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을 통한 은혜
본문
일반적으로 우리 사람들의 건강을 말할 때,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말합니다. 육체가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할 때, 긴장이 빠지거나 불규칙한 생각을 하거나 너무 무리하거나 과로하면 우리 육체가 정상적인 활동을 못합니다. 그것이 계속되면 우리 수명에 영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건강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이 올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됨의 정체, 사람됨의 정체, 나는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떤 인정을 받고, 어떤 사랑 속에 있는가, 나는 가치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나는 어떤 소속감을 지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나는 사랑받는 존재인가, 특별히 나는 누군가로부터 존귀히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신앙의 우울증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내 속에 자긍심, 자부심, 사랑받는다는 의식,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기 쉽듯이, 내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총과 거룩한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은혜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참 기쁨이 없어지면, 이는 곧 영적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왕이 사는 성에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이 외출할 때에는 깃발을 꽂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에 깃발이 있으면 왕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명한 교육자인 레닌은 말하기를, 기쁨은 왕궁의 깃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계시면 기쁨이 있고,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기쁨이 없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과 행동은 이 왕궁의 깃발과 같습니다. 즐겁고 활기차고 행동에 기쁨이 넘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얼굴에도 언제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그 생활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존재를 증명하는 깃발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에 명백하게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강한 힘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는 우울증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영적 우울증은 내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다고 영적 자만심에 빠질 때, 혹은 반대로 영적 나태함에 빠질 때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루소는 인간을 이같이 개탄하며 탄식 조로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보통 십대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대는 연인에 움직이고, 삼십대는 쾌락에 움직이고, 사십대는 야심에 움직이고, 오십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이 오십대가 넘어서기 시작하면 명예에 욕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속받은 은혜 속에 사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 신비한 진리 속에서 참된 기쁨을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은 별로 가치를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가치를 느낍니다.
하찮은 일에. 정말 시원치 않은 일에 목숨을 걸고 인생 다 망쳐버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루소가 개탄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남이야 뭐라고 말하든 그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초실절임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이 날에 약속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성령강림절이요 교회가 새로 탄생한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의 확장은 이루어졌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좌절하고 탄식하던 사람들이 부활의 참된 힘을 공급받았지만, 또 역시 나른한 영적 우울증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됨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회됨은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이때부터 성령은 모든 신자들을 통해서 활발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시고, 또 제자들로 하여금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또 복음을 믿게 되고, 또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실로 지금은 성령의 시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 1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위로부터 사모하는 심령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과 그밖에 100여명의 문도들에게 약속해 주신 성령이 오실 것을 주전 57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전까지 이사야 선지자는 세계 열방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환상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영적으로 각성된 자, 깨어있는 자가 들어갈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믿는 자들이 세상 가운데 안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앙을 버려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찌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안일한 신앙, 이것은 곧 우리에게 영적 우울증을 갖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잠자는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향해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영적 안일에 사로잡혀서 잠을 잡니다. 너무 피곤하고 분주하고 너무 일에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안식이 될 수 있는 것이 잠이지만, 지나치게 잠에 취해 있으면, 우리 육체는 어려움에 빠집니다. 무력증에 빠지면, 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 삶 자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지금 하지 않아도 다음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적 안일에 사로잡혀 잠을 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나중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좋은 음식을 사 와서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고, 깊은 곳에 들어있던 오래 된 음식을 먹는 악순환이 우리 삶에 되풀이되기도 합니다. 좋은 옷을 사 오면, 그것을 아꼈다가 1,2년 뒤에 입고, 2,3년 전의 옷을 열심히 입는 것 같은 것입니다. 가장 분주하고 시급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보면, 안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런 일을 다 접어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쁜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중 급한 일이 있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납입하지 않으면 부도가 나는 경우, 매우 급합니다. 오늘까지 자녀들의 진학 상담을 해야만 한다, 곗돈을 오늘까지 부어야 한다,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작 중요한 일은 시간이 급하지 않은 일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기도하고 말씀 준비하고 심방하고 영적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 전체에 대한 책임, 교회 행정,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대처, 성도들에 대한 관리 등의 문제가 다가옵니다. 급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내게 소중한 일들이 미루어지게 되는 아픔이 목회자에게 있는데, 이를 교우들은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급하지만 덜 중요한 일을 때로는 희생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사람, 일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하고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인데, 안일한 신앙의 모습 가운데는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 자신의 능력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내게 무한의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생명의 길이가 마냥 길고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 자기 생명의 시간이 초를 다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급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중요한 일들만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접을 받을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내게 주실 여호와 하나님의 상급이 무엇일까,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제 아침에 세상을 떠난,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어느 중직자가 있습니다. 중년을 조금 넘기셨고, 성실하게 일하시던 분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투병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교인들이 다 은혜받는 것은, 기쁜 낯으로,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러분, 천국에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을, 영생얻은 사람인 것을 확신하면서,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박정환 집사님의 부군 되시는 강경희 집사님, 여러 해 전부터 몸이 안 좋으셔서 본인이 "내가 남아 있는 게 뭐 있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 뭐 있나" 하다가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소식을 들으니까 계시록 15장을 쓰셨데요. 4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폐암 말기에다 뇌까지 전이가 되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계시지만, 끝까지, 성경을 다 기록해서 신앙의 유산으로 자녀들에게 넘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일을 하는데,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단축되어 들어가는 그 위기를 느끼면서도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가해서 그 일을 감당하시는 분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아직 넉넉하지 않습니까. 건강하지 않습니까. 쓸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하지 않은 일에 너무 급급해서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잘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데,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에서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본문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받은 결과를 시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그릇을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깨끗이 비워 놓고, 그것을 바로 세워서 사모하기만 하면 성령을 모시게 되는데, 그 결과는 광야가 변하여 아름다운 밭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친 광야에는 전갈과 불뱀이 있듯이, 성령을 모시지 않은 마음은 거칠은 광야처럼 불의와 죄악과 탐욕과 시기, 살인, 분쟁, 악독이 가득합니다. 거친 광야에는 곡식이 없고 초목이 없고 물이 없듯이, 광야와 같은 우리 마음 속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정이 없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관용이 없습니다. 팍팍합니다. 쉽게 화를 냅니다. 자그마한 일에 상처를 받고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우리 마음이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죄와 악과 허물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까,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었다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밭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더욱이 아름다운 밭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광야와 같은 마음이 아름다운 밭이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면, 그 결과 평화와 안전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거룩한 삶에서 오는 것이지 지루한 삶에서 오지 않습니다. 긴장이 빠지고 느슨해지고, 안일한 사람의 근육은 결코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우울증에 시달리면, 그 사람의 정신의 힘으로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광야가 바로 밭과 같이, 옥토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큰 능력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지루한 삶에서 자유함을 줍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살아가는 지루함 속에 있다가, 밀월의 시간,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부의 시간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을 때 자유가 있듯이, 호랑이가 숲 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우리 인간은 창조주 되시고 구속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결국 진리 위에 서는 일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일의 출발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노를 저어서 배가 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데, 성령이 임재만 하는 사람은 그냥 배를 저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배에 모터를 단 것과 같습니다. 쉽게 어떤 파도도 넘어갈 수 있고, 아무리 센 물살도 헤쳐갈 수 있고, 어떠한 방해도 무릅쓰면서 항해하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 배에 모터를 단 것처럼, 힘있게, 능력 있게, 이 풍랑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을 통하여 은혜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신앙의 우울증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내 속에 자긍심, 자부심, 사랑받는다는 의식,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기 쉽듯이, 내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총과 거룩한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은혜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참 기쁨이 없어지면, 이는 곧 영적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왕이 사는 성에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이 외출할 때에는 깃발을 꽂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에 깃발이 있으면 왕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명한 교육자인 레닌은 말하기를, 기쁨은 왕궁의 깃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계시면 기쁨이 있고,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기쁨이 없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과 행동은 이 왕궁의 깃발과 같습니다. 즐겁고 활기차고 행동에 기쁨이 넘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얼굴에도 언제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그 생활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존재를 증명하는 깃발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로마서 8장 9절에 명백하게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강한 힘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는 우울증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영적 우울증은 내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다고 영적 자만심에 빠질 때, 혹은 반대로 영적 나태함에 빠질 때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루소는 인간을 이같이 개탄하며 탄식 조로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보통 십대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대는 연인에 움직이고, 삼십대는 쾌락에 움직이고, 사십대는 야심에 움직이고, 오십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이 오십대가 넘어서기 시작하면 명예에 욕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속받은 은혜 속에 사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 신비한 진리 속에서 참된 기쁨을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은 별로 가치를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가치를 느낍니다.
하찮은 일에. 정말 시원치 않은 일에 목숨을 걸고 인생 다 망쳐버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루소가 개탄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남이야 뭐라고 말하든 그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초실절임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이 날에 약속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성령강림절이요 교회가 새로 탄생한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의 확장은 이루어졌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좌절하고 탄식하던 사람들이 부활의 참된 힘을 공급받았지만, 또 역시 나른한 영적 우울증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됨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회됨은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이때부터 성령은 모든 신자들을 통해서 활발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시고, 또 제자들로 하여금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또 복음을 믿게 되고, 또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게 된 것입니다. 실로 지금은 성령의 시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 1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위로부터 사모하는 심령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과 그밖에 100여명의 문도들에게 약속해 주신 성령이 오실 것을 주전 57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전까지 이사야 선지자는 세계 열방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환상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영적으로 각성된 자, 깨어있는 자가 들어갈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믿는 자들이 세상 가운데 안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앙을 버려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찌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안일한 신앙, 이것은 곧 우리에게 영적 우울증을 갖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잠자는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향해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영적 안일에 사로잡혀서 잠을 잡니다. 너무 피곤하고 분주하고 너무 일에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안식이 될 수 있는 것이 잠이지만, 지나치게 잠에 취해 있으면, 우리 육체는 어려움에 빠집니다. 무력증에 빠지면, 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 삶 자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지금 하지 않아도 다음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적 안일에 사로잡혀 잠을 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나중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좋은 음식을 사 와서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고, 깊은 곳에 들어있던 오래 된 음식을 먹는 악순환이 우리 삶에 되풀이되기도 합니다. 좋은 옷을 사 오면, 그것을 아꼈다가 1,2년 뒤에 입고, 2,3년 전의 옷을 열심히 입는 것 같은 것입니다. 가장 분주하고 시급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보면, 안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런 일을 다 접어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쁜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중 급한 일이 있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납입하지 않으면 부도가 나는 경우, 매우 급합니다. 오늘까지 자녀들의 진학 상담을 해야만 한다, 곗돈을 오늘까지 부어야 한다,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작 중요한 일은 시간이 급하지 않은 일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기도하고 말씀 준비하고 심방하고 영적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 전체에 대한 책임, 교회 행정,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대처, 성도들에 대한 관리 등의 문제가 다가옵니다. 급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당장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내게 소중한 일들이 미루어지게 되는 아픔이 목회자에게 있는데, 이를 교우들은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급하지만 덜 중요한 일을 때로는 희생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사람, 일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하고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인데, 안일한 신앙의 모습 가운데는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 자신의 능력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내게 무한의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생명의 길이가 마냥 길고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 자기 생명의 시간이 초를 다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급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중요한 일들만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접을 받을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내게 주실 여호와 하나님의 상급이 무엇일까, 그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제 아침에 세상을 떠난,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어느 중직자가 있습니다. 중년을 조금 넘기셨고, 성실하게 일하시던 분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투병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교인들이 다 은혜받는 것은, 기쁜 낯으로,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러분, 천국에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을, 영생얻은 사람인 것을 확신하면서,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박정환 집사님의 부군 되시는 강경희 집사님, 여러 해 전부터 몸이 안 좋으셔서 본인이 "내가 남아 있는 게 뭐 있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 뭐 있나" 하다가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소식을 들으니까 계시록 15장을 쓰셨데요. 4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폐암 말기에다 뇌까지 전이가 되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계시지만, 끝까지, 성경을 다 기록해서 신앙의 유산으로 자녀들에게 넘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일을 하는데,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단축되어 들어가는 그 위기를 느끼면서도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가해서 그 일을 감당하시는 분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아직 넉넉하지 않습니까. 건강하지 않습니까. 쓸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하지 않은 일에 너무 급급해서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잘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데,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에서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본문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받은 결과를 시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그릇을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깨끗이 비워 놓고, 그것을 바로 세워서 사모하기만 하면 성령을 모시게 되는데, 그 결과는 광야가 변하여 아름다운 밭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친 광야에는 전갈과 불뱀이 있듯이, 성령을 모시지 않은 마음은 거칠은 광야처럼 불의와 죄악과 탐욕과 시기, 살인, 분쟁, 악독이 가득합니다. 거친 광야에는 곡식이 없고 초목이 없고 물이 없듯이, 광야와 같은 우리 마음 속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정이 없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관용이 없습니다. 팍팍합니다. 쉽게 화를 냅니다. 자그마한 일에 상처를 받고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우리 마음이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죄와 악과 허물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니까,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었다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밭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더욱이 아름다운 밭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광야와 같은 마음이 아름다운 밭이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면, 그 결과 평화와 안전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거룩한 삶에서 오는 것이지 지루한 삶에서 오지 않습니다. 긴장이 빠지고 느슨해지고, 안일한 사람의 근육은 결코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우울증에 시달리면, 그 사람의 정신의 힘으로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광야가 바로 밭과 같이, 옥토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큰 능력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지루한 삶에서 자유함을 줍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살아가는 지루함 속에 있다가, 밀월의 시간,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신부의 시간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을 때 자유가 있듯이, 호랑이가 숲 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우리 인간은 창조주 되시고 구속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결국 진리 위에 서는 일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일의 출발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노를 저어서 배가 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데, 성령이 임재만 하는 사람은 그냥 배를 저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배에 모터를 단 것과 같습니다. 쉽게 어떤 파도도 넘어갈 수 있고, 아무리 센 물살도 헤쳐갈 수 있고, 어떠한 방해도 무릅쓰면서 항해하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 배에 모터를 단 것처럼, 힘있게, 능력 있게, 이 풍랑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을 통하여 은혜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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