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본문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설교하셨는데 그 본문이 오늘 아침에 읽어드린 성경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먼저 주전 600여 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옴으로 역사적인 성취를 보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더 놀랍고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 61:1-3을 읽으시고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약속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절로부터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놀랍고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란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주의 성령님은 기원전 600년경에 이사야의 심령에 임하셨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한량없이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성령님은 기름부음으로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백성들의 제사장을 삼고(출 30:30)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구별하고(상상 16:33)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으신 것처럼(왕상 19:16)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벧전 2:9). 둘째, 성령의 기름부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 계시하신 말씀을 믿게 합니다.
구약의 성소 안에는 다른 불빛은 전혀 허용되지 않고 오직 일곱 금 촛대의 불빛 만이 빛나고 있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생명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이성의 연구나 인간의 해박한 지식으로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야 복음을 깨닫고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일 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부음은 카리스마 즉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은사와 권능을 의미합니다. 행 1:8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성령님의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러한 주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며 법적으로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고 제사장 직분을 받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선지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들의 심령 속에 평화와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치 에스겔이 본 환상의 골짜기처럼 해골과 뼈만 가득합니다. 나오는 것은 원망과 탄식이요, 보이는 것은 절망과 외식이요, 듣는 것은 사욕과 쾌락이요, 걷는 길은 넓고 악한 길입니다. 그리하여 도적질하는 사람을 만난즉 함께 도적질하고 속이는 자를 만난즉 함께 속이고 간음하는 자를 만난즉 함께 간음하는 자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영적인 비극이 우리 가운데 일어납니까 왜 이론과 실제가 다르며 원리와 생활이 다르며 나무와 열매가 다른 이율배반이 생깁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계속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성령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라는 갈 5:25의 말씀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게 되었으니 언제나 항상 매일매일 성령님을 의지하며 생활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요 품군 아들로 돌아온 양자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성령님의 새로운 은사와 능력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엡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는데 여기 “받으라”는 동사는 현재 수동명령형으로 “늘 계속해서 받으라”는 뜻입니다. Meyer는 이 수동태가 거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성령의 충만은 성령으로 인침받은 세례를 받은 후에 간단없이 반복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 그러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며 또 일어날 수가 있으며 또 일어나야만 합니까
첫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한 것처럼 우리는 전도자가 되었고 또 전도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므로 전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의 일을 하지 않으면 부득불 이율배반의 성도가 되고 맙니다. 누가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기록했고, 이사야는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함으로 성령님이 내게 기름부으신 목적이 전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전도자로 구별함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입술에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가르쳐 주신다고(눅 12:12) 약속하셨습니다. 또 성령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하면 주께서 함께하사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해 주신다(막 16:20)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복음은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쉽게 받아드립니다.
약 2:5에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복음은 영원한 의지요, 영원한 자랑이요, 영원한 부유이니 어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치료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으며 또 의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심으로 의사가 되었음에도 의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이론과 실제가 다른 이중인격의 성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상한 우리들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고 죄책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공포에 질렸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령의 기름으로 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육체는 소망 가운데 안연히 거하며 영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고 있습니다(고후 3:18).
오늘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 자들입니다. 죄 때문에, 형벌 때문에, 죽음 때문에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상처를 대신 받으심으로 나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복음만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칩니다. 우리는 훈계나 경계보다 이 순수한 복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더 많이 말해야 합니다. 누가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은 어두운 데 비치는 빛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빛이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심”(고후 4:6)으로 영적 세계에 캄캄한 소경이었던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이웃에는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안약을 발라줍시다. 망할 자들 외에 복음은 더 이상 가리우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행 13:48).
셋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괴롭히고 구속하며 억압한다면 우리는 원리와 생활이 다른 위선적인 성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죄는 부채와 같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채무를 졌습니다.
우리는 죄의 빚을 여호와 하나님께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부득불 여호와 하나님의 감옥인 지옥에서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들의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합니다(요 8:36). 그는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감옥에서 끌어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또한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았으며 사탄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끄는 대로 죄를 밥 먹듯이 짓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시고 사탄의 일을 멸하셨습니다(골 3:13-15, 요일 3:8).
복음은 마귀의 정체를 백일하에 들어냅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모든 권세와 무장을 해제당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더 이상 자기의 지배 아래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지배에서 자유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참소하고 비방하지만 그것은 곧 무저갱에 빠져들어갈 아우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고후 3:17). 할렐루야!
누가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을 소유하기 이전의 우리 마음은 미움과 원한, 질투와 궤사, 반항과 논쟁, 불평과 원망, 불만과 탄식 그리고 패배의식과 탐욕에 가득찬 파괴적인 억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게 임하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랑과 감사와 겸손이 성공의식, 부요의식, 명랑함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포로되었다가 자유를 얻었고 갇혔다가 놓임을 받았으며 눌렸다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하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우리 이웃의 자유를 포로로 삼고, 놓아 주어야 할 것을 가두어 두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에 비인간적인 억압을 예사로 하고, 가족과 이웃의 권리와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제한하고 침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은 젊은이의, 젊은이는 연로한 분의 입장과 처지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고유한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는 오늘날 한국 가정이 당하고 있는 세대차이의 갈등과 인간학대, 성 윤리문제와 노후문제 등에 인간적인 배려와 복음적인 대책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만약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여전히 자기 중심성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이웃이 복음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행복에 무관심하다면 그는 복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존재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진정한 자유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해방과 자유의 복음 안에서 우리 이웃의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위하여 구체적인 희생과 겸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께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에게 위로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무와 열매가 다른 것처럼 부조리 투성이의 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란 7년마다 다가오는 안식년의 일곱 번째 즉 제50년의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해입니다.
희년은 대속제일의 나팔 소리로 시작됩니다(레 25:9). 희년의 나팔이 울러퍼지면 모든 예속된 사람은 해방되고 빚진 사람은 탕감되며 팔렸던 토지는 원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희년은 사회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자유와 기쁨의 해입니다. 참된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과연 지금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입니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린 것처럼(슥 13:1) 오늘날 사죄와 칭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정결하게 하는 샘이 만국에 흘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원수의 압제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소수의 남은 자, 이땅의 거룩한 거루터기인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 보수의 날, 원수 갚는 날이 있음을 전파함으로 그들을 위로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을 철장으로 깨뜨리고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을 날이 곧 올 것이다. 그가 오시면 무릇 시온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모든 자에게 그 재를 대신하여 화관을 씌워줄 것이며 그 슬픔을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을 부어줄 것이며 그 근심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영적인 은혜의 해 아래서 주의 나라를 위하여 슬퍼하고 근심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우주적 은혜의 해가 임하면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하고 성령 안에서 무궁한 의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누릴 것입니다.
다섯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생명나무를 심으시고 하늘나라 포도나무 가지로 삼으시고 양육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복음의 씨앗을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고 물을 주고 양육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만민을 제자로 삼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새끼낳지 않는 불임의 양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시당하는 가련한 앉은뱅이 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접붙임을 받은 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의의 나무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신 최종 목적은 내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의의 열매를 맺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의의 열매 무르익어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낫을 들고 저 의의 열매, 황금 열매를 거둬들이면 추수 주인이 속히 임하여 그의 추수 잔치에 참여할 때 우리들에게 의의 열매, 황금 열매, 기쁨과 자랑과 영광의 면류관이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기독교회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는 성령의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며 복음으로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성령은 복음사역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성령은 복음증거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진행하며 성령으로 마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께 임하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가난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눈 먼 우리를 다시 보게 하셨으며, 포로되고 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것은 우리를 보내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와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이 계속 공급됩니다. 성령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어디든지 가며 무엇이든지 행합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우리는 매일 전도자요 의사며 봉사자와 위로자와 교사가 되었으며 또한 되어야만 합니다. 행 13:4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기름을 부으신 것은 우리를 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치료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위로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봉사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교사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전도자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교육1,2국 주일학교 교사가 됩시다. 권찰회와 구역장회에서 기도하는 구역 임원이 됩시다. 순장대학에서 훈련받고 전도사랑방 순장이 됩시다. 전도특공대에서 전도의 열매를 맺읍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날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 생활을 하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러한 감격과 사명감으로 사는 성도가 참으로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의 차원에 살지 않고 성령의 차원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축복송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함께 부릅시다.
이 복음의 약속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절로부터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놀랍고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란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주의 성령님은 기원전 600년경에 이사야의 심령에 임하셨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한량없이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성령님은 기름부음으로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백성들의 제사장을 삼고(출 30:30)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구별하고(상상 16:33)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삼으신 것처럼(왕상 19:16)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벧전 2:9). 둘째, 성령의 기름부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 계시하신 말씀을 믿게 합니다.
구약의 성소 안에는 다른 불빛은 전혀 허용되지 않고 오직 일곱 금 촛대의 불빛 만이 빛나고 있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생명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이성의 연구나 인간의 해박한 지식으로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야 복음을 깨닫고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일 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부음은 카리스마 즉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은사와 권능을 의미합니다. 행 1:8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성령님의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러한 주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며 법적으로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고 제사장 직분을 받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선지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들의 심령 속에 평화와 사랑과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치 에스겔이 본 환상의 골짜기처럼 해골과 뼈만 가득합니다. 나오는 것은 원망과 탄식이요, 보이는 것은 절망과 외식이요, 듣는 것은 사욕과 쾌락이요, 걷는 길은 넓고 악한 길입니다. 그리하여 도적질하는 사람을 만난즉 함께 도적질하고 속이는 자를 만난즉 함께 속이고 간음하는 자를 만난즉 함께 간음하는 자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영적인 비극이 우리 가운데 일어납니까 왜 이론과 실제가 다르며 원리와 생활이 다르며 나무와 열매가 다른 이율배반이 생깁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계속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성령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라는 갈 5:25의 말씀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게 되었으니 언제나 항상 매일매일 성령님을 의지하며 생활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요 품군 아들로 돌아온 양자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성령님의 새로운 은사와 능력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엡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는데 여기 “받으라”는 동사는 현재 수동명령형으로 “늘 계속해서 받으라”는 뜻입니다. Meyer는 이 수동태가 거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성령의 충만은 성령으로 인침받은 세례를 받은 후에 간단없이 반복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 그러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며 또 일어날 수가 있으며 또 일어나야만 합니까
첫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한 것처럼 우리는 전도자가 되었고 또 전도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므로 전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자의 일을 하지 않으면 부득불 이율배반의 성도가 되고 맙니다. 누가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기록했고, 이사야는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함으로 성령님이 내게 기름부으신 목적이 전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전도자로 구별함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입술에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가르쳐 주신다고(눅 12:12) 약속하셨습니다. 또 성령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하면 주께서 함께하사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해 주신다(막 16:20)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복음은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쉽게 받아드립니다.
약 2:5에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 복음은 영원한 의지요, 영원한 자랑이요, 영원한 부유이니 어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치료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으며 또 의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심으로 의사가 되었음에도 의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이론과 실제가 다른 이중인격의 성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상한 우리들의 병든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고 죄책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공포에 질렸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령의 기름으로 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육체는 소망 가운데 안연히 거하며 영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고 있습니다(고후 3:18).
오늘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 자들입니다. 죄 때문에, 형벌 때문에, 죽음 때문에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상처를 대신 받으심으로 나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복음만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칩니다. 우리는 훈계나 경계보다 이 순수한 복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더 많이 말해야 합니다. 누가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은 어두운 데 비치는 빛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빛이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심”(고후 4:6)으로 영적 세계에 캄캄한 소경이었던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이웃에는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안약을 발라줍시다. 망할 자들 외에 복음은 더 이상 가리우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행 13:48).
셋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괴롭히고 구속하며 억압한다면 우리는 원리와 생활이 다른 위선적인 성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죄는 부채와 같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채무를 졌습니다.
우리는 죄의 빚을 여호와 하나님께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부득불 여호와 하나님의 감옥인 지옥에서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들의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합니다(요 8:36). 그는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감옥에서 끌어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또한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았으며 사탄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끄는 대로 죄를 밥 먹듯이 짓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시고 사탄의 일을 멸하셨습니다(골 3:13-15, 요일 3:8).
복음은 마귀의 정체를 백일하에 들어냅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모든 권세와 무장을 해제당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더 이상 자기의 지배 아래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지배에서 자유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참소하고 비방하지만 그것은 곧 무저갱에 빠져들어갈 아우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고후 3:17). 할렐루야!
누가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을 소유하기 이전의 우리 마음은 미움과 원한, 질투와 궤사, 반항과 논쟁, 불평과 원망, 불만과 탄식 그리고 패배의식과 탐욕에 가득찬 파괴적인 억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게 임하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랑과 감사와 겸손이 성공의식, 부요의식, 명랑함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포로되었다가 자유를 얻었고 갇혔다가 놓임을 받았으며 눌렸다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하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우리 이웃의 자유를 포로로 삼고, 놓아 주어야 할 것을 가두어 두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에 비인간적인 억압을 예사로 하고, 가족과 이웃의 권리와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제한하고 침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은 젊은이의, 젊은이는 연로한 분의 입장과 처지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고유한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는 오늘날 한국 가정이 당하고 있는 세대차이의 갈등과 인간학대, 성 윤리문제와 노후문제 등에 인간적인 배려와 복음적인 대책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만약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말하는 사람이 여전히 자기 중심성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이웃이 복음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행복에 무관심하다면 그는 복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존재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진정한 자유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해방과 자유의 복음 안에서 우리 이웃의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위하여 구체적인 희생과 겸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께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에게 위로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무와 열매가 다른 것처럼 부조리 투성이의 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란 7년마다 다가오는 안식년의 일곱 번째 즉 제50년의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해입니다.
희년은 대속제일의 나팔 소리로 시작됩니다(레 25:9). 희년의 나팔이 울러퍼지면 모든 예속된 사람은 해방되고 빚진 사람은 탕감되며 팔렸던 토지는 원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희년은 사회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자유와 기쁨의 해입니다. 참된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과연 지금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입니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린 것처럼(슥 13:1) 오늘날 사죄와 칭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으며 정결하게 하는 샘이 만국에 흘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원수의 압제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소수의 남은 자, 이땅의 거룩한 거루터기인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 보수의 날, 원수 갚는 날이 있음을 전파함으로 그들을 위로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을 철장으로 깨뜨리고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을 날이 곧 올 것이다. 그가 오시면 무릇 시온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모든 자에게 그 재를 대신하여 화관을 씌워줄 것이며 그 슬픔을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을 부어줄 것이며 그 근심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영적인 은혜의 해 아래서 주의 나라를 위하여 슬퍼하고 근심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우주적 은혜의 해가 임하면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하고 성령 안에서 무궁한 의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누릴 것입니다.
다섯째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생명나무를 심으시고 하늘나라 포도나무 가지로 삼으시고 양육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복음의 씨앗을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고 물을 주고 양육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 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만민을 제자로 삼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새끼낳지 않는 불임의 양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시당하는 가련한 앉은뱅이 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접붙임을 받은 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의의 나무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신 최종 목적은 내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의의 열매를 맺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의의 열매 무르익어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낫을 들고 저 의의 열매, 황금 열매를 거둬들이면 추수 주인이 속히 임하여 그의 추수 잔치에 참여할 때 우리들에게 의의 열매, 황금 열매, 기쁨과 자랑과 영광의 면류관이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기독교회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는 성령의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며 복음으로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성령은 복음사역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성령은 복음증거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진행하며 성령으로 마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께 임하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가난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눈 먼 우리를 다시 보게 하셨으며, 포로되고 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것은 우리를 보내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와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이 계속 공급됩니다. 성령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어디든지 가며 무엇이든지 행합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우리는 매일 전도자요 의사며 봉사자와 위로자와 교사가 되었으며 또한 되어야만 합니다. 행 13:4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기름을 부으신 것은 우리를 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치료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위로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봉사자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교사로 보내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전도자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교육1,2국 주일학교 교사가 됩시다. 권찰회와 구역장회에서 기도하는 구역 임원이 됩시다. 순장대학에서 훈련받고 전도사랑방 순장이 됩시다. 전도특공대에서 전도의 열매를 맺읍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날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 생활을 하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러한 감격과 사명감으로 사는 성도가 참으로 신령한 사람입니다. 육의 차원에 살지 않고 성령의 차원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축복송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함께 부릅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