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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의 부름과 거듭남

본문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두 가지 근거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 세상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는 인간이 영원한 세계를 찾아가는 종교로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영원하신 분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로 기독교가 바로 그런 종교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감으로 만나는 것으로 가르치는 기독교의 종파도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은 강조되겠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오시어 은혜를 베푸시는 사실을 너무 많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메시아의 구원을 가르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이도 인간세상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호렙 산에서 장인의 양을 치던 모세를 민족해방의 영도자로 삼으신 이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대사도가 되게 하신 이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고전 15:10)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 중에도 처음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 내가 필요해서 믿은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각하니 나의 결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고백을 가지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령의 소명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시어 그의 곁으로 부르시는 역할을 하신 분이 성령이고, 그것을 성령의 부름심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역사에는 지난주일 말씀드린 대로 일반은총의 사역도 있지만 성령의 주된 사역은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의 사역입니다.
이 성령의 특별은총에 대하여 지금 한국 교회는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며, 그래서 잘못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즉 성령은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는 분으로 알고 우리와의 만남도 이런 외형적인 현상 즉 환상을 보여주고, 음성을 들려주는 것을 통하여 접촉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또 그래야 성령을 받고 체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특별은총은 부르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알지 못하는 잘못된 신앙의 형태입니다. 즉 죄에 빠져 있는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것에서 성령의 특별은총의 사역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의 종류 - 외소와 내소
성령의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외소(外召)이고, 두 번째는 내소(內召)입니다. 저는 4대째 예수님을 믿어 오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오랫동안 질병과 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지금 다 설명할 수 없으나 한가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 외형적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으로 부르신 것을 외소라고 합니다. 믿는 가정, 믿는 부모, 믿는 형제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 이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초청에 접하게 되는 것이 모두 외소에 속합니다.
물론 이런 외소를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의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또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권고와 초청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이 임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소에는 성령의 역사가 외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적인 회개와 믿음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전도집회나 부흥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청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고,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 구원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령의 부르심의 은혜를 내적으로 받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집회를 하였을 때, 첫 주일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 다음 주일에는 온 성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반응이 두 가지로 일어났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대사도 바울이지만, 성령의 역사가 강한 초대교회 시절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사모하여 모인 사람들이지만, 모인 사람들이 다 예수를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에게만 성령의 부르심이 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소는 구원을 위하여 예정된 자에게 베풀어지는 특별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은 성령에 의한 부름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성경의 예를 들어서 여러 방면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친지들을 초청하였는데, 처음 초청한 사람들은 모두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왕은 대로변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무조건 데려 오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연회장이 초만원을 이루었을 때, 왕은 손님들을 만나려고 연회장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왕은 노하여 그를 결박하여 밖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길에서 강제로 끌려 온 것 같은데 언제 예복을 갈아입을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약간 이상하군"하고 느끼겠지만 중동지방에는 손님들의 예복을 주인 측에서 미리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문으로 들어오면 누구든지 예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예복을 입지 못한 것입니다(마 22:1-14).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결론을 내리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초청은 받지만 예복을 입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성령의 부르심을 받지 못함으로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정된 자에게 오라고 부르시고, 예복을 입혀 주시며, 믿게 하시는 성령의 내소를 유효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유효적 소명은 불변적인 소명입니다. 즉 한번 부르심을 받았으면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취소하거나 내용을 변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8:29).
소명의 확인
그러면 그 부름심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믿어지는지 여부를 묻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진심으로 "예"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성령의 내소가 임하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진심으로 아멘 하신 분들은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
중생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하여 임하시면 이때부터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성령론은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이제 중생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중생이란 새 생명의 발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자연적으로 자녀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매우 신비합니다. 그런데 자녀를 해산하려면 먼저 임신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임신이란 어머니의 복중에서 한 생명이 발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임신의 문제는 성령으로 인한 중생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 죄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혼에 성령이 오시면 새 생명이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새 생명의 발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생 시에 발생하는 새 생명은 홀연히 되는 것입니다.
복중의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는 10개월이라는 시간을 두고 자라야 하겠지만 새 생명이 발생하는 것은 10개월씩 걸리는 것이 아니고 홀연히 순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순간 홀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복중에서 생명이 발생하는 것이 순간적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나 여타 교파에서는 중생은 차츰차츰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란 것을 이 설교를 끝까지 듣고 계시면 자연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중생은 피동적이며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지기가 세상에 태어날 것을 미리 부모에게 건의하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부모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태어났고, 또 거절할 수 없이 태어났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도 영혼의 부모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쪽의 노력이나, 건의나, 의견이 삽입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일어나는 것이며 이때 우리의 의식은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는 잠재의식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신학인 알미니안주의는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과 결단 그리고 자기의 노력에 의하여 중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견은 인간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원을 동경은 하지만 영원에 이르지는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마치 부모에 의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에 의하여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내가 거듭나게 된 것을 믿으며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중생은 새 생명의 발생일 뿐 인간성이나 삶의 변화는 아닙니다.
이런 변화는 복중에서 발생한 새 생명이 10개월간 자라고, 세상에 태어난 후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언급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막 복중에서 발생한 새 생명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혜로 중생한 새 생명을 향하여 성자가 되라든가, 성숙한 인격과 삶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보는 사회 일반의 시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 자신도 생각하는 각도가 그렇지 않습니다. 즉 중생한 영혼을 가진 신자는 모두 성자가 되기를 요구받고, 자신도 그러해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새 생명이 발생하고 태어나기도 전에 곧바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중생한 영혼을 가진 신자의 인격도 자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점진적으로 자라면서 신앙의 인격이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의 유익
중생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중생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소생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해골 골짜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즉 해골이 된 마른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여호와 하나님의 물음에 에스겔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뼈를 향하여 말씀을 전할 것을 명하시고 에스겔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뼈들이 서로 연합하면서 사람의 모습이 되는데,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생기가 들어와 그 뼈들이 살아날 것을 예언하자 모두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우리의 중생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죽은 영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외소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다시 살아나는 중생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하늘의 성령이 생기로 임하게 되니 중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란 죽은 영혼이 하늘의 생령인 성령을 받고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가르쳐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 모두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중생은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
중생이란 완악하고 패괘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고, 복음을 아멘으로 받고,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순종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반항적이던 사람이 중생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심으로"(고후 4:6)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의 영광을 알고 그 영광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 곁으로 부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 부드럽고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특별은총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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