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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님의 운행하심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에 시간과 공간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빅뱅'이라는 이론으로 측정도 해보고 전파 망원경으로 계산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계산 할 수 있는 밖의 것이라 생각 됩니다. 특히 그 넓은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을 채워놓으셨는 데 과연 그 별의 수효는 얼마나 될까 맑은 날 밤에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의 모든 부분에서 빛나는 수 많은 별들에 의해 즉시 큰 인상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은하수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별들이 하수 처럼 흘러가는 모습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시인이 되어 신비스러움을 경탄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1절의 말씀입니다.
망원경 없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효는 실제로 4000개 정도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주는 통계적으로 약 1025개로 어림잡아 약 천억개의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이것은 헤아리기가 불가능한 숫자 로서 만일 어떤 사람이 1초에 20개를 셀수 있다 할지라도 이 숫자를 세려면 적어도 100,000조년이나 걸릴 것 입니다. 현재로서는 하늘의 별들이 지구상의 모든 모래 만큼이나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별의 수효를 셀수 없을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만드셨기에 그 일을 하실수 있습니다. 시편 147편4절에 보면 "저가 별의 수효를 다 계수 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했습니다.
별의 숫자만 세실 뿐 아니라 모두 이름을 붙여 주었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많은 별중에 지구를 선택하시고 생명을 불어 넣기로 하셨습니다. 처음 지구의 모습은 혼돈, 공허, 흑암이었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시면서 생명을 불어 넣으셨고 오늘날 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가 탄생된 것입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지구를 선택하셨습니다.
2절에서는 무한한 우주공간에 우리를 하나의 별로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구입니다. '땅' 이란 원문에 보면 '그런데 바로 그땅'으로서 수 많은 별들 중에서 바로 '그땅'이란 뜻으로 지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요 관심이 지구로 좁혀지고 주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구가 달이나 토성과 목성처럼 생명이 없고 그저 하나의 물질로 있었을 때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별들처럼 지구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구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시고 대기권과 물을 주셨으며, 대기 중 공기에 생명체가 살 수 있을 만큼 적당량의 산소를 부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과 식물이나 동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억 개의 별들 중 하나의 별에 관심을 가지시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한 일입니다. 여태껏 우리 인류가 다른 위성에도 생명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별의 숫자가 무한으로 많은 것은 확인 되었지만 생명은 오직 지구에만 있는 것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많은 별들중 지구를 선택하듯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 쓸쓸했던 어느날 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부르사 하늘의 별들을 세어보라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너무 감격하였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내용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되는 순간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보았던 그날밤 별들은 훗날 저와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이삭으로 시작한 믿음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창22:17), 번성했으므로 약속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라고 예언한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렘33:22).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번성과 선택한 자녀를 잊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를 향해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도 안다 하셨습니다. 모세란! '건짐'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복중에 짓기전에 아셨고, 모태에서 생명을 조성하셨고, 죽음의 문턱 나일강 하수에서 건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기가막힐 사망의 웅덩이에서 건지셨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모두 세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듯 지금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고 우리의 머리터럭 한올도 세시며 앉고 서는 것도 아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는 분, 그품에서 평안히 눕기도 하며 자기도 하는 것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했습니다. 유난히 심령이 가난했던 삭개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시고 "삭개오야! 부르시고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셨습니다.
2. 최초의 땅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첫째, 땅이 혼돈하였습니다. 히브리어 혼돈은 토후( )로서 정돈되지 않은 황량한 상태, 또는 무질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형태가 없다(formless)라고 표현 합니다. 오늘날 지구에는 바다가 있고 강이 있고 산이 있고 계곡이 있고 바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셨을때는 그렇게 안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지구라는 덩어리가 하나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 표현을 창세기는 혼돈이라고 말합니다. 땅이 '혼돈하다'는 것은 땅에 어떤 형태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땅에는 흙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명확한 구분이 없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슷한 예를 들면, 홍수가 났을 때 물에 잠겼던 부분이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무슨 형태가 없습니다. 그 전에는 집이나 마당이나 길이 다 구분이 되었는데 홍수가 한번 범람하고 나면 어디가 집이고, 어디가 길이며, 어디가 논이고, 어디가 밭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지구의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마치 '부화되지 않은 계란' 혹은 '수렁'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생각하면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던 이 세상에 범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혼돈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 그 법칙에 의해 통제되었으나 그 법칙이 깨져 형태를 상실함으로 마침내 황량하고 무질서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 법칙을 따라 살며 온갖 복을 누리다 그만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짓고 끝없는 혼돈의 늪속에 침몰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이 혼돈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기본적인 질문조차 답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며, 장차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은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땅이 공허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보후( )는 텅비어있는 상태로서 '공허하다, 허무하다'라는 뜻이며, 영어로는 무의미(empty)하다는 표현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 단어를 실감했었습니다. 부활절 연합예배 말씀을 준비하다 죽음의 허무함을 좀 더 실감있게 명상하기 위해 김해 낙원공원 묘지를 다녀왔습니다. 비가 주룩 주룩 쏟아지는 오후 5시경 어둠이 깔리는 공동묘지 사이에 서있으니 주변의 적막감속에 참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여기에서'나는 아니다'라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할려고 하니 명상이고 뭐고 등골이 오싹하고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면서 무서워서 빨리 탈출해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묘지를 둘러보고 고개를 넘어 큰길로 나오니 사람이 보이고 자동차가 달리고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참 아름다왔습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움직이는 것의 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지구의 상태가 이와같이 생명이란 찾을 수 없는 적막함 이었습니다. 그리고 '공허' 즉 '보후'는 '허무'란 말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가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있어서 겉사람 육신은 있으나 속사람 영혼은 텅비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 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삶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며 허무를 절규하는 것은 그 인간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부재 현상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인기있는 사람들이 자살 할때 남기는 공통 현상은 이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하다'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러한 고백이 위선이 섞이지 않은 바른 대답입니다. 인기와 명에와 온갖 권세를 채운다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분을 모셔들일때 우리는 혼돈과 무의미에서 질서와 이미있는 삶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허무함과 무의미에 몸을 떨었지만 이제는 인생이 의미가 있고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흑암'은 단순히 밝음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근본적인 암흑 상태를 의미합니다. '깊음'은 밑을 도무지 측량 할 수 없는 바다속 깊은 심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구가 아주 깊은 어둠에 빠져있고, 미지의 세계이며,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미스터리에 싸인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굴 탐사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굴 속에는 호수가 나오는데 호수 밑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 아 보기위해 돌에다 줄을 매어 내려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닥에 닿지 않고 한 없이 내려갈 때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든다고 합니다. 혹시 저 아래 다른 세상으로 연결 되는 것이 아닌가 또 지옥과 연결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때 그만 절망감이 든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어둠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 비참함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을 보니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 즉 거기 빛이 없으며"(렘4:23). 영적 의미상 흑암은 악한것, 허무한것, 죽음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구원은 이러한 흑암 상태에서 빛으로 이끌려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혼돈, 공허, 흑암,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해결해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빛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요8:12). 진실로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브른 케이트 스미스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차서 살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친구 둘과 함께 보트놀이를 하다가 그만 썰물에 밀려서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리고 이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바다는 어두워 오고 파도는 높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한참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불빛이 점점 다가 오더니 큰 배가 와서 우리를 구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 확신이 저를 이렇게 자신있게 살게 합니다' 사랑하신 여러분! 어둠 가운데 절망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
길 바랍니다.
3. 성령님의 운행하심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지구를 품었습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지구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찾아오셨습니다. 곧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지구를 감쌌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히브리어로 '루하흐'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바람, 숨결, 호흡'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움직였다, 흔들렸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물체위를 운행할때 영향력이나 기운을 물체 위에 내리 쏟아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단어가 신명기 32장11절에도 나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이 말씀중 '너풀거리며'란 말이 '운행하다'라는 단어하고 같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자기 둥우리에 있는 새끼를 사랑하고 돌보고 격려하는 것을 표현을 한 것입니다. 새끼가 제대로 잘 자라서 장엄하게 하늘을 날도록하기 까지의 사랑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이뜻을 좀더 원어적으로 풀이해 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탉은 계란을 그저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품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넣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어미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입니까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부모를 본 일도 없이 외롭게 자랐기에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에게 부모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없는것이 아니라 잃어버린것 입니다. 그를 낳아 준 부모는 반드시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가진 부모로 부터 생명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된 것 입니다.
 둘째,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성령께서 창조에 관여하셨다는 사실은 말해줍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 최초의 인간을 만드실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인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범죄하여 타락한후 다시 재 창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후 제자들에게 처음 대하실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하셨고 약속대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믿는자 속에 강림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성령님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의 창조의 능력을 힘입어 현실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님과 말씀의 조화로서 3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기 '가라사대'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긴 것 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운행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말에 불과합니다. 캄캄한 밤에는 글을 읽을 수가 없듯이 성령의 조명 없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이 함께 계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없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 상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접근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무릎 끓고 성령님을 받아들이고 성령님의 운행하심이 내 영혼을 감싸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씀을 듣거나 읽고,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찰하는"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어두운 마음이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함 받을 것입니다. 근심 걱정에서 기쁨과 평강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질병이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운행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므로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에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2절에서는 성령님을, 3절에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성삼위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이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가지가지 구원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 현장에서 나타나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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