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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의 선물

본문

오늘 읽은 요엘서 말씀은 구약시대,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에 요엘선지가 한 예언입니다. 그는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줄 날이 온다. 그 날은 너의 아들과 너의 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리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성령강림절에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사실 더 큰 의미에서 이 성령의 강림은 우리 개인뿐이 아니라 이 나라나 사회에 힘을 줄 수 있고 꿈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문제는 그 사회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고리끼는 러시아의 온갖 부조리가 가득찬 때에 그는 그의 글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오늘 러시아에 가장 위험한 것은 젊은이들이 노인들이 전부 꿈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꿈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고 누구하고도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이 절망을 결국에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비극이 올 것이다. " 그래서 결국에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20세기에 가장 비극이었던 공산주의 혁명과 유럽의 독일에 나찌스혁명인데, 이 나찌스혁명도 꿈을 잃어버리고, 비전(vision)을 잃어버리고 니힐리즘(nihilism)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그 허무를 조직화한 것이 나찌즘인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이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말씀으로 다가와 있는 것입니까 이번에 정부에서 새천년기획위원회라고 하는 것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천년, 백년을 맞을 준비를 분주하고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맞이하고 새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밝은 전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가능성이 많기는 새천년은 고사하고 새 백년 동안에 지구의 생명은 다 없어져 버리거나, 설령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반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날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힘, 우리들의 겉이 아닌 그 근본으로부터 새롭게 할 수 있는 강한 힘이 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 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오는 힘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을 완전히 바꿔놓을 파워입니다. 말하자면 아황산가스가 가득한 방에 문을 열어서 산소가 섞인 새바람이 들어오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런 힘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김경재 목사께서는 성령을 하늘의 바람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좋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은 넘어 선 것을 말합니다. 위에서부터 불어 들어오는 새바람, 새힘 그것이 없이는 철저히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강림주일 첫 주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동양사람들에게는 성령이란 말이 낯섭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양사람들은 꼭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은 아닐지라도 천기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늘의 기운' 이 하늘은 기로 가득 차 있는데 이 기를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것은 경혈이 막혀 있기 때문인 것이라는 겁니다. 성령과 아주 비슷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주째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성령을 하나의 파워, 힘, 에너지 이런 것으로 여기는 것보다 그 성령이 지금 내게로 들어왔느냐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그럼 들어온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물론 그것을 과학적으로는 검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을 그 징조(sign)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인을 통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의 외적인 표징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인(sign)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새로운 로고스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생각해오던 인생관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이 바뀌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우리 가운데 들어왔다고 하는 증거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전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부터 질적인 변화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로고스는 그 어떤 철학자의 그것만이 아니고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그 근원적인 파워였습니다.
특별하게 지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가 불렀습니다. 그러한 로고스가 사람의 몸을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분은 자신을 말하기를 "나는 진리다"라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다가 말했습니다. 진리가 된 로고스! 그 진리가 된 로고스는 결국 이 세상에 있다가 떠나면서 "나는 이제 곧 너희 곁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모든 이 힘을 진짜로 가져올 분은 성령이다. 내가 그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야만 하기 때문에 성령이 너희에게 오게 되면 너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 육신이 된 로고스인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신 첫 번째 선물이 되는 새로운 로고스인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었으며, 예수님의 성육신 이였으며 지금 우리의 삶과 행동의 가치관을 바꿔놓으시는 힘인 것입니다. 결국 세 가지의 영의 모습은 결국에는 참진리라는 것으로 일치된다고 요한복음서는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우리들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그 이전의 사고방식이 계속되고 있다면 이것은 아직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로고스를 선물로 받게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너희는 내 말대로 살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참된 진리 그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 들인 사람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명백하게 자유로 나타납니다. 마틴루터가 한 말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이제는 이 세상에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죄는 옛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 한 것은 성령의 선물로 받고 참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때에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또 다른 표징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게 된 사람들, 복음으로 자유로와 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져야될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새로운 파토스(pathos)입니다. 내 능력과 내 생각의 판단이 아니고 그런 새로운 눈으로 사람과 천지만물을 볼 수 있게 되는 때에 우리는 새로운 파토스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온 우주 만상과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관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이 내 삶에서 치밀어 오르는 새로운 파토스, 그것이 오는 그때에 이러한 것을 받게 되는 것을 무엇이 그렇게 하게되는 것인가 하면 성령으로부터 오는 힘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만드는 에너지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운데 오면 이 로고스와 파토스가 무엇을 만드는가 하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고린도전서 5장 4절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하늘에서 오는 선물을 받았다. 이것을 '카리스마타'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서 어느 것이 더 높고 어느 것이 더 낮고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각각 받은 '카리스마타'를 그냥 놓아 두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모두 모여서 한 공동체를 만들어 낼 때 마치 사람의 몸이 눈, 코, 입, 귀 다 다르지만 하는 일도 다르지만 그것이 다 따로 있지 않고 우리 몸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뤄 하나를 만들어 낼 때 바로 그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몸이라 부르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바로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있는 그대로 서로 연결이 되어지는 것, 서로 도와가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엘리옷이 한말 중에 지옥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나다라고 한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생명이란 것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현실속에서 느끼는 것, 역사속에서 느끼는 그것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아는 공동체는 무슨 일을 하느냐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를 배반한 온 세상과의 사이에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너희는 이제 화해의 사절이 되어 이 세상에 나가서 화해를 성취하라" 에베소 2장 14절에서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갈라진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몸대로 본받아서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인 것입니다. 예배를 올바로 드렸다면 세상에 나가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둠 같은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전의 가치관으로 잘못된 정치판과 사회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과오와 실수가 이 세상에 넘치더라도 그러한 속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들어오는 파워가 들어와서 우리로 새로운 일을 하게 합니다. 이 새롭게 하는 힘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모든 세상이 절망적인 상태로 빠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 기도마저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일 때 우리가 아무 음성도 안 지르고 침묵만 있는 때에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구원의 음성이 되는 힘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성령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되는 것이요, 꿈을 잃어버린 이 세상속에서 아무리 노인일지라도 꿈을 갖게 되는 것이요, 젊은이들이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시대를 보는 큰 비전을 볼 수 있으며 멀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향하여 우리들에게는 좌절과 어두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믿는 까닭에 일곱 번 넘어지면 다시 비척걸음을 치면서 여덟 번째 일어나서 그 길을 향하여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성령이 이미 와서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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