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본문
오늘 읽어 드린 누가복음 본문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기도는 어떤 때나 하게 되나, 무엇을 기도해야하나 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때
기도는 우리가 평소에도 늘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나 뚜렷한 어떤 목표가 있을 때에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어떤 사람이 밤중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떡을 꾸어달라는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물러가지 않고 간청을 하는 바람에 일어나서 떡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평소에는 자기의 친구에게 가서 떡을 꾸어달라고 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는 바람에 한밤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서 떡을 꾸어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밤중에 손님이 오지 않았다면 친구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가 생길 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시편 130편에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인은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깜깜한 깊은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적에게 둘려 쌓여 있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절망적인 병에 걸렸거나 혹은 실직하여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대로 그 처지를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고 너무 두려우며 너무 비참하기에 이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
그런데 이 시인이 처한 상황의 원인이 외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간절하게 기도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그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시고 주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이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
이 시인의 기도의 목표는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의 말씀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처한 당장의 문제나 아픔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며 그의 말씀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저 적당히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이유
자 그러면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크게는 민족의 통일 문제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나라를 위하여',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정의 문제가 기도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목 가운데 흔히 빠지는 것이 자신의 신앙의 성장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자신의 신앙이 더 향상되고 그 신앙에 맞추어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각할 뿐 간절하게 바라는 제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자기의 신앙 성장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 속에 자기 신앙 성장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기도해서 자기 믿음이 자라면 좋고 그대로 있어도 안타까울 것 없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은 갈급함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처지가 지금의 신앙으로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나 가정적 환경이 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군사정권이나 독재정권 밑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데모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 정권의 독재와 횡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일로 우리가 별로 기도하지 않고 데모도 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독재와 횡포가 줄거나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지금 간절하게 자기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지금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바라지 않는 까닭은 그 말씀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재정권 시대에도 그 정권의 독재나 횡포에 대해서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별다른 의식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에 데모하며 붙잡혀 가는 사람을 오히려 욕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을 달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느낍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울부짖는 것일까, 너무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
그러면 과연 지금의 상황이 울부짖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될만한 상황인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시대인가 나의 뜨뜻미지근한 신앙으로도 능히 흔들리지 않을 만큼 악마들이 모두 물러가 버린 평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가 경제만 좀 안정되면 아무 걱정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가난을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빈부차가 심하여지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고,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도덕성은 더욱 메말라가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심화되고, 도시가 많이 생겨날수록 더 많은 범죄와 가정의 파괴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많아지고 절도 많아졌지만 우리 사회가 이 때문에 옛날보다 더 깨끗해지고 정직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20세기는 두 번의 큰 전쟁과 그 외의 수많은 국지 전쟁을 치렀고, 냉전시대의 아픔을 통과하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는데, 그 냉전시대는 끝났지만, 대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학의 발전의 영향으로 교회조차도 영적인 능력보다는 물량적인 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영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들이 수도원을 없는 교회로 발전하면서 크게 성장하기는 하였지만, 수도원이 공급할 수 있는 영성을 영영 잃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모여서 가벼운 복음송이나 부르며 영상매체를 따라 가볍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도,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도, 이 사회의 가벼운 문명을 압도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영적 능력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은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시편 기자가 기도한 것처럼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떡 세 덩이를 달라고 간청한 친구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며, 독재정권의 억압과 횡포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부르짖던 때처럼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을 구하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구하여야 할까요 시편 기자는 주님을 기다리며 그 말씀을 바랐는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므로 성령이 제자들의 가장 근본적인 기도의 제목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성령"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또한 간절하게 기도하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성령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날 밤 꿈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이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도 함께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서 많은 것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가장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 충만케 하소서. "
우리 믿는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성령을 달라고 해야할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해도 성령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령은 한 번 체험하면 그가 우리와 항상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기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항상 필요한 성령의 도우심
우리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 가면서는 선생님의 지도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선생님의 지도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계속 선생님의 보다 높은 단계의 지도를 받아야 나의 학문이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교수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그 지도는 중고등학교 때와 달리 원리적인 지도입니다. 그러나 석사 과정 특히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스스로 연구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역시 교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결국 유치원에서 시작하여 박사가 되기까지 계속 선생님의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성화의 단계에까지 이르는데 계속해서 성령의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화(聖化)에 이른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마치 박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계속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하는 것처럼 계속 성령의 인도와 그가 부어주시는 온갖 은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 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 힘을 합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고, 그 후 계속하여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셔서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다를 잔잔케 하시거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 등을 행하실 수 있도록 도우셨던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마귀에게 시험받게도 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도록 그를 이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계속 기도하신 까닭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할 때 더욱 열심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성령의 지도와 그 능력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며, 계속 그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나 열심히 성령을 구하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지,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꿈이 없고 그런 열망이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런 것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박사가 되겠다는 꿈과 열망이 없이는 그 어려운 학문의 과정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은 자라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 열매도 거둘 수 없고, 결국 우리는 게으른 종과 같이 되어 심판대 앞에 부끄럽게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성령의 가르치심과 도우심, 그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은 우리의 힘으로 제거하기에는 너무 높고 너무 두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인간의 판단으로 판단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별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거기에 도전하면 그 장벽은 마침내 제거되고 우리 앞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우리는 능히 산을 옮겨 평지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위기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적당히 하지 마시고 울부짖으며 하십시오. "주여, 성령을 보내 주소서. 그러면 저희가 그 능력을 힘입어 이 땅의 모든 불의와 맞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그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강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능히 모든 장벽과 산을 옮겨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며,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부흥사경회 기간에 열심히 참여하셔서 간절하게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하게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가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시며, 그리고 이 사회와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셉처럼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과 열렬한 기도의 생활을 하시므로 성령 충만함을 입어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기도의 때
기도는 우리가 평소에도 늘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나 뚜렷한 어떤 목표가 있을 때에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어떤 사람이 밤중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떡을 꾸어달라는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물러가지 않고 간청을 하는 바람에 일어나서 떡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평소에는 자기의 친구에게 가서 떡을 꾸어달라고 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는 바람에 한밤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서 떡을 꾸어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밤중에 손님이 오지 않았다면 친구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가 생길 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시편 130편에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인은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깜깜한 깊은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적에게 둘려 쌓여 있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절망적인 병에 걸렸거나 혹은 실직하여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대로 그 처지를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고 너무 두려우며 너무 비참하기에 이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
그런데 이 시인이 처한 상황의 원인이 외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간절하게 기도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그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시고 주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이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
이 시인의 기도의 목표는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의 말씀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처한 당장의 문제나 아픔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며 그의 말씀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저 적당히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이유
자 그러면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크게는 민족의 통일 문제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나라를 위하여',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정의 문제가 기도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목 가운데 흔히 빠지는 것이 자신의 신앙의 성장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자신의 신앙이 더 향상되고 그 신앙에 맞추어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각할 뿐 간절하게 바라는 제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자기의 신앙 성장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 속에 자기 신앙 성장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기도해서 자기 믿음이 자라면 좋고 그대로 있어도 안타까울 것 없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은 갈급함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처지가 지금의 신앙으로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나 가정적 환경이 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군사정권이나 독재정권 밑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데모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 정권의 독재와 횡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일로 우리가 별로 기도하지 않고 데모도 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독재와 횡포가 줄거나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지금 간절하게 자기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지금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바라지 않는 까닭은 그 말씀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재정권 시대에도 그 정권의 독재나 횡포에 대해서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별다른 의식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에 데모하며 붙잡혀 가는 사람을 오히려 욕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을 달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느낍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울부짖는 것일까, 너무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
그러면 과연 지금의 상황이 울부짖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될만한 상황인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시대인가 나의 뜨뜻미지근한 신앙으로도 능히 흔들리지 않을 만큼 악마들이 모두 물러가 버린 평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가 경제만 좀 안정되면 아무 걱정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인가 그렇다면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가난을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빈부차가 심하여지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고,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도덕성은 더욱 메말라가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심화되고, 도시가 많이 생겨날수록 더 많은 범죄와 가정의 파괴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많아지고 절도 많아졌지만 우리 사회가 이 때문에 옛날보다 더 깨끗해지고 정직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20세기는 두 번의 큰 전쟁과 그 외의 수많은 국지 전쟁을 치렀고, 냉전시대의 아픔을 통과하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는데, 그 냉전시대는 끝났지만, 대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학의 발전의 영향으로 교회조차도 영적인 능력보다는 물량적인 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영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들이 수도원을 없는 교회로 발전하면서 크게 성장하기는 하였지만, 수도원이 공급할 수 있는 영성을 영영 잃고 말았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모여서 가벼운 복음송이나 부르며 영상매체를 따라 가볍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도,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도, 이 사회의 가벼운 문명을 압도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영적 능력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은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시편 기자가 기도한 것처럼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떡 세 덩이를 달라고 간청한 친구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며, 독재정권의 억압과 횡포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부르짖던 때처럼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을 구하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구하여야 할까요 시편 기자는 주님을 기다리며 그 말씀을 바랐는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므로 성령이 제자들의 가장 근본적인 기도의 제목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성령"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또한 간절하게 기도하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성령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날 밤 꿈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이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도 함께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서 많은 것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가장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 충만케 하소서. "
우리 믿는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성령을 달라고 해야할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해도 성령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령은 한 번 체험하면 그가 우리와 항상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기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항상 필요한 성령의 도우심
우리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 가면서는 선생님의 지도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선생님의 지도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계속 선생님의 보다 높은 단계의 지도를 받아야 나의 학문이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교수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그 지도는 중고등학교 때와 달리 원리적인 지도입니다. 그러나 석사 과정 특히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스스로 연구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역시 교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결국 유치원에서 시작하여 박사가 되기까지 계속 선생님의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성화의 단계에까지 이르는데 계속해서 성령의 지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화(聖化)에 이른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마치 박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계속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하는 것처럼 계속 성령의 인도와 그가 부어주시는 온갖 은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 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 힘을 합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고, 그 후 계속하여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셔서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다를 잔잔케 하시거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 등을 행하실 수 있도록 도우셨던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마귀에게 시험받게도 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도록 그를 이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계속 기도하신 까닭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할 때 더욱 열심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성령의 지도와 그 능력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며, 계속 그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나 열심히 성령을 구하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지,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꿈이 없고 그런 열망이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런 것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박사가 되겠다는 꿈과 열망이 없이는 그 어려운 학문의 과정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은 자라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 열매도 거둘 수 없고, 결국 우리는 게으른 종과 같이 되어 심판대 앞에 부끄럽게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성령의 가르치심과 도우심, 그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은 우리의 힘으로 제거하기에는 너무 높고 너무 두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인간의 판단으로 판단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별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거기에 도전하면 그 장벽은 마침내 제거되고 우리 앞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우리는 능히 산을 옮겨 평지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위기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적당히 하지 마시고 울부짖으며 하십시오. "주여, 성령을 보내 주소서. 그러면 저희가 그 능력을 힘입어 이 땅의 모든 불의와 맞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그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강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능히 모든 장벽과 산을 옮겨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며,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부흥사경회 기간에 열심히 참여하셔서 간절하게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하게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가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시며, 그리고 이 사회와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셉처럼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과 열렬한 기도의 생활을 하시므로 성령 충만함을 입어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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