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과 영성
본문
한국 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무조건 성령 충만, 은사 충만 운동만을 일방적 열광적으로 펼쳐 왔다. 지금에 와서 영성 운동이 새로이 다져 가고 있어 성령 충만, 은사 충만과 영성 운동을 혼동하여 성령 운동이 마치 영성 운동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 속에는 물론 성령이 내면적으로 역사 하지만 영성 운동이 직접 성령 운동은 아니다. 영성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그리고 덕의 길을 연구하는 실천적 공부이다. 성령 충만은 인간의 노력이 필요 없고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성령 충만이지만 영성 생활은 인간은 노력이 필요하다.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적이요, 기독론중심이요, 따라서 구원론적이다.
이 사실을 환기시켜야 할 이유는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령 충만 운동같이 여호와 하나님도 상관 않고, 그리스도도 빼놓고, 기독교의 핵심이요 중심인 십자가도 집어치우고, 다만 무조건 성령 충만 은사 충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그것은 절뚝발이 성령 운동이 되고 만다. 때문에 건전한 기독교 운동이라 볼 수 없다. 철두철미하게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사실의 절정은 그 십자가이다. 유럽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할 때 유럽 교회는 죽었다. 서구와 미국 교회들이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성육신하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피를 강조하지 않는 일은 기독교의 몰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 예배 대상의 중심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보혜사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도 빼버린 탈선하고 맹목적인 성령 충만은 자칫 사교(邪敎)로 나가기 쉽다.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2)고 부르짖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사람들은 21세기를 기술(Technology), 과학(Science), 정보(Information)의 시대로 정의한다.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 은혜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서에 사도 바울은 시대상황이 감옥에서 에워싸고 넘어뜨리려 하지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있고 마음의 찬양이 있기를 바란다. 인구는 늘고 과학과 문명은 발달하는데 교회에서 신자수가 정체 내지는 줄어들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하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시 불 일듯 일어나기를 바란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사회구조의 아픈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이 크게 달라진다고 해서 교회의 메시지도 변형되면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사도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번 무릎꿇고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영성 회복이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할 본연의 자세이다. 그 동안 한국 개신교회의 부흥이란 교회의 외적 발전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적으로나 성직자 개인이나 일반 교인들 생활이 지나치게 피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교회도 외적인 부흥 발전에만 주력하여 세속화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교회나 교인 개개인들의 내적이고 질적 상태는 공허해지고, 거침없이 세속화되고 말았다. 목회와 교회 예배는 순전히 인위적 방법과 기술로만 꾸며 나갔다. 사람의 몸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사람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와서 계시는 임재의 지성소이다.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고전3:16)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계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느 교파에, 어느 교회 건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18-23).
인간의 본질은 영이다. 육은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영성이 죽으면 그 인간은 죽은 것이다. 육이 살았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영과. 육의 복합물이다. 더구나 영성은 예민한 것이어서 영과 대조되는 육(정욕)이 승리하면 영성은 곧 죽게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평안이니라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6-9), 고전 2;11-12에 3가지 영을 언급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여호와 하나님의 영(성령)", "세상의 영"이 그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본원은 하나이지만 그 영성이 역사하고 나타날 때는 시대와 인물과 교차 장소에 따라 다양성을 띠고 나타난다. 성서적으로도 구약예언자들의 영성이 있고, 예수의 영성이 있고, 바울의 영성이 있다.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영성 생활은 인간 존재의 주체인 내면적 자기 영이 있는데 이것은 본래 인간의 심원한 곳에 정적 상태로 있다. 거기에 역동성을 가진 생명의 본체인 성령이 들어가 영과 영이 부딪쳐 역사 할 때 기독교적영성이 산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7). 이 영성을 죽이는 것은 육성(욕정)과 아울러 세속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 " (요일 2;15-16).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했다(창2;7). 인간의 숨(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불어넣은 여호와 하나님의 입김의 연속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시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했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으면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영성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신적 영적인 핵이 있는데 동양 철학에서는 이를 기(氣)라고 부른다. 기(氣)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인데 마치 육체의 피가 순환하듯이 사람의 몸으로 순환한다. 기는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이런 것들과 똑같은 것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기독교에서는 인간 생명의 핵심을 영성(spirituality)이라 한다. "영"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인데 그 뜻은 "숨결, 바람, 영"을 의미한다. 숨결이나 바람이나 영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 동안 교회는 자주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을 하나의 영성 목회를 회복하는 징조로 받아들여도 좋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초대 교회도 하나의 전환점에서 새롭게 형성된 영성 공동체이었다. 초대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대 교회와의 갈등관계 속에 있었던 유대주의를 생각해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갈등 구조의 근본을 직시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만족스럽지 않는 당시 유대주의적 공동체를 새롭게 개혁하고 영적인 혁신을 이루어 초기 기독교 공동체적인 초석을 놓았다. 유대주의와 초대 교회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삼자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오늘 기성 목회구조와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영성 목회 그리고 그 사이의 갈등 구조를 의식하고 있는 목회자 등 삼자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유대주의의 이 부정적인 부분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형성된 초대 교회의 영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갈파한 유대주의의 특징은 첫째 형식적이고 위선적이었다, 둘째 권위주의적이다, 셋째 권력과 명예에 집착했다, 넷째 분당심과 자만심이 강했다, 다섯째 소유 지향적이다, 당시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이제까지의 우리 사회의 모습과 흡사하며 교회 역시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 부분을 답습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도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동시에 교회도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이전의 목회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던 것처럼 오늘 진행되어 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변화 또한 교회와 목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시대의 변화의 요구 상당 부분이 초대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인위적인 조치보다는 초대 교회가 담지하고 있는 영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와 성서가 요구하는 영성 목회가 된다. 예수님이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재형성한 초대 교회 영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파괴라고 할 만큼 내적 자유함이 있었다. 둘째 권위주의 대신에 사랑과 섬김의 도를 실천했다. 셋째 집착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연함과 중용이 있었다. 넷째 분당심과 편당심에서 포용주의적인 자세가 있었다. 다섯째 자만심에 겸손함과 자기비하가 있었다. 여섯째 성취지향적이거나 소유지향적이기 보다는 존재지향적이었다. 오늘 우리의 청중들은 변화되어 가는 사회 구조를 직시하면서 엄청난 의식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당장 스스로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할지라도 비판 능력은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가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의 목회는 큰 장애물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세계가 되기까지 역사는 19세기에 진보 발전 성장이 세계 곳곳에 편만 하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20세기는 처절한 참화와 재난의 시대였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나치, 파쇼주의, 동구의 공산화, 냉전의 절대적 갈등, 억압과 탄압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난과 이로 인한 갈등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특히 유럽의 경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치욕적이며 대량 살상의 문화가 지배하던 20세기의 재난시대와 이념의 갈등이 내렸다. 이러한 세계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불확실성의 21세기를 맞으며 생각해 본다.
기술 문명도 인간 공학, 컴퓨터 문명 등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족의 진보와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우리가 불확실하다고 말할 때 그 밑바닥에는 목적 의식의 결여가 깔려 있다. 기술 문명의 발달을 통해보다 많은 권력과 부(富)를 누리겠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 얼마나 오랜 동안 권력과 부가 주어질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한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권력이냐를 묻지 않고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한다. 말하자면 문명의 불확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의식의 불투명성이 문제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를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하루종일 앉아서 게임을 한다. 컴퓨터가 삶의 이기가 아니라 컴퓨터에 예속된 종된 사람이 되고 만다. 컴퓨터 시대가 편리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유무 상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21세기의 영성은 무엇이며 어떤 사명을 교회가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추스릴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고 인터넷 물결이 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째로 뒤바꿔 놓고 있다. 오늘을 신지식의 시대라고 하고 포스트모던 시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 문명의 첨단화와 함께 우리 인간 사회에 부정적 측면이 그만큼 첨단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문제이다.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문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지 모른다. 불확실성의 시대 그 속에는 문명 속의 무지, 문명의 이기 속의 불안, 삶의 가치관의 혼동 등 미래 생존의 불안이 집단화하고 있다. 이기적인 집단화는 욕구 충족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시장 가치 즉 상품 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 중심의 시장 경제가 아니라 돈 중심의 시장 경제이다. 오늘날 교회 구성체도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 중에는 탈선한 것이 너무 많았다.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의 내용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라고 하신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리고 성령중심의 시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의 중심은 성령 충만, 은사 충만 만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성이 사는 일이다. 영성 운동은 다른 목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말씀이 성육신 한 사실이 우리 신자들 생활 속에서 반복해 일어나야 한다. 예수와 초대 교회 증인들의 삶은 개인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삶으로 섬김과 나눔 그리고 회개의 영성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와 초대 교회의 영 체험 및 그 결과로 나타난 실천 속에는 모두 상호 관계에의 고려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는 영성회복이 되기 위해서는 영성 따로 삶 따로의 인식의 전환을 수용하여 실천할 때, 한국 교회는 오순절의 성령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전인적인 삶을 지향한다. 그러한 목표는 자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람과의 나눔 가운데 또한 광대한 창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육체와 정신과 영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여 영성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성령과 영성"의 사이에서 삼위일체 신앙고백으로 믿음의 삶을 구현해 가자.
이 사실을 환기시켜야 할 이유는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령 충만 운동같이 여호와 하나님도 상관 않고, 그리스도도 빼놓고, 기독교의 핵심이요 중심인 십자가도 집어치우고, 다만 무조건 성령 충만 은사 충만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다. 그것은 절뚝발이 성령 운동이 되고 만다. 때문에 건전한 기독교 운동이라 볼 수 없다. 철두철미하게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사실의 절정은 그 십자가이다. 유럽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할 때 유럽 교회는 죽었다. 서구와 미국 교회들이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성육신하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피를 강조하지 않는 일은 기독교의 몰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 예배 대상의 중심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보혜사이시다.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도 빼버린 탈선하고 맹목적인 성령 충만은 자칫 사교(邪敎)로 나가기 쉽다. 바울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2)고 부르짖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사람들은 21세기를 기술(Technology), 과학(Science), 정보(Information)의 시대로 정의한다.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 은혜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서에 사도 바울은 시대상황이 감옥에서 에워싸고 넘어뜨리려 하지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있고 마음의 찬양이 있기를 바란다. 인구는 늘고 과학과 문명은 발달하는데 교회에서 신자수가 정체 내지는 줄어들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하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시 불 일듯 일어나기를 바란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사회구조의 아픈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이 크게 달라진다고 해서 교회의 메시지도 변형되면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사도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번 무릎꿇고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영성 회복이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할 본연의 자세이다. 그 동안 한국 개신교회의 부흥이란 교회의 외적 발전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적으로나 성직자 개인이나 일반 교인들 생활이 지나치게 피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교회도 외적인 부흥 발전에만 주력하여 세속화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교회나 교인 개개인들의 내적이고 질적 상태는 공허해지고, 거침없이 세속화되고 말았다. 목회와 교회 예배는 순전히 인위적 방법과 기술로만 꾸며 나갔다. 사람의 몸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사람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와서 계시는 임재의 지성소이다.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고전3:16)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계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느 교파에, 어느 교회 건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18-23).
인간의 본질은 영이다. 육은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영성이 죽으면 그 인간은 죽은 것이다. 육이 살았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영과. 육의 복합물이다. 더구나 영성은 예민한 것이어서 영과 대조되는 육(정욕)이 승리하면 영성은 곧 죽게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평안이니라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6-9), 고전 2;11-12에 3가지 영을 언급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여호와 하나님의 영(성령)", "세상의 영"이 그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본원은 하나이지만 그 영성이 역사하고 나타날 때는 시대와 인물과 교차 장소에 따라 다양성을 띠고 나타난다. 성서적으로도 구약예언자들의 영성이 있고, 예수의 영성이 있고, 바울의 영성이 있다.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영성 생활은 인간 존재의 주체인 내면적 자기 영이 있는데 이것은 본래 인간의 심원한 곳에 정적 상태로 있다. 거기에 역동성을 가진 생명의 본체인 성령이 들어가 영과 영이 부딪쳐 역사 할 때 기독교적영성이 산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7). 이 영성을 죽이는 것은 육성(욕정)과 아울러 세속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 " (요일 2;15-16).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했다(창2;7). 인간의 숨(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불어넣은 여호와 하나님의 입김의 연속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시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했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으면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영성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신적 영적인 핵이 있는데 동양 철학에서는 이를 기(氣)라고 부른다. 기(氣)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인데 마치 육체의 피가 순환하듯이 사람의 몸으로 순환한다. 기는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이런 것들과 똑같은 것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기독교에서는 인간 생명의 핵심을 영성(spirituality)이라 한다. "영"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인데 그 뜻은 "숨결, 바람, 영"을 의미한다. 숨결이나 바람이나 영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 동안 교회는 자주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을 하나의 영성 목회를 회복하는 징조로 받아들여도 좋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초대 교회도 하나의 전환점에서 새롭게 형성된 영성 공동체이었다. 초대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대 교회와의 갈등관계 속에 있었던 유대주의를 생각해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갈등 구조의 근본을 직시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만족스럽지 않는 당시 유대주의적 공동체를 새롭게 개혁하고 영적인 혁신을 이루어 초기 기독교 공동체적인 초석을 놓았다. 유대주의와 초대 교회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삼자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오늘 기성 목회구조와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영성 목회 그리고 그 사이의 갈등 구조를 의식하고 있는 목회자 등 삼자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유대주의의 이 부정적인 부분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형성된 초대 교회의 영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갈파한 유대주의의 특징은 첫째 형식적이고 위선적이었다, 둘째 권위주의적이다, 셋째 권력과 명예에 집착했다, 넷째 분당심과 자만심이 강했다, 다섯째 소유 지향적이다, 당시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이제까지의 우리 사회의 모습과 흡사하며 교회 역시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 부분을 답습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도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동시에 교회도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이전의 목회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던 것처럼 오늘 진행되어 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변화 또한 교회와 목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시대의 변화의 요구 상당 부분이 초대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회 구조에 적응하는 인위적인 조치보다는 초대 교회가 담지하고 있는 영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와 성서가 요구하는 영성 목회가 된다. 예수님이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재형성한 초대 교회 영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파괴라고 할 만큼 내적 자유함이 있었다. 둘째 권위주의 대신에 사랑과 섬김의 도를 실천했다. 셋째 집착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연함과 중용이 있었다. 넷째 분당심과 편당심에서 포용주의적인 자세가 있었다. 다섯째 자만심에 겸손함과 자기비하가 있었다. 여섯째 성취지향적이거나 소유지향적이기 보다는 존재지향적이었다. 오늘 우리의 청중들은 변화되어 가는 사회 구조를 직시하면서 엄청난 의식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당장 스스로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할지라도 비판 능력은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가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의 목회는 큰 장애물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세계가 되기까지 역사는 19세기에 진보 발전 성장이 세계 곳곳에 편만 하던 시기였다. 이에 비해 20세기는 처절한 참화와 재난의 시대였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나치, 파쇼주의, 동구의 공산화, 냉전의 절대적 갈등, 억압과 탄압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난과 이로 인한 갈등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특히 유럽의 경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치욕적이며 대량 살상의 문화가 지배하던 20세기의 재난시대와 이념의 갈등이 내렸다. 이러한 세계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불확실성의 21세기를 맞으며 생각해 본다.
기술 문명도 인간 공학, 컴퓨터 문명 등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족의 진보와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우리가 불확실하다고 말할 때 그 밑바닥에는 목적 의식의 결여가 깔려 있다. 기술 문명의 발달을 통해보다 많은 권력과 부(富)를 누리겠다면 누구에게 얼마만큼 얼마나 오랜 동안 권력과 부가 주어질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한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권력이냐를 묻지 않고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한다. 말하자면 문명의 불확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의식의 불투명성이 문제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를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하루종일 앉아서 게임을 한다. 컴퓨터가 삶의 이기가 아니라 컴퓨터에 예속된 종된 사람이 되고 만다. 컴퓨터 시대가 편리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유무 상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21세기의 영성은 무엇이며 어떤 사명을 교회가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추스릴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과학과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고 인터넷 물결이 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째로 뒤바꿔 놓고 있다. 오늘을 신지식의 시대라고 하고 포스트모던 시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 문명의 첨단화와 함께 우리 인간 사회에 부정적 측면이 그만큼 첨단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문제이다.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문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지 모른다. 불확실성의 시대 그 속에는 문명 속의 무지, 문명의 이기 속의 불안, 삶의 가치관의 혼동 등 미래 생존의 불안이 집단화하고 있다. 이기적인 집단화는 욕구 충족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시장 가치 즉 상품 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 중심의 시장 경제가 아니라 돈 중심의 시장 경제이다. 오늘날 교회 구성체도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 중에는 탈선한 것이 너무 많았다.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의 내용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라고 하신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리고 성령중심의 시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또한 기독교의 중심은 성령 충만, 은사 충만 만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성이 사는 일이다. 영성 운동은 다른 목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말씀이 성육신 한 사실이 우리 신자들 생활 속에서 반복해 일어나야 한다. 예수와 초대 교회 증인들의 삶은 개인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삶으로 섬김과 나눔 그리고 회개의 영성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와 초대 교회의 영 체험 및 그 결과로 나타난 실천 속에는 모두 상호 관계에의 고려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는 영성회복이 되기 위해서는 영성 따로 삶 따로의 인식의 전환을 수용하여 실천할 때, 한국 교회는 오순절의 성령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전인적인 삶을 지향한다. 그러한 목표는 자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람과의 나눔 가운데 또한 광대한 창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육체와 정신과 영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여 영성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성령과 영성"의 사이에서 삼위일체 신앙고백으로 믿음의 삶을 구현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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