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치유
본문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는 상반된 명암이 교차합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구원과 심판,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두움, 저주와 축복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희망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으로 끝나는 인생을 수없이 봅니다. 이혼급증, 가정의 붕괴, 성적 부패로 오염되어 가는 세상을 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절망, 죽음, 좌절,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 중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심판 가운데 구원받고, 실패 후 성공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두움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로 변화되고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는 사람도 가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명암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희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대 전도집회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고 그 중 86명이 이번 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분이 간증을 했는데 그분이 간증을 할 때 그분도 울고 우리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 분은 노조 위원장을 하며 회사와 동료를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깨닫기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은 예수님을 오래 믿어온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감동과 눈물이 가득한 첫 사랑을 잊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부흥을 일으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우리 삶 속에 누리기 위해서는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이미 여러분의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란 단어를 듣고도 눈물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이미 무디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을 한 일이 없고 무지막지한 죄를 졌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내 영혼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감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합니다. 태초부터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그분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고 이천년을 기다렸기에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조건 없는 아버지의 사랑, 영원불변하신 사랑,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사랑, 망부석처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의 혁명에 일어납니다.
십자가 경험하기
두 번째, 우리 신앙과 삶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감동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십자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체험은 십자가 체험입니다. 십자가 체험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하고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그 십자가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은 내 정과 욕심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없이 십자가 설교만 듣고 가기 때문에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라고 아무리 찬양을 불러도 십자가는 내게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거룩한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 할 말 다하고 내 주장 다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니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기를 찢는 것이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는 하지만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경험은 바로 자아가 깨지는 경험입니다.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옛 사람, 육의 사람, 옛 성품이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못된 성품을 그대로 둔 채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활하고 강퍅하고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많은 것을 개성이나 특성이라고 하며 그대로 둡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 성격입니다. 귀신 성격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은 남에게 위로와 격려,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멋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 육신, 자아, 옛 성품이 죽는 경험, 고통, 아픔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와 십자가의 고통이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집회는 방언하고 예언하고 불덩어리가 임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가 죽는 경험이 없는 성령체험은 감상적입니다. 영적 쾌락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랑, 내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능력이 있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은사 자랑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 경험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보혈이 만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 중 뜨거움은 있으나 비인격적 부분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받아 뜨거운 것은 좋은데 비인격적인 부분도 가끔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새벽마다 방언하던 사람이 시험 시간에 컨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령 경험이 천박스럽고 무능하고 피상적이고 기복이 심한 것은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회개가 따릅니다.
회개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감상적 경험, 종교적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자기 생명을 내 놓습니다.
성령을 내 안에 받으라
우리 삶이 빛으로 향하는 변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세 번째는 성령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성령 경험은 십자가 경험입니다. 그것은 보혈의 체험입니다. 십자가의 경험과 보혈의 경험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자기 의지, 내 생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의지로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그 분의 인치심, 그 분의 세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경험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 봉사를 하면서도 내적인 능력이 내 안에 없는 것은 십자가의 체험과 성령의 체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종합한 말이 로마서 8장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 불같은 성령이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예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인치심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지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형극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이 실로 묶여진 인형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인형,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일까요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내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성령이 능력이 있으니 돈을 주고 사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인위적인 행위, 기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은 오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가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 24절부터 2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게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영을 주셔서 새 사람을 만들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이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내가 성령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 저주를 끝내고 내가 축복, 회복을 해주겠다고 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겔 33장에서 48장까지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은 심판과 치유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32장은 심판에 대한 예언만 나옵니다. 심판을 끝내고 33장부터 48장까지 축복을 주고 모든 심판을 끝내고 모든 저주를 끝내고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부활시켜주겠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33장에서 48장까지의 핵심단어는 ‘새 영’입니다. 마른 뼈에도 생기가 들어가게 하고 성전에서도 샘물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는 것입니다. 영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떤 사람, 어떤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이 역사하는 것이 나타나 그곳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일어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구약에는 어떤 사람, 선지자, 임금, 지도자 어느 시대에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가기만 하면 기적과 치유와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여러분 오늘은 성령이 쏟아지는 날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님은 이곳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그 성령이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던 그 놀라운 성령이 오늘 여러분과 나와 이곳에 있는 분들과 서빙고, 부천에 있는 분들에게 쏟아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축복입니다.
성령 시대의 축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 만나를 가득 채우시고 누구든지 만나를 먹도록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약속을 믿고 손을 펴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성령은 오셨습니다. 성령은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환영하기만 하면 오늘 약속된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성령을 이래도 외면하겠습니까 지금 입을 열어 ‘아멘’ 하십시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을 환영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약속된 성령이, 능력, 기름부으심이 오늘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약속한 것, 내가 지금까지 네게 가르친 모든 것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 누구에게나, 모든 시대에 부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면 그 축복이 지금 임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주님이 약속한 방언, 능력, 예언, 병고침, 사랑의 은사 다 받으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뱅이가 아닙니다. 풍성한 사람입니다.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요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복의 존재인줄 믿습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는 상반된 명암이 교차합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구원과 심판,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두움, 저주와 축복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희망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으로 끝나는 인생을 수없이 봅니다. 이혼급증, 가정의 붕괴, 성적 부패로 오염되어 가는 세상을 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절망, 죽음, 좌절,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 중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심판 가운데 구원받고, 실패 후 성공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두움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로 변화되고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는 사람도 가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명암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희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대 전도집회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고 그 중 86명이 이번 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분이 간증을 했는데 그분이 간증을 할 때 그분도 울고 우리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 분은 노조 위원장을 하며 회사와 동료를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깨닫기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은 예수님을 오래 믿어온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감동과 눈물이 가득한 첫 사랑을 잊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부흥을 일으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우리 삶 속에 누리기 위해서는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이미 여러분의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란 단어를 듣고도 눈물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이미 무디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을 한 일이 없고 무지막지한 죄를 졌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내 영혼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감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합니다. 태초부터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그분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고 이천년을 기다렸기에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조건 없는 아버지의 사랑, 영원불변하신 사랑,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사랑, 망부석처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의 혁명에 일어납니다.
십자가 경험하기
두 번째, 우리 신앙과 삶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감동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십자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체험은 십자가 체험입니다. 십자가 체험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하고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그 십자가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은 내 정과 욕심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없이 십자가 설교만 듣고 가기 때문에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라고 아무리 찬양을 불러도 십자가는 내게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거룩한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 할 말 다하고 내 주장 다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니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기를 찢는 것이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는 하지만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경험은 바로 자아가 깨지는 경험입니다.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옛 사람, 육의 사람, 옛 성품이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못된 성품을 그대로 둔 채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활하고 강퍅하고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많은 것을 개성이나 특성이라고 하며 그대로 둡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 성격입니다. 귀신 성격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은 남에게 위로와 격려,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멋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 육신, 자아, 옛 성품이 죽는 경험, 고통, 아픔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와 십자가의 고통이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집회는 방언하고 예언하고 불덩어리가 임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가 죽는 경험이 없는 성령체험은 감상적입니다. 영적 쾌락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랑, 내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능력이 있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은사 자랑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 경험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보혈이 만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 중 뜨거움은 있으나 비인격적 부분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받아 뜨거운 것은 좋은데 비인격적인 부분도 가끔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새벽마다 방언하던 사람이 시험 시간에 컨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령 경험이 천박스럽고 무능하고 피상적이고 기복이 심한 것은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회개가 따릅니다.
회개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감상적 경험, 종교적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자기 생명을 내 놓습니다.
성령을 내 안에 받으라
우리 삶이 빛으로 향하는 변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세 번째는 성령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성령 경험은 십자가 경험입니다. 그것은 보혈의 체험입니다. 십자가의 경험과 보혈의 경험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자기 의지, 내 생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의지로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그 분의 인치심, 그 분의 세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경험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 봉사를 하면서도 내적인 능력이 내 안에 없는 것은 십자가의 체험과 성령의 체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종합한 말이 로마서 8장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 불같은 성령이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예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인치심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지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형극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이 실로 묶여진 인형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인형,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일까요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내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성령이 능력이 있으니 돈을 주고 사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인위적인 행위, 기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은 오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가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 24절부터 2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게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영을 주셔서 새 사람을 만들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이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내가 성령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 저주를 끝내고 내가 축복, 회복을 해주겠다고 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겔 33장에서 48장까지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은 심판과 치유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32장은 심판에 대한 예언만 나옵니다. 심판을 끝내고 33장부터 48장까지 축복을 주고 모든 심판을 끝내고 모든 저주를 끝내고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부활시켜주겠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33장에서 48장까지의 핵심단어는 ‘새 영’입니다. 마른 뼈에도 생기가 들어가게 하고 성전에서도 샘물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는 것입니다. 영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떤 사람, 어떤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이 역사하는 것이 나타나 그곳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일어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구약에는 어떤 사람, 선지자, 임금, 지도자 어느 시대에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가기만 하면 기적과 치유와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여러분 오늘은 성령이 쏟아지는 날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님은 이곳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그 성령이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던 그 놀라운 성령이 오늘 여러분과 나와 이곳에 있는 분들과 서빙고, 부천에 있는 분들에게 쏟아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축복입니다.
성령 시대의 축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 만나를 가득 채우시고 누구든지 만나를 먹도록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약속을 믿고 손을 펴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성령은 오셨습니다. 성령은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환영하기만 하면 오늘 약속된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성령을 이래도 외면하겠습니까 지금 입을 열어 ‘아멘’ 하십시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을 환영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약속된 성령이, 능력, 기름부으심이 오늘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약속한 것, 내가 지금까지 네게 가르친 모든 것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 누구에게나, 모든 시대에 부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면 그 축복이 지금 임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주님이 약속한 방언, 능력, 예언, 병고침, 사랑의 은사 다 받으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뱅이가 아닙니다. 풍성한 사람입니다.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요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복의 존재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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