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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교통하시는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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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제86회 교단 총회는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로 총회장의 "성령의 교통"이라는 제목의 설교와 함께 개회되어 대체로 은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는 앞으로 일년 동안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신앙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오늘 같이 문제가 많고 복잡 다단한 구조 가운데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의 곳곳마다 진정한 성령의 교통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피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성령께서는 창조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다음 말로 창조를 설명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 "여호와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바로 성령을 가리키고 있고,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여호와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쓰는지 모릅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의 현장에 계셨음을 골로새서 1:17을 보면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직접 말하지 않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 같이 계셨던 분입니다. 이렇게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여호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도 천지 창조 사역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성령이 지구에 교통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생명은 탄생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창 1:2상), 성령은 거기에 관계를 하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거기에 성령의 교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땅은 지구를 의미하는데, 최초의 지구 상태가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우리가 바라보는 은하계는 약 1천억 개 이상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상상 밖의 무한한 숫자입니다. 사실 하늘 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식물과 나무들의 숫자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고,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을 것입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합니다. 여름 휴가 때에 공기가 맑은 시골에 가서 즐기는 것이 있습니다.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신비로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내 머위에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 어찌 잴 수 있겠습니까 과학의 잣대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보다 어찌 더 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뿐입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창조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쏘거나 사람이 탄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찍어 온 달 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원자와 분자가 화학적으로 합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쌓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이 좀더 발달되어 탐사선을 화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 옵니다. 그러나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창조 전 지구는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formless, ‘형태가 없다’는 뜻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지구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과 같은 지구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찾아오셨습니다. 즉 성령님이 교통하셔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히브리말로 ‘루하흐’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바람’입니다. ‘루하흐’에는 바람이라는 말 외에도 ‘숨, 호흡’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 여호와 하나님의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하는데 ‘운행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움직였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영향력이나 기운을 물체 위에 내리쏟았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풀이해 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탉은 계란을 그저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굴리고 있습니다. 어미 닭의 체온이 계란에 전달됩니다. 이제 어미 닭과 계란은 각각이 아닙니다. 따뜻한 어미 닭의 따뜻한 체온으로 계란과 하나가 됩니다. 암탉이 알을 품었다는 말은 암탉이 계란과 통했다, 교통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품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생명 있는 것만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부모를 본 일도 없이 외롭게 자랐기에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에게 부모가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를 낳아 준 부모가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태어납니다.
이 우주에 일 천 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오직 지구뿐입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때 인기 있는 영화들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성경의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에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 중에 성령 여호와 하나님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 주위를 운행하십니다. 이 말은 성령님이 지구와 통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지구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와 교통이 잘 되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볼 때, 어미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수면에 교통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빛이 있으라”고 하실 때 지구 상에 생명체가 막 태어났습니다.
2. 성령의 교통은 죽은 것이 살게 합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접근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도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생각, 죽은 사상이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 있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이 들어오셔서 교통하셔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생동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온통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악순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 권모와 술수, 속임과 거짓거리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한 생명의 세계로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몰아내려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왜입니까 한 마디로 성령의 교통이 아니라 악령의 교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악령이 자리 잡으면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심리만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자리 잡으면 기쁨과 사랑, 생산과 축복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 각계 각층에, 세계 곳곳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교통은 살리는 일, 생명을 불어넣는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창세기 1:2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교통하시면 생명이 생기고 능력이 활발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교통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 분과 항상 교통하시면서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힘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별것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영적 삶의 수준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이제 여러분 가운데도 나타나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성령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을 때는 우리 안에 성령이 교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교통하실 때는 감동이 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운행함, 성령의 교통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말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교통 없이는 다 구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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