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과 성화와 견인
본문
그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령의 사역을 구원의 서정이라 하며 이 사역이 성령의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과정을 명칭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소명,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수양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성화와 견인 그리고 영화에 대하여 말씀을 들이겠습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에 치중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계하여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은 전혀 구원과 관계가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하는 것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고, 회심하는 것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 얻는 것이며, 지난 주일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칭의와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수양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주시므로 의로워 지고 또 그의 자녀로 용납되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관계되는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부터 진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여기서 길을 잘못 들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의 행위와 구원은 관계가 없으니 믿으면서 무슨 짓을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종한 생활을 합니다. 믿는 신자로서 세상에서 본이 안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복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과 이것을 부추기는 목사들이 생겨나면서 더욱 도덕적으로는 불신자들보다도 못한 신자만 늘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병폐입니다.
이런 현상을 쉽게 한마디로 정리해 드린다면 다음과 같다. 학교에 가는 것은 국가의 의무교육 덕택으로 혹은 부모의 은혜로 갑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 있는 학생이 되어야 부모도 기뻐하고 자신도 유익할 터인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딴 짓만 한다면 모두 다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러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열심히 노력하여 향상하고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실력이 향상하고 거룩한 삶을 가지는 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신자가 신자다운 인격을 갖추고, 행동하는 것을 성화라고 하며, 이것은 성령의 도움도 있지만 자기 노력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신자가 되기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지만 일단 신자가 된 후 향상하고 전진하는 것은 신자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무시 해 버리는 교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 하면 마틴 루터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종교개혁의 내용으로 보면 마틴 루터는 장로교회와 천주교의 중간지대로 완전한 종교개혁가는 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을 믿으며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깨닫게 된 장로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가 아닙니다. 장로교회의 주장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 다음에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주보에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라는 구호가 있는데 이것은 장로교인이 가져야할 신앙의 지침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입니다.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며 살려는 삶이 성화의 삶입니다. 이 성화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필수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화의 모든 것
성화의 정의, 성질, 특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화란 무엇입니까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 죄의 관할을 떠나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소멸시키며 구원의 은혜는 더 고무되어 거룩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이 성화는 1)여호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2) 선한 생활을 위한 성령의 도전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임할 때 이에 호응하여 3) 의식적으로 4) 거룩한 생활을 실생활에서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화를 이루었을 때의 특징은 1) 지정의(知情意)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데 이것을 전인격적인 변화라고 하고 2) 이렇게 됨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의 조성자, 방법
성화의 조성자와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이 성화는 우리의 마음에 오시어 신비하게 작용하는 성령이 조성하고, 둘째로 우리 인간은 1)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2)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며, 3) 기도와 묵상을 하고, 4) 성령의 섭리적인 인도가 있을 때 순종하므로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성화는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지 어느 정도 도달한 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중도에 중단하면 성화는 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성화는 죽음과 부활의 시기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화의 길을 가도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화와 다른 서정과의 관계
다른 부분도 그러하지만 특히 성화는 다른 서정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화는 혼돈을 하기 쉬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중생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여야 합니다.
중생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단 한번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그후 일생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가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이미 성령을 통하여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생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옳은 기도입니다. 이런 실수는 중생과 성화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여 범하는 실수입니다.
둘째로 칭의와도 명확한 구분을 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한 신자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 의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계속하여 우리의 양심에 오시어 거룩하게 살라고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도전을 무시한다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수양과의 관계도 분명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화의 삶이 필요 없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는 성도는 더욱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화와 완전론
알미니안주의나 신비주의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첫째로 성도는 지상에서 완전해 질 수 없다고 하며, 둘째로 죄에 대하여 부단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완전 성화는 이루지 못합니다.
선행과 상급
선행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속적인 선행인데 이것은 비신자들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영적 뿌리가 없는 것으로 성화와는 무관합니다. 둘째는 율법적 선행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나 행위언약의 실패로 인하여 이런 선행에는 구원도 성화도 있지 않습니다. 셋째로 성화를 위한 성도의 선행인데 이것은 첫 번째로 중생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다음은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깊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선을 행하는 목적이 인류의 안녕 질서나 도덕적 의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선행은 구원을 얻게 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하나 성경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쌓은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무상적인 은혜에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선행은 하늘나라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받을 보상의 조건은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보상에 대하여는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 하리라"(마 10:42)고 하였습니다. Calvin도 "여호와 하나님은 신자가 선을 행하면서 보상에 희망을 두라고 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으니 성화의 삶을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향상하고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상급에 모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렇게 신자들이 성화를 위하여 계속 분투하며 노력하지만 그래도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고 좌절하고 나의 연약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계속 일으켜 주십니다. 이것을 견인이라고 합니다. 마치 고장난 차량을 견인해 가듯이 우리를 하늘나라 보좌 앞까지 끌고 가시는데 이것을 성령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견인은 피택자들에 대한 구원의 확실성 뿐 아니라 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런 견인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진짜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결코 타락하지 않으며 어떤 난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나 루터교회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이를 반대합니다. 이런 반대가 있을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았을자가 없느니라"(요 10:27).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독수리가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 하셨고"(신 32:11-12).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 21).
이상에서 말씀하고 있는 견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우리를 붙잡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서정 내내 우리의 노력과 힘은 배제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시면서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십니다. 믿으십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내가 의로워 지고, 내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넘어진 후에도 일어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는 100번이고 1000번이고 넘어 지고 또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 주시고 또 일으켜 세워 주심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서 승리자가 되고 인생의 길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인을 믿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이렇게 성령을 힘입어 승리하는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천국의 기업을 주시는데 이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성도가 누리는 영화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성령은 순간적으로 우리를 완전히 성화 시켜 주시며 이때부터 영적으로 천국에서 영화를 누리게 되며,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부활하므로 썩을 것이 다시 썩지 않을 것을 입어 전인적(全人的)으로 즉 영과 육이 아울러 영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영화의 첫 부분이요 부활의 시기는 영육 모두 영화에 참여하는 완성의 시기입니다.
맺는 말
신앙은 고백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고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 전반에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사회를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긍국적인 하늘의 영화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오늘을 승리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에 치중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계하여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은 전혀 구원과 관계가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하는 것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성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고, 회심하는 것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 얻는 것이며, 지난 주일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칭의와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수양도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주시므로 의로워 지고 또 그의 자녀로 용납되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관계되는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부터 진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여기서 길을 잘못 들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의 행위와 구원은 관계가 없으니 믿으면서 무슨 짓을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종한 생활을 합니다. 믿는 신자로서 세상에서 본이 안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복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들과 이것을 부추기는 목사들이 생겨나면서 더욱 도덕적으로는 불신자들보다도 못한 신자만 늘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병폐입니다.
이런 현상을 쉽게 한마디로 정리해 드린다면 다음과 같다. 학교에 가는 것은 국가의 의무교육 덕택으로 혹은 부모의 은혜로 갑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내 힘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 있는 학생이 되어야 부모도 기뻐하고 자신도 유익할 터인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딴 짓만 한다면 모두 다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러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열심히 노력하여 향상하고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실력이 향상하고 거룩한 삶을 가지는 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신자가 신자다운 인격을 갖추고, 행동하는 것을 성화라고 하며, 이것은 성령의 도움도 있지만 자기 노력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신자가 되기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지만 일단 신자가 된 후 향상하고 전진하는 것은 신자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무시 해 버리는 교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 하면 마틴 루터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종교개혁의 내용으로 보면 마틴 루터는 장로교회와 천주교의 중간지대로 완전한 종교개혁가는 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을 믿으며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깨닫게 된 장로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가 아닙니다. 장로교회의 주장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 다음에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주보에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라는 구호가 있는데 이것은 장로교인이 가져야할 신앙의 지침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께입니다.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며 살려는 삶이 성화의 삶입니다. 이 성화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필수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화의 모든 것
성화의 정의, 성질, 특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화란 무엇입니까 말씀과 성령을 힘입어 죄의 관할을 떠나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소멸시키며 구원의 은혜는 더 고무되어 거룩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이 성화는 1)여호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2) 선한 생활을 위한 성령의 도전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임할 때 이에 호응하여 3) 의식적으로 4) 거룩한 생활을 실생활에서 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화를 이루었을 때의 특징은 1) 지정의(知情意)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데 이것을 전인격적인 변화라고 하고 2) 이렇게 됨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의 조성자, 방법
성화의 조성자와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이 성화는 우리의 마음에 오시어 신비하게 작용하는 성령이 조성하고, 둘째로 우리 인간은 1)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2)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며, 3) 기도와 묵상을 하고, 4) 성령의 섭리적인 인도가 있을 때 순종하므로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성화는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지 어느 정도 도달한 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중도에 중단하면 성화는 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성화는 죽음과 부활의 시기에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화의 길을 가도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화와 다른 서정과의 관계
다른 부분도 그러하지만 특히 성화는 다른 서정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화는 혼돈을 하기 쉬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중생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여야 합니다.
중생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단 한번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그후 일생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 이미 믿음을 가진 성도가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이미 성령을 통하여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생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옳은 기도입니다. 이런 실수는 중생과 성화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여 범하는 실수입니다.
둘째로 칭의와도 명확한 구분을 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한 신자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 의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계속하여 우리의 양심에 오시어 거룩하게 살라고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도전을 무시한다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수양과의 관계도 분명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화의 삶이 필요 없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는 성도는 더욱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화와 완전론
알미니안주의나 신비주의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첫째로 성도는 지상에서 완전해 질 수 없다고 하며, 둘째로 죄에 대하여 부단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완전 성화는 이루지 못합니다.
선행과 상급
선행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속적인 선행인데 이것은 비신자들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영적 뿌리가 없는 것으로 성화와는 무관합니다. 둘째는 율법적 선행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나 행위언약의 실패로 인하여 이런 선행에는 구원도 성화도 있지 않습니다. 셋째로 성화를 위한 성도의 선행인데 이것은 첫 번째로 중생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다음은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깊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선을 행하는 목적이 인류의 안녕 질서나 도덕적 의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선행은 구원을 얻게 하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하나 성경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쌓은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무상적인 은혜에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선행은 하늘나라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받을 보상의 조건은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보상에 대하여는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 하리라"(마 10:42)고 하였습니다. Calvin도 "여호와 하나님은 신자가 선을 행하면서 보상에 희망을 두라고 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으니 성화의 삶을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향상하고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상급에 모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렇게 신자들이 성화를 위하여 계속 분투하며 노력하지만 그래도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고 좌절하고 나의 연약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계속 일으켜 주십니다. 이것을 견인이라고 합니다. 마치 고장난 차량을 견인해 가듯이 우리를 하늘나라 보좌 앞까지 끌고 가시는데 이것을 성령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견인은 피택자들에 대한 구원의 확실성 뿐 아니라 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런 견인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진짜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결코 타락하지 않으며 어떤 난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나 루터교회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이를 반대합니다. 이런 반대가 있을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았을자가 없느니라"(요 10:27).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독수리가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 하셨고"(신 32:11-12).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에도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 21).
이상에서 말씀하고 있는 견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우리를 붙잡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서정 내내 우리의 노력과 힘은 배제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시면서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십니다. 믿으십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내가 의로워 지고, 내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쉽게 무너질 수 있고, 넘어진 후에도 일어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는 100번이고 1000번이고 넘어 지고 또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 주시고 또 일으켜 세워 주심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서 승리자가 되고 인생의 길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인을 믿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이렇게 성령을 힘입어 승리하는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천국의 기업을 주시는데 이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성도가 누리는 영화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성령은 순간적으로 우리를 완전히 성화 시켜 주시며 이때부터 영적으로 천국에서 영화를 누리게 되며,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부활하므로 썩을 것이 다시 썩지 않을 것을 입어 전인적(全人的)으로 즉 영과 육이 아울러 영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영화의 첫 부분이요 부활의 시기는 영육 모두 영화에 참여하는 완성의 시기입니다.
맺는 말
신앙은 고백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고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 전반에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사회를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긍국적인 하늘의 영화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오늘을 승리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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