한 민족 반세기의 한을 풀어주기에 넉넉했고, 남한 온 겨레의 피솟는 감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화해의 움직임은 7천만 민족의 화해 일치의 실천자가 되어 냉전 체제를 종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을 믿는다.
하나의 민족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피를 흘린 지 반세기(50년), 그 희년의 역사를 계획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남과 북의 정상이 서로 만나기 전 비행기 트랩 위에서 잠시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 하심을 생방송으로 세계와 함께 볼 수 있었다. 또한 ‘내가 해방되었다’고 고백하는 북조선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고백 속에서 그동안 우리 모두가 감옥을 만들고 스스로 갇혀 살았던 냉전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성령의 은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과거 역사로부터의 단절이며 미래의 새 역사에 돌입하는 하나의 기회이다. 희년 정신의 중요성은 공동체성의 회복, 곧 일치에 있다. 한반도에 있어 공동체성의 회복과 일치는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한편 교회력의 새 천년 첫 성령강림절에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평화정착의 전기를 마련한 점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한 민족을 역사(役事)하심이라고 믿는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으면서 성령강림절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두 종류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오순절날 모인 제자들에게 임한 불같은 성령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으로서 그 곳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인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고요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자제하는 듯한 역사를 신약본문에서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쪽이 바른 것이고 다른 한편은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의 지나친 열성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바르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둘 다 성경에 속하는 것이요, 신앙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간주 하면서 성령에 관하여 성서의 의미를 새겨본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지칭하는데 사용된 구약에서의 단어는 주로 ‘루하’이며 신약에서의 단어는 ‘프뉴마’이다. ‘루하’는 대기 특히 바람을 가리키는데 이 바람은 때로는 온화하고 이득을 주나 때로는 광포하고 파괴적인 그러한 불가시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힘인 바람이다. 유추에 의하여 이 단어는 인간의 숨(호흡)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리고 인간의 호흡은 동물력, 생명력의 증거이자, 사고 및 열정의 매개체인 까닭에 이 단어는 인간의 생기 및 독특한 영기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구약의 저자들은 인간의 신적 형상으로 창조되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담긴 숨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숨쉴 때 즉 죽을 때는 자신의 영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되돌려 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루하’ 자체 혹은 ‘루하’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시며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생명력을 얻는 생명의 호흡의 원천이시며 또한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 자신과 같이 만들어 주는 독특한 품격의 수여자이시다.
구약은 메시야가 올 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땅에 생명을 주는 비와 같이 그리고 생명의 숨이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주듯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영의 부음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니의 음성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들어 줄 것으로 언급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시대에 대한 이러한 이상적인 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재가 아니라 소망이 실현되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불가능한 일을 행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인격을 통해 강림하셔야 했다.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프뉴마’로 지칭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루하’에서 유추하여 희랍어 동사 ‘프네오(πνω)’ 즉 ‘숨쉰다’ 혹은 ‘불다’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신약에는 낯익은 ‘성령’(Holy Spirit 또는 the Spirit)이란 말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아버지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로 등장하고 있다.
복음의 시대는 성령의 특별한 움직임과 함께 시작되었다.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던 자로 묘사되고 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어린 예수의 인격 속에서 메시야의 임재를 알아내었다. 예수는 30세쯤 되어 세례를 받았다. 탄생시 성령에 의해 그의 인간성이 성화되었듯이 그는 세례시에 비둘기의 형태로 그에게 강림한 것같은 성령에 의해 거룩한 메시야직을 위임받았으며 그 비둘기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행한 그의 첫 설교에서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성령과 권세로 기름부음 받으신 자라고 말한 것은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같다. 예수의 생애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예수 부활 뒤에 메시야적인 기름 부음이 제자들 전체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사건은 부활 후 얼마 안되어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쉴 때에 일어났고 다른 한 사건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이다. 이 두 사건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로서 첫 번째 사건이 두 번째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고 즉 마치 그리스도가 ‘너희는 얼마후에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었을 것처럼 보는 견해가 있어 온다.
‘그들에게 숨을 내 쉬었다’는 말은 창조주가 내쉬었던 숨을 회고 하는 것이었으며(창2:7), 배아적인 형태로 소수의 제자들에게 존재하였던 새로운 생명력이 구속된 백성에게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주입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구속사에서 오순절은 성육신 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불로 성령(루하/숨)이라는 단어의 기본적 의미를 볼 때에도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동시에 불의 혀같은 것들이 나타나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는데 이로서 ‘예수께서 성령의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마3:11)고 한 세례요한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불의 혀같은 것들이 각 사람에게 임한 것은 누구나 이 새로운 성령의 시대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대로 오순절에 시작하여 보편적 교회의 설립을 낳은 역사적 운동전체는 성령의 세례로부터 일어났으며 성령의 기도와 통제아래 놓여 있었다. 성령의 임재는 기독교 사회의 특징적 표시가 되었다.
교회시대는 성령의 시대라 할 수 있으며 그 시대 이전의 시기는 성령이 ‘아직 허락되지 않은’시기로 볼 수 있다(요7:39). 오순절 이전의 성령의 나타나심과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나타나심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므로 우리는 그 차이가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나타나심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므로 우리는 그 차이가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서는 성령이 신적인 분임을 계시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은 아버지 및 아들과 하나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그들과 다른 분이시다. 성령의 역사는 만물 특히 생명의 호흡을 지닌 피조물들의 창조와 보전에 밀접하고 관여한다. 성령은 또한 인간의 구원과 밀접히 관여하여 도덕적 정결을 부여 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도래하는 구세주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 때가 차서 구세주에게 기름부으시고 스스로를 구세주에게 충만히 부여하신 분도 성령이시다. 마지막 날에 성령은 새로운 이스라엘 택한 백성, 보편적 교회를 일으키기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전세계에 확대시키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새 천년 처음 맞는 광복절에 감격적인 남북 ‘상봉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6. 15 공동선언으로 가시화한 첫 사업인 이산가족 상호 방문은 남과 북이 왜 화해하고 교류, 협력해야 하는 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산 가족 상봉은 50여 년 쌓인 이산의 고통과 회포를 풀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으나 여러 가지 깊은 의미와 과제를 안겨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BBS, NHK, CNN 등 외국의 주요방송과 데일리 텔레그래프, 마이니치 등 국내외 주요 신문들은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소식을 매시간 주요뉴스와 사설, 박스기사, 스트레이트 등을 통해 자세히 전하고 감격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만난 이들도, 이들을 지켜본 이들도 다함께 숨통이 트이는 날이었다.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와 평양고려호텔에서 이뤄진 남북한 200여명의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한 동포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진한 감동의 바람을 일으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핏줄의 소중함, 그 어떤 체제나 이념도 이를 떼어서는 안된다는 인륜적 당위를 이번 만남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며 오순절 날에 성령의 은사를 맛보게 했다. 이것은 1,200만 신도의 그동안 기도와 7천만 한맺힌 민족의 소원이 어우러지는 장면이었다.
이산 가족의 ‘상봉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교회 간의 분열과 대립, 갈등의 긴장 상황과 교회가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상을 고려하여 교회와 교회, 교회와 사회 간의 막힌 담을 헐고, 화해, 협력, 교류의 시대에 들어선 역사의 현장임을 주시해야 한다.
구원은 개개인에게 성령을 통하여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신앙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율법과 대립관계에 있는 복음으로서 전달된다. 개개인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구원받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더불어 구원받는다. 이러한 구원의 확실성은 예정에 기초해 있고, 또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라면 교리적,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극복하고 교권과 이권의 문제로 분열의 역사를 거듭해 온 과거를 회개하고 진정한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이 땅에서 예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로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에게서 낳고 성령은 교회의 숨결이며 활동의 원천이다. 성령의 은총 안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질을 나누어주고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하여 단호히 대결하며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헌신한다. 이런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적 과제를 분명히 할 때 지금은 비록 교단과 교파가 다를지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될 수 있고 교회의 일치의 길은 열릴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성령의 역사(役事) 안에서 또 그 역사를 통해 역사 안에 계속 참여 하셨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내용이지만 이 복음을 ‘사회에 변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실재’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없었다면 세상에는 아무런 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를 세상에 보내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분도 성령이시며 교회가 모든 환경 하에서 복음을 충성되게 증거 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오순(50)절 성령강림사건과 6. 25한국전쟁 발발 50년 되는 해에 남북화해정착의 전기가 마련되게 된 것은 온갖 죄와 죽음의 세력에 예속되어 속박 당하고 있으면서 분열과 적대와 갈등의 현실에 매여 있는 인간의 해방, 화해, 평화, 통일(일치)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 사건은 둘이 하나되는 사건임을 고백하게 된다.
새 천년 첫 성령강림절의 남북정상회담의 민족사적 의의, 이것은 한국교회가 비로소 하나된 기도의 숨결로 일치와 화해를 염원하는 마음을 모아 화해의 제단을 쌓을 것이며 민족의 통일과 평화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2001년 성령강림절에 희년 실천의지로 화해 공동체를 이루고 성령의 역사(役事)로 화해의 복음이 넘쳐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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