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본문
사람이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 집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운동에 남 다른 애정을 갖습니다. 그래서 좋은 운동 기구를 산다든지 또는 유니폼을 장만한다든지 합니다. 또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화투놀이가 심했습니다. 저의 이웃집 아저씨가 굉장히 화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전문가들과 어울러서 지내다가 논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화가 나가지고 다시는 화투를 만지지 않겠다고 나무를 깍는 '짜구'라는 것으로 당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약 3/1정도를 잘랐습니다.
저는 나중에 다친 손만 보았지만 잘려진 손가락이 끔찍했습니다. 대단한 결심 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손이 다 나으니까 잘려진 손으로 또 화투를 하더라는 말입니다. 화투에 관심이 있으니까 손가락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방학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 엄마는 제가 미술가가 좋아요 음악가가 좋아요" 엄마는 "이 녀석이 방학을 하고 이제는 공부를 제대로 하려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나야 아들이 음악가면 어떻고 미술가면 어떻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가방에서 성적표를 꺼냅니다. 엄마가 성적표를 보니까 미술가 음악가를 맞아 온 것입니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생각이 이런 용감한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남의 이야기라고 치고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말 우리의 관심과 생각이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아니면 시간 때우기로 마음은 없고 몸만 와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마음 쓰심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적어도 오늘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희년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희년의 규례는 레위기서 2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칠 곱 번 안식년의 다음해 속죄 일로부터 일년을 지키는 규례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규칙이 있는데 먼저는 원 소유주 환원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토지를 어떤 사람이 원주인에게서 샀다고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채무 탕감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을이라는 사람에게 빛을 졌다고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탕감하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도 희년이 되면 원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노예 환원법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2절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야말로 '은혜의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은혜의 해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희년을 공포함으로서 만물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인간과 만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년의 절기는 땅과 생명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시고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유와 해방을 모든 피조물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도 95년도를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무너진 윤리와 도덕의 수축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교회의 헌신적인 삶을 결단하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적용함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떤 일들을 행하실 것인가를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과연 이 시대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약2700여 전에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서 울려 퍼진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의 사명을 예언한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종' 또는 '메시아'등의 용어는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언급입니다. 1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라고 하고 있는데,이는 바벨론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이사야에게 공식적으로 위임하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시대와 역사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님께서 본 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누가복음4장:18-19절의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그중 메시아의 첫 번째 임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가난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사회 분위기나 형편으로 보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좋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파된다는 것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의 가난함의 히브리말은 '아나윔'입니다.
이 말은 원래 상처와 억압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본문에서의 가난하다는 1차적인 대상은 바벨론의 포로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지만,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보낼 메시아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이 용어는 시편에서 개인적인 재난이나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고대하였던 신실한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둠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말씀이며 사탄의 지배로 신음하는 죽음의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진군해 들어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사열하여서 워커를 신고 처벅처벅 위엄 있고 힘있게 진주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가 선포됩니다. 갇힌 자에게는 놓임의 소식이 들려 집니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 옥에 갇힌 자에게 소망은 무엇일까요 포로 된 자가 가장 학수고대하는 바는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요
열왕기하 7장에 보시면 엘리사 선지자 시절에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오랜 기간동안 전쟁이 계속됨으로 성중에서는 굶주림이 심해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명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성중에 들어가 보아야 먹을 것은 없을 것이고 여기서 굶어서 죽으나 아람 군데의 진중에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여기 앉아서 죽지 말고 올라가서 음식을 좀 얻어먹자 하면서 아람 군데의 진중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그렇게 사기가 충천해 있던 아람 군데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4문둥이는 한 장막에 들어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추었습니다.
9절에 보면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여 든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의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인가요 문둥이들이 전하여준 소식 이것이 아름다운 소식이 아닙니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벌써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식을 전하십니까 죄와 사망과 사탄에 얽매인 억눌린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나를 통해서 전하여지고 있나요
찢기고 상처 난 심령에게 우리의 정성스런 싸 매임이 있나요 이것이 어찌 목회자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횟불 들고 일어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해야 합니다.
레위기서 25장 9,10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칠 월 십일은 속죄 일이니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고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이 말씀은 자유의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혜의 해'라는 것은 문자적인 뜻으로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때에 토지도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노예 되었던 사람도 자기의 원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해방을 말합니다. 마침 이것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온 인류에게 이런 고통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며 안아주시며 받아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반겨 맞이해 주실 때"라고 되어있습니다. 적어도 구약에서 말하는 50년의 기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해가 선포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정말로 은혜의 해를 선포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십니까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본다면 여기의 '은혜의 해'는 포로기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을 말합니다. 그들이 왜 포로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에 징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파 된 것입니다. 빛이 나타날 것이며 이 빛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포로기에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들이 끌러갈 때에는 정말 개처럼 끌려갔는데 이제 포로기에서 돌아올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가련한 새앙 쥐 한 마리가 솔개의 한 끼 요기 감으로 붙들려 가다가는 그만 땅 바닥에 패댕기쳐 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가우타마라는 곳으로 초능력을 지닌 도사 한 분이 살고있었습니다. 도사는 빈대떡이 된 채 벌벌 떨며 숨을 거두는 새앙 쥐가 하도 불쌍하여 그가 지닌 도술로 일단 생명을 연장시킨 다음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놈은 도사의 애완 동물이 되어 도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새앙 쥐를 향하여 달려들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 무슨 살길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한데 마침 이 광경을 보고있던 도사는 이 고양이 보다 더 큰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수일이 지나서 고양이로 변한 새앙 쥐는 사나운 개에게 쫓기다가 겨우 나무위로 올라가서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도사는 술법을 부려 녀석을 송아지 만한 사냥개로 둔갑을 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신바람 났던 새앙 쥐는 깊은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어찌 쥐가 경직되지 않겠는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본 도사는 다시 한번 도술을 부려서 새앙 쥐를 상대방보다도 더 큰 범을 변모 시켜 주었습니다. 이젠 백수의 왕이 된 것입니다. 호랑이로 변하여 기고 만장한 새앙 쥐가 어느 날 생각합니다. 나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다. 한데 도사는 나를 여전히 새앙 쥐 취급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놈은 도사를 아애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도사가 낮잠을 든 것입니다. 녀석은 단숨에 도사를 물어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이를 모르면 도사일 수 있나요 도사는 놈을 옛날의 새앙 쥐로 환원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도에 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평과 불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급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 생명과 천국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었으나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가 잘난 줄로 착각하는 우리들 이 새앙 쥐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또한 이 은혜를 시간을 얻으나 얻지 못하나 전하라고 하셨건만 입을 함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쏟아집니다.
이 은혜의 해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정말 살맛 나는 날이지만 불의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됩니다. 마침 다윗이 시23에서 노래하듯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무리를 괴롭혔던 사탄도 원수들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해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온이라고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허물과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원래 부패하여 죄를 행하고도 그것이 죄 인줄을 모르고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여 살인과 음란함과 도적질을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 위로하십니다. 3절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침 초상집의 분위기에서 결혼하는 분위기로의 전환 같습니다.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화관이란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꽃으로 만든 관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재난이나 슬픈 일이 닥치면 머리에 재를 뿌리고 누더기 옷을 걸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재난 당한 욥이 재를 무릅쓰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시련을 이기지 않았습니까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 성이 멸망한다는 요나의 예언을 듣고는 재를 쓰고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재는 재난이며 슬픔이며 초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대신 화관을 준다는 축복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관심에 귀 기울려야 합니다.
다음은 슬픔 대신 희락의 기름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에 향내나는 값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적인 재난이나 슬픔의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희락의 기름은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근심 대신 주님은 찬송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찬송의 힘은 성경 여러 군데에 나타납니다. 옥에 갇힌 자가 옥에서 풀려나고 악귀에 시달리던 자가 찬송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여 보면 모두 재난과 고통과 슬픔에서 소망으로 나아오는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이 소망의 말씀이 우리의 가정과 나의 일터와 나의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교회에서 이런 복음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이사야가 증거 했던 이 복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절규하시며 외쳤던 이 기쁨의 소식을 이제 우리들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 이 소망이 없으면 누구든지 절망과 슬픔 가운데 빠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막연한 하늘의 구름 잡는 식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으로 도전하시고 위로하시는 어루만지시는 이 복음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억눌린 자에게 복음을 주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 되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과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귀한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마음이 상하고 찢기고, 슬퍼하는 자에게로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 달려가는 발은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구약에서 하나의 법과 의식으로 이어져오던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것이지 아니면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과 관심에 우리의 주위를 집중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뜻을 따라갈 것이지요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도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는 어여뿐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은 왕비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왕비는 왕의 총애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음에도 병이 들어 시름시름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하도 슬퍼서 왕비의 무덤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서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이 왕비의 무덤에 와보니까 거기에 지어 놓은 정자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 지금보다 휠씬 아름답고 커다란 건물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명령대로 커다란 건물을 지였습니다. 그래서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방문객들은 왕비의 무덤에는 안중에 없었고 뿐만 아니라 왕비의 무덤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지어놓은 건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경우를 들어서 주객전도라고 하던가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약하고 하잘것없는 복음으로 변모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관심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잘난 맛에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정말로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고침을 증거 합니까 죄의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며 갇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나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셔서 슬픈 자를 위로하기를 원하며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의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대신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입니다. "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 바꾸라. 슬픔의 상복을 벗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으라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화투놀이가 심했습니다. 저의 이웃집 아저씨가 굉장히 화투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전문가들과 어울러서 지내다가 논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화가 나가지고 다시는 화투를 만지지 않겠다고 나무를 깍는 '짜구'라는 것으로 당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약 3/1정도를 잘랐습니다.
저는 나중에 다친 손만 보았지만 잘려진 손가락이 끔찍했습니다. 대단한 결심 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손이 다 나으니까 잘려진 손으로 또 화투를 하더라는 말입니다. 화투에 관심이 있으니까 손가락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방학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 엄마는 제가 미술가가 좋아요 음악가가 좋아요" 엄마는 "이 녀석이 방학을 하고 이제는 공부를 제대로 하려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나야 아들이 음악가면 어떻고 미술가면 어떻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가방에서 성적표를 꺼냅니다. 엄마가 성적표를 보니까 미술가 음악가를 맞아 온 것입니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생각이 이런 용감한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남의 이야기라고 치고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말 우리의 관심과 생각이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아니면 시간 때우기로 마음은 없고 몸만 와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마음 쓰심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적어도 오늘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희년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희년의 규례는 레위기서 2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칠 곱 번 안식년의 다음해 속죄 일로부터 일년을 지키는 규례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규칙이 있는데 먼저는 원 소유주 환원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토지를 어떤 사람이 원주인에게서 샀다고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채무 탕감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을이라는 사람에게 빛을 졌다고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탕감하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도 희년이 되면 원래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노예 환원법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2절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야말로 '은혜의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은혜의 해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희년을 공포함으로서 만물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인간과 만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년의 절기는 땅과 생명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시고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유와 해방을 모든 피조물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도 95년도를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무너진 윤리와 도덕의 수축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교회의 헌신적인 삶을 결단하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님은 당신에게 적용함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떤 일들을 행하실 것인가를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과연 이 시대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약2700여 전에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서 울려 퍼진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의 사명을 예언한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종' 또는 '메시아'등의 용어는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언급입니다. 1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라고 하고 있는데,이는 바벨론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이사야에게 공식적으로 위임하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시대와 역사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님께서 본 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누가복음4장:18-19절의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그중 메시아의 첫 번째 임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가난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사회 분위기나 형편으로 보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좋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파된다는 것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의 가난함의 히브리말은 '아나윔'입니다.
이 말은 원래 상처와 억압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본문에서의 가난하다는 1차적인 대상은 바벨론의 포로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지만,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보낼 메시아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이 용어는 시편에서 개인적인 재난이나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고대하였던 신실한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둠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말씀이며 사탄의 지배로 신음하는 죽음의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진군해 들어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사열하여서 워커를 신고 처벅처벅 위엄 있고 힘있게 진주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가 선포됩니다. 갇힌 자에게는 놓임의 소식이 들려 집니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 옥에 갇힌 자에게 소망은 무엇일까요 포로 된 자가 가장 학수고대하는 바는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요
열왕기하 7장에 보시면 엘리사 선지자 시절에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오랜 기간동안 전쟁이 계속됨으로 성중에서는 굶주림이 심해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명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성중에 들어가 보아야 먹을 것은 없을 것이고 여기서 굶어서 죽으나 아람 군데의 진중에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여기 앉아서 죽지 말고 올라가서 음식을 좀 얻어먹자 하면서 아람 군데의 진중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그렇게 사기가 충천해 있던 아람 군데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4문둥이는 한 장막에 들어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추었습니다.
9절에 보면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여 든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의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인가요 문둥이들이 전하여준 소식 이것이 아름다운 소식이 아닙니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벌써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식을 전하십니까 죄와 사망과 사탄에 얽매인 억눌린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나를 통해서 전하여지고 있나요
찢기고 상처 난 심령에게 우리의 정성스런 싸 매임이 있나요 이것이 어찌 목회자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횟불 들고 일어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해야 합니다.
레위기서 25장 9,10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칠 월 십일은 속죄 일이니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고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 지며"
이 말씀은 자유의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혜의 해'라는 것은 문자적인 뜻으로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년의 때에 토지도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노예 되었던 사람도 자기의 원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해방을 말합니다. 마침 이것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는 온 인류에게 이런 고통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며 안아주시며 받아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반겨 맞이해 주실 때"라고 되어있습니다. 적어도 구약에서 말하는 50년의 기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해가 선포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정말로 은혜의 해를 선포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십니까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본다면 여기의 '은혜의 해'는 포로기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을 말합니다. 그들이 왜 포로의 신세가 되었습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에 징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파 된 것입니다. 빛이 나타날 것이며 이 빛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포로기에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들이 끌러갈 때에는 정말 개처럼 끌려갔는데 이제 포로기에서 돌아올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가련한 새앙 쥐 한 마리가 솔개의 한 끼 요기 감으로 붙들려 가다가는 그만 땅 바닥에 패댕기쳐 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거기에는 가우타마라는 곳으로 초능력을 지닌 도사 한 분이 살고있었습니다. 도사는 빈대떡이 된 채 벌벌 떨며 숨을 거두는 새앙 쥐가 하도 불쌍하여 그가 지닌 도술로 일단 생명을 연장시킨 다음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놈은 도사의 애완 동물이 되어 도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새앙 쥐를 향하여 달려들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 무슨 살길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한데 마침 이 광경을 보고있던 도사는 이 고양이 보다 더 큰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수일이 지나서 고양이로 변한 새앙 쥐는 사나운 개에게 쫓기다가 겨우 나무위로 올라가서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도사는 술법을 부려 녀석을 송아지 만한 사냥개로 둔갑을 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신바람 났던 새앙 쥐는 깊은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어찌 쥐가 경직되지 않겠는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본 도사는 다시 한번 도술을 부려서 새앙 쥐를 상대방보다도 더 큰 범을 변모 시켜 주었습니다. 이젠 백수의 왕이 된 것입니다. 호랑이로 변하여 기고 만장한 새앙 쥐가 어느 날 생각합니다. 나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다. 한데 도사는 나를 여전히 새앙 쥐 취급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놈은 도사를 아애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도사가 낮잠을 든 것입니다. 녀석은 단숨에 도사를 물어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이를 모르면 도사일 수 있나요 도사는 놈을 옛날의 새앙 쥐로 환원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도에 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평과 불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급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 생명과 천국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었으나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가 잘난 줄로 착각하는 우리들 이 새앙 쥐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또한 이 은혜를 시간을 얻으나 얻지 못하나 전하라고 하셨건만 입을 함구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쏟아집니다.
이 은혜의 해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정말 살맛 나는 날이지만 불의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됩니다. 마침 다윗이 시23에서 노래하듯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무리를 괴롭혔던 사탄도 원수들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해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온이라고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허물과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원래 부패하여 죄를 행하고도 그것이 죄 인줄을 모르고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여 살인과 음란함과 도적질을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 위로하십니다. 3절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침 초상집의 분위기에서 결혼하는 분위기로의 전환 같습니다.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화관이란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꽃으로 만든 관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재난이나 슬픈 일이 닥치면 머리에 재를 뿌리고 누더기 옷을 걸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재난 당한 욥이 재를 무릅쓰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시련을 이기지 않았습니까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 성이 멸망한다는 요나의 예언을 듣고는 재를 쓰고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재는 재난이며 슬픔이며 초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대신 화관을 준다는 축복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관심에 귀 기울려야 합니다.
다음은 슬픔 대신 희락의 기름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에 향내나는 값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적인 재난이나 슬픔의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희락의 기름은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근심 대신 주님은 찬송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찬송의 힘은 성경 여러 군데에 나타납니다. 옥에 갇힌 자가 옥에서 풀려나고 악귀에 시달리던 자가 찬송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여 보면 모두 재난과 고통과 슬픔에서 소망으로 나아오는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이 소망의 말씀이 우리의 가정과 나의 일터와 나의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교회에서 이런 복음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이사야가 증거 했던 이 복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절규하시며 외쳤던 이 기쁨의 소식을 이제 우리들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 이 소망이 없으면 누구든지 절망과 슬픔 가운데 빠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막연한 하늘의 구름 잡는 식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으로 도전하시고 위로하시는 어루만지시는 이 복음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억눌린 자에게 복음을 주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 되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과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귀한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마음이 상하고 찢기고, 슬퍼하는 자에게로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 달려가는 발은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구약에서 하나의 법과 의식으로 이어져오던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것이지 아니면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과 관심에 우리의 주위를 집중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뜻을 따라갈 것이지요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도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는 어여뿐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은 왕비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왕비는 왕의 총애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음에도 병이 들어 시름시름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하도 슬퍼서 왕비의 무덤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서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이 왕비의 무덤에 와보니까 거기에 지어 놓은 정자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 지금보다 휠씬 아름답고 커다란 건물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명령대로 커다란 건물을 지였습니다. 그래서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방문객들은 왕비의 무덤에는 안중에 없었고 뿐만 아니라 왕비의 무덤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지어놓은 건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경우를 들어서 주객전도라고 하던가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약하고 하잘것없는 복음으로 변모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관심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잘난 맛에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정말로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고침을 증거 합니까 죄의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며 갇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나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셔서 슬픈 자를 위로하기를 원하며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의 기쁨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대신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입니다. "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 바꾸라. 슬픔의 상복을 벗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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